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포스터 이미지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포스터 이미지 ⓒ 찬란

 
1_역사적인 재즈명장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다큐멘터리가 시작되자마자 지미 쥐프리 트리오의 정교한 연주가 스트레이트하게 치고 들어온다. 그 연주가 온전히 끝난 후에야 영화 속 상황이 간략히 소개된다. 때는 바야흐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으로 있던 시절, 동서 냉전이 격화되고 있긴 했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벨 에포크'와 다름없었던 시절인 1958년이다. 미국이 독립할 당시 최초의 13개 주를 이루던 로드아일랜드주 이름의 유래가 된, 여의도 면적의 10배쯤 되는 로드 섬 뉴포트 항구에서 1954년부터 미국 최초의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다.

해마다 휴가철이 되면 많은 이들이 바다와 재즈를 즐기기 위해 로드아일랜드를 찾았다. 이 해에도 일만 명이 넘는 인원이 야외 객석을 가득 채웠다. 거리에는 아마추어 뮤지션들이 즉흥연주를 펼치고 휴가철 방문객들은 일상에서 해방감을 만끽하는 중이다. 사고방지를 계도하는 안내방송이 끊이지 않는다. 청중들은 두근거리는 표정으로 공연을 기다리는 중이다. 카메라는 특색 있는 관객들을 골라내 담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재즈 팬이라면 가슴이 떨릴 이름이 호명된다. 모던재즈의 거장 셀로니어스 몽크가 의자에 앉아 피아노를 연주한다. 아스퍼거 증후군을 갖고 있던 그답게 당대 뮤지션들이 구사하던 입담이나 개그는 전혀 없이 과묵함 그 자체다. 하지만 매혹적인 연주를 쭉 선보인 다음 무뚝뚝한 얼굴로 객석에 인사를 전하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를 아끼지 않는다. 이어서 소니 스틱의 색소폰과 살 살바도르의 기타가 정묘한 협연으로 다시 좌중을 끌어들이고, 그 뒤를 이어 1950년대를 대표하는 디바, 아니타 오데이가 맛깔 나는 보컬과 스캣으로 관중들을 마구 매료시킨다.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스틸 이미지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스틸 이미지 ⓒ 찬란

 
막간 휴식시간, 뉴포트 해변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휴가를 즐긴다. 파티를 열고 악기를 연주하고 사랑을 나눈다. 축제의 기운이 지역 곳곳에 스며들고 있다. 동일한 시기에 뉴포트 앞바다에서 열리던 아메리카 컵 요트대회 시합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조항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경주하는 요트들과 재즈의 자유분방한 선율이 한 폭의 그림처럼 합쳐진다.
 
조지 시어링 퀸텟의 혼신의 연주에 이어 당대 블루스 보컬의 여왕 다이나 워싱턴의 보컬이 쫙쫙 울려 퍼진다. 쿨재즈의 명인, 색소포니스트 게리 멀리건과 그의 쿼텟이 한바탕 짜릿한 음의 향연을 선보이고, 다시 보컬리스트 빅 메이벨 스미스와 뉴포트 블루스 밴드의 공연이 이어진다. 어느새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간다.
 
록큰롤의 시조, 척 베리가 등장해 '좋은 나이 열여섯'을 열창하자 객석은 흥겹게 자지러진다. 재즈와 블루스에서 록큰롤이 탄생하는 과정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듯한 순간이다. 이어서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제목을 떠올리게 하려는 듯 밤의 부드러운 어둠 속에서 치코 해밀턴 퀸텟의 고도로 테크니컬한 연주의 협연이 등장하고 객석은 그 소리의 조화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2_루이 암스트롱의 등장에서 공연은 절정에 이르고
 
갑자기 무대가 떠들썩해진다. 세계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루이 암스트롱이 등장한 것이다.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와 사람 좋은 표정으로 걸쭉한 만담을 펼치는 그의 말상대도 보통 인물은 아닌 듯하다. 알고 보니 미국 정부가 운영하던 공영 라디오 방송 '미국의 소리' 진행자이자 PD인 윌리스 코노버다. 위대한 뮤지션에 대한 경의와 존중이 담긴 진행이 느껴지는 현장이다.
 
