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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고소, 손배 탄압 중단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지난 7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고소, 손배 탄압 중단 촉구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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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조선해양 경영진이 파업을 한 하청노동자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걸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든 근거는 다음과 같은 논리 구조를 띤다. 하청노동자들이 원청 작업장(도크)을 점거한 탓에 조업이 중단됐고, 그로 인해 막대한 손실이 발생했다. 그 손실을 계산해보니 처음에는 8000억 원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470억 원이다. 어쨌든 그 액수를 메우지 못하면 재산상 손해를 입을 주주들이 우리(경영진)에게 죄(배임)를 물을 것이다. 그러니 조업 중단의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손실을 보전받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이는 파업의 책임이 전적으로 파업을 한 노동자에게 있음을 시사한다. 최근에는 하이트진로 측이 파업 중인 화물노동자들에게 55억 원 상당의 손해배상소송을 걸었다.

파업을 무조건 불법으로 간주하려는 모습은 도리어 살펴보면, 우리 사회가 아직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이르는 상황을 경영자의 경영실패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파업을 경영의 '실패요소'가 아니라 '방해요소'쯤으로 여기는 사회적 인식과 무관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이 법을 다 지킨 채로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고, 또 그걸 보장받는 데에 한계가 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노동자들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하는 사측과의 교섭에서 합리적인 수준의 노동조건 개선안을 요구해도, 경영진이 받아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교섭에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면, 정부기관(노동위원회)의 조정을 받아야 한다. 그 절차에 따라 정부기관이 조정안을 제시해도 사측은 역시나 무조건 받아들일 의무가 없다.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사측이 그마저도 거부하면, 그때 노동자들은 쟁의권이란 헌법적 권리를 합법적으로 부여받게 된다.

대화를 포함한 어떤 방식으로도 경영진의 노동착취적 경영방식을 바꿀 수 없다면, 노동자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쟁의행위뿐이다. 그중 조업을 아예 멈추는 일이 있다. 이는 일터의 근로조건을 개선해주지 않으면, 기업의 최고 목표인 이윤창출도 없다는 걸 몸소 증명해주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쟁의방법이다. 사실상 치킨게임을 연상케 하는데, 노동자들이나 노조 입장에서는 더 이상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킬 방법이 없다고 판단할 때 벌이는 최후의 선택지다.

노동자들에겐 최후의 수단, 하지만 

조업을 중단하는 파업은 이런 구조적 절차들을 거친 결과로 나타나는 귀결점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대개는 맥락 없이 툭 튀어나온 급변의 상태 정도로 해석한다. 이러한 인식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시각적 요소가 한몫을 한다.

눈앞에서 바로 벌어지는 행위라고 해도, 그 상황을 촉발한 계기들은 이미 지나간 장면들에 불과하다. '현재의 행위'가 일어난 배경에 대해 파악하기 위해서는 결국 '과거의 상황'을 추적해야 한다. 단지 이 이유 하나로 우리는 현재의 행위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힘들여 찾지 않아도 '당장' 잘 보이니 말이다. 특히나 이 돌출된 듯 보이는 이미지가, 우리가 관성적으로 떠올리기 쉬운 상황과 정반대의 모습으로 연출된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처럼 비칠 소지가 다분하다.

파업은 불법의 요소도 감지된다. 합법적으로 쟁의권을 얻었다고 해도, 그 행위 자체까지 모두 합법으로 인정되지 않는 현행법상의 문제 때문이다.

예컨대 하청노동자가 원청 사업장에서 점거를 시도한다면, 제3자의 침입으로 간주돼서 주거침입죄 등과 같은 형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본사 건물의 사무실이나 로비를 점거하기 위해 진입하려다가 몸싸움이 벌어진다면, 폭행죄로 고소당할 수 있다. 파업 중에 조업을 중단시키면 형법상 업무방해로 기소될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형법의 위반 사례가 발생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법을 어기거나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일에 대해 그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각이 기본적인 사고방식으로 각인돼 있다. 어떤 불법적, 폭력적 행위도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업은 결국 부당한 행위처럼 인식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 있다.

다수의 여론이 파업에 거부감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그 행위가 일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에 기인한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물질적인 지원만 요구하고 일은 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불경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홈리스나 기초생활수급자 등이 일할 수 있으면서도 국가의 지원만 요구하는 모습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겠다.

그 이유는 그 대척점에 있는 '노동(일)'에 대해서 무조건적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이다.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모든 '비노동'은 불경할 수밖에 없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이 이미지를 투영한다면, '신성한 노동현장'을 멈췄기에 이유를 불문하고 '불경한 행위'로 비치기 마련이다.

여태껏 파업이 돌출적인 사고이고, 불법적인 수단이며, 불경한 행위로 인식되는 건 그 행위가 벌어지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 결과다. 실은 파업이 오랜 기간 합법적인 과정을 거친 결과물이고, 수많은 교섭단계에서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아도 끝끝내 거부당하는 위계적 폭력의 정당방어이며, 노동착취가 만연한 일터에서 인간성이 말살당하는 상황을 멈추기 위한 결단이라면?

