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6 14:07최종 업데이트 22.09.0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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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꿈꾸던 집 ⓒ 조효은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걸 즐겨하던 나는 틈만 나면 어떤 집에 살고 싶은지 하얀 도화지 위에 그려 놓고는 했다. 하얀 벽돌에 붉은색 지붕이 있는 이층집과 현관 앞에는 꽃나무가 심겨 있고, 푸른 잔디에 어머니와 아버지, 언니, 그리고 나, 강아지가 서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람들에게 집은 이런 공간이다. 집은 '가족이 함께하는 공간'이자 '가족의 안식처'다. 지난해 출간한 <엄마 말대로 그때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를 쓰기 위해 2020년 한 해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났다. 흥미로운 건 사람들에게 집은 여전히 '사는 곳'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는 것'으로서의 집, 즉 집이 지닌 '자산적 가치'라는 점이다. 


1990년대 말 국가부도의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 경제발전이 최우선이었던 우리나라에서 주거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이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경제가 발전하게 되면,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고 국민 각자는 자연스럽게 주택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것이 정부의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주된 관심사는 주택건설 확대를 통한 주택보급률의 증대에 있었다.

정부는 '1가구 1주택' 같은 자가 보유를 지속적으로 권장하는 주택정책을 추진했지만, 이를 위한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는 일에는 무심했다. 물론 취약계층의 주거복지 향상을 위한 임대주택 공급 프로그램이나 전세자금 지원 등과 같은 주택 관련 지원금 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수혜 계층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2000년대 초반, 주택 관련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나는 주택과 관련한 문제가 궁극적으로 부족한 주택의 양적 공급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삶과 관련한 여러 복잡한 요소가 응집된 주택의 문제를 '수요와 공급'이라는 다분히 일차원적인 시장 논리로 치부해버렸다.

'주택보급률'(주택 수를 가구 수로 나눈 것)이라는, 다소 자위적인 통계적 숫자가 제발 상승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나 또한 주택보급률이 100%에 도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었다. 

2018년 현재 주택보급률은 104.2%이다. 그동안 우리를 지배해왔던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 논리에 따르면, 모든 국민은 주거의 불안정에서 벗어나 안락한 주거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 부동산 문제는 더 이상 논란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러나 전 세계를 위협한 코로나19보다 더 크게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건 여전히 '부동산'이다.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었는데도 주택가격이 안정되기는커녕, 고공행진은 지속되었다. 미친 듯이 오르는 주택가격을 잡기 위해 역대 정부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주택가격은 1990년대 초반 주택 200만 호 건설, 1997/98년 국가부도 사태, 그리고 2008년 세계경제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큰 폭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최근 은행 금리 인상의 여파로 주택가격이 주춤하고 있으나, 7월 현재 그 하락폭은 겨우 -0.1%에 불과하다. 2021년 작년 한 해 동안 전국의 주택매매가격 상승률은 9.9%(수도권 12.8%)로 최근 10년간 가장 높은 수치를 보였다.
 

전국주택가격동향조사 월별 주택매매 가격 증감률 ⓒ 한국부동산원


집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가치

영국에서 주택과 관련한 각 나라의 다양한 정책을 공부하면서 모든 정부가 우리나라처럼 '자가보유율'을 높이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가보유율에 대한 지나친 집착보다 중요한 건 모든 국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적절한 '주거환경'과 '주거안전'을 보장하는 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선진국은 주거 문제를 교육이나 의료 서비스처럼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하고 공공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했다.

오랜 외국 생활 동안 어느 누구도 우리 사회처럼 집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걸 보지 못했다. 주택청약통장에 생활비를 쏟아붓고 로또복권 같은 아파트 분양 당첨에 목을 매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내 집 마련'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일도 없었다. 주택을 소유하지 못해도 불편하기는 하지만 살아가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개인의 형편에 맞추어 공공임대주택(지방정부에서 소유하고 관리하는 임대주택)이나 사회임대주택(주택조합 같은 제3의 기관에서 소유하고 관리하는 임대주택), 민간임대주택에 살면 되는 거다. 공공임대주택이나 사회임대주택은 개인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을 수 있고, 민간임대주택도 임대료 폭등으로 쫓겨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선진국의 복지 시스템에 대해 '복지 의존적인 문화를 만든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라는 등의 말도 많지만, 어쨌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안전망이 잘 갖추어져 있다. 집이 없어 당하는 설움이 억울하면 어떻게 해서든 스스로 알아서 내 집을 마련해야 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다르다.
  