이어서 루이 암스트롱의 명불허전 트럼펫 연주와 오직 그만이 해낼 수 있는 노래들이 관중들을 혼연일체로 만든다. 멀티앵글로 잡힌 그의 표정과 공연의 현장감은 몰입되지 않을 수 없는 경지다. 대표곡 'What a Wonderful World'로만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어쩌면 충격에 빠질지도 모를 정도로 무대에 우뚝 선 거인의 풍모다. 때로는 뉴올리언스에서 재즈가 태동할 무렵의 애조 가득한 멜로디와 함께 가족을 그리워하다가도 비밥의 경쾌한 즉흥 악곡이 오감을 자극하는 열정으로 순식간에 전환한다. 왜 또 다른 재즈의 대가 마일즈 데이비스가 그를 재즈 그 자체라 칭했는지 공감 백배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는 진행자가 잔뜩 달아오른 객석에 정숙을 요청한다. 가스펠의 여왕 마할리아 잭슨의 등장이다. 그녀의 입술에서 영가가 흐르기 시작하자 청중들은 금방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 경건해진다. 그리고 뒤를 이어 주기도문이 가스펠로 독창된다. 관객들의 표정이 찬찬히 조명되면서 꿈의 무대는 마침표로 향한다. 그리고 뉴포트에서의 휴가를 즐긴 연주자들이 악기를 싣고 귀향길에 오른다. 크레디트가 뜨기 시작한다. 브라보!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스틸 이미지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스틸 이미지 ⓒ 찬란

 
3_뉴포트 재즈 페스티벌의 영화화 의의
 
마릴린 먼로의 사진집은 물론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돈나, 케이트 모스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패션사진계의 정점에 있게 될 저명한 사진가 버트 스턴은 그의 경력 중 유일한 장편 다큐멘터리 영화를 작업하게 된다. 바로 1958년 5회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공연실황이다. 5대의 카메라로 동시 풀 컬러로 촬영한 본 공연실황은 현대 공연실황 기록영화의 효시가 되었다.

무려 60여 년이 지난 작품이지만 구성과 전개는 현재의 대규모 음악공연 실황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만큼 본 품의 구성이 현대적이고 이후 유사한 작업들의 전범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뮤지션들이 펼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재즈 역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도 충분히 어느 순간부터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선율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감독 버트 스턴은 정식적인 영화 작법 대신 패션 포토그래퍼의 시선으로 무빙 이미지를 당시로선 첨단에 가까운 총천연색으로 구현해낸다. 뮤지션들의 공연 실황 중간에 백 스테이지 표정을 삽입하는 것처럼 객석의 풍부한 표정과 행색들, 뉴포트 거리의 낭만적인 시간들을 가득 담았다. 때는 바야흐로 1960년대 격렬한 사회갈등과 베트남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기 전의 좋았던 미국. 지나치게 민감하기보단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라며 굳이 차이를 강조하지 않고 어울리던 과거의 낭만적으로 묘사된 미국이 영화 속에 온전히 구현되어 있다.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스틸 이미지

영화 <한여름밤의 재즈> 스틸 이미지 ⓒ 찬란

 
영화가 끝나고 몇 년이 지난 뒤라면 같은 무대에 섰던 이들 중 루이 암스트롱은 백인에게 아첨하는 톰 아저씨의 이미지로 비판을 받고, 마할리아 잭슨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역사적 선언 현장에서 축가를 부르며 민권운동의 선봉에 나서게 될 테지만, 1958년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 해변은 아직 그런 미래와는 한참 떨어져 있다. 영화 속 시공간에서는 그저 흥겹게 (다수의) 백인과(소수의) 흑인이 재즈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가장 미국적인 음악으로 손꼽히는 장르인 재즈의 당대 정수를 담은 영화는 마치 그 시대를 압축해놓은 것처럼 느껴진다.
 
다큐멘터리는 1999년 세계영화사에 기록될 명작들과 함께 미국 국회의사당에 영구 소장되었고, 개봉 60주년을 맞이해 4K로 리마스터링 작업 후 2019년 미국과 일본에서 재개봉했다. 그리고 3년 만에 재즈의 열풍이 세계를 순회하듯 한국에도 마침내 상륙했다. 기왕 궁금하다면 극장에서 대화면으로, 그리고 반드시 크게 들을 것!
 
<작품정보>
한여름밤의 재즈 Jazz on a Summer's Day
1959|미국|다큐멘터리 / 재즈 페스티벌 실황
2022. 9. 8. 개봉|82분|12세 관람가
감독 버트 스턴
출연 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셀로니어스 몽크, 척 베리,
아니타 오데이, 게리 멀리건, 소니 스팃, 지미 주프리, 조시 쉬어링,
다이나 워싱턴, 빅 메이벨, 치코 해밀턴 외
수입 및 배급 찬란
한여름밤의 재즈 척 베리 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셀로니어스 몽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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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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