믿기지 않겠지만, 이게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전혀 새로울 것도 없다. 내가 다시 규정한 파업에 대한 정의는 이미 파업의 기원과도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의 눈에 잘 보이지 않아서, 또는 우리가 관심조차 갖지 않아서 몰랐을 뿐이다.

노동자는 이미 교섭단계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폭력'에 시달린다. 경영진이 교섭에 임해도 소극적이거나 아예 무대응의 자세만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사가 마주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무리 많이 마련돼도,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기만 하는 것이다. 합의안을 도출하려고 만나는 교섭의 애초 목적은 그렇게 상실된다. 이 교섭과정이 원·하청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사안은 더 복잡해진다.

그 이유는 그동안 관성처럼 추구해오던 경영방식을 고수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다. 그 경영방식의 대다수는 '모든 노동은 신성하다'라는 가치와는 전혀 상반된 근로환경을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최)저임금을 주고, 산재 위험도가 높은 작업장에서 장시간 일을 시키는 것이 단적인 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실상 '불경스러운 작업장'처럼 느껴지는 곳이다.

사용자는 결국 이윤추구라는 목적을 최대한 달성하기 위해 교섭에서 버티는 것이다. 어차피 교섭 때는 노동자가 함부로 작업장을 멈출 수도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노동자들이 아무리 여러 차례 수정안을 건넨다고 해도 절대 합의에 도달할 수 없지 않을까?

문제는 이 과정이 합법의 영역 안에 있다는 점이다. 물론 "신의에 따라 성실히 교섭"('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0조 제1항)하지 않고, "정당한 이유없이 교섭 또는 단체협약의 체결을 거부하거나 해태"(동법 제30조 제2항)하면 불법이 된다.

하지만 교섭'태도'는 건물에 침입하는 '행위'처럼 눈으로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요소가 딱히 없다. 오히려 해석을 요한다. 얼마나 성실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가? 예를 들면 상대의 요구안을 거부하고 기존의 상태를 고수하려는 모습은 성실한 교섭태도인가, 아닌가? 입장에 따라, 답이 갈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일까? 파업을 한 노동자에게 적용되는 형법상의 처벌 사례에 비해, '불성실한' 듯 보이는 교섭태도로 일관하는 경영진에게 죄를 묻는 사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노동자는 이러한 불리한 조건 속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한다. 경영자 입장에서 보면, 버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교섭방식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론이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파업을 오히려 사용자가 부추기는 꼴이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노사의 관계가 과연 대등하다고 느껴지는가?

'노란봉투법'이 제정된다면

제도라는 것은 사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쁜 규제'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회 구성원의 인식을 바꾸는 역할을 선도하기도 하기 때문에 필요하다. 기존의 시민법(형법, 민법 등)만으로 사회적 약자를 절대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한 사회법(노동법, 경제법, 사회보장법 등)이 탄생한 것도 이 연장선상에 있다.

그 배경을 떠올린다면, 현재 사용자에게 유리하게 짜인 현행법 체계 속에서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대등하게 재정립할 수 있는 형태의 제도가 요구된다. 이 역시 새로울 건 없다. 이미 2014년부터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조 개정안)이다.

물론 이 제도의 기본취지는 '헌법'상의 권리인 노동 3권이 그보다 하위법('민법')인 손해배상청구권의 남용으로 위축되는 상황을 막자는 것을 골자로 한다. 교섭보다 파업 이후의 상황을 더 염두에 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법이 그 취지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제도가 시행된다면, 사용자의 경영목록에는 국내외 정세나 소비자 니즈 파악 등과 같이 노동자의 근로환경 역시 경영상 고려해야 할 요소로 필히 포함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제도의 취지대로라면 파업으로 손실이 발생해도 경영진은 그 행위를 벌인 노동자들에게 함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되므로, 노조의 파업 상황에 대해 그저 방관으로만 일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노동환경 개선을 이유로 파업을 시도하기 전에 해결책을 모색하려 하지 않을까? 파업기간이 길어질수록 손해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때의 손실은 모두 경영진이 떠안아야 하는 부채가 된다. 이 부채를 해결하지 못한 경영진은 주주들에게 배임 혐의로 고소당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파업이 곧 경영실패의 요인으로 비화될 수 있는 것이다. 경영진 입장에서는 사법처리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의 근로환경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셈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노란봉투법'이 시행된다면, 노동자들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하며 파업을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 쟁의권은 정부기관의 조정을 거쳐야 확보할 수 있다.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는 조정 과정에서 걸러질 것이다.

지금의 국민건강보험 제도가 그렇듯, '노란봉투법'과 같은 제도가 시행된다면 파업의 손실을 경영진이 책임져야 한다는 논리가 '당연하게' 여겨질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 결과로 파업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 노동자들의 파업은 노동착취적 경영방식을 고수하려는 경영진의 잘못된 경영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인식 정도로 말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가정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건 제도의 제정 없이는 파업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킬 방법이 현재로선 마땅히 없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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