우리나라 임차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이 고작 3년 정도인 데 반해, 한번 주택을 마련하면 웬만해서는 이사를 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이 지닌 자산적 가치보다 '나와 가족이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라는 집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가치에 더 무게를 두기 때문이다.

집에 대한 애착이 대단해서 심지어 대를 이어 같은 집에 거주하는 경우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친구 부모님이나 지도 교수님 댁을 방문할 때면, 늘 집안 이곳저곳을 가꾸고 계셨다. 주말이면 새로운 꽃이나 나무를 사다가 정원에 심거나 페인트를 사서 새로운 컬러로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 바빴다. 저마다 자신의 스타일대로 조금씩 천천히 필요에 따라 고친, 손때 묻은 집이었다.

모델하우스에서 본 듯한, 다들 비슷한 모습의 우리네 집들과 너무나 달랐다. 자신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집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는데, 신이 나서 대로변에 '재건축 사업 승인 축하 현수막'을 붙여대는 우리와 사뭇 다른 모습이다.

반지하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집중해야
 

지난 8월 12일 지옥고(반지하,옥탑방,고시원) 폐지 및 공공임대주택 300만호 요구연대, 집걱정없는세상연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울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참사 현장 부근에서 침수된 반지하에서 사망한 3명을 추모하는 회견을 열었다. 한 참가자가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헌화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집에 대한 애착이 자가 소유인 경우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박사논문을 쓰기 위해 영국 버밍엄시의 공공임대주택과 사회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를 했었다. 대부분 자신들이 거주하는 공간을 자신의 집으로 여겨 소중하게 아끼고 있었다. 30년 가까이 공공임대주택에 거주하면서 당시 주민대표를 맡고 있었던 분은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곳은 제집이에요. 제가 소유를 했건 안 했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저는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살아왔고 이곳을 사랑해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주택이 상품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주택의 상품화는 시장에서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계층에 한정된다. 주택시장에 참여가 어려운 취약계층에게 주택은 탈상품화되어야 한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 이미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지불가능한 주거'를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로서 인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말 국가부도 위기를 겪고 난 이후에서야 비로소 공공임대주택의 양적 확대와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비 지원 방안 등이 마련되었다. 그 이전까지 주거의 문제는 국민 모두가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로서가 아니라 각 개인의 노력과 경제적인 능력에 따른 '선택'으로서 인식되었다.

1989년 공공임대주택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후부터 2020년까지 공급된 공공임대주택의 분량은 약 360만 호에 달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영구 공공임대주택(20~30년 임대)은 전체 분량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공공임대주택의 절반 이상이 임대 후 분양전환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80년 만의 엄청난 폭우로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다.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 사건은 반지하 주택에서 탈출하지 못한 취약계층의 죽음이었다. 주거취약계층 문제가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반지하 주택을 모두 없애겠다"는 서울시장의 성급한 발표는 여론을 더 들끓게 했다.

먼저 주거취약계층이 반지하 주택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원인에 집중해야 한다. 삶의 기회를 찾아 도시에 거주할 수밖에 없는 취약계층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주거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지상에서 지하로 이주할 수밖에 없다.

어느 누구도 햇빛도 들지 않아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비만 오면 탈출해야 하는 반지하 주택에 사는 걸 '선택'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선택의 기회가 있다면 말이다.


엄마 말대로 그때 아파트를 샀어야 했다 - 고용 없는 경제성장시대에 '집'이란 무엇인가?

경신원 (지은이), 사무사책방(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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