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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에 대한 이해 부족에 한바탕 소극이 빚어지는 일이 잦다. 그러나 그걸 문해력의 문제로 확대하는 건 다른 문제가 아닐까.
 낱말에 대한 이해 부족에 한바탕 소극이 빚어지는 일이 잦다. 그러나 그걸 문해력의 문제로 확대하는 건 다른 문제가 아닐까.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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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카페에서 올린 공지문에 나오는 '심심한 사과'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이 '문해력'에 관한 새롭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뜻으로 쓴 '심심(甚深)하다'가 "하는 일이 없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라는 뜻의 고유어 '심심하다'로 읽히면서 세대 간 소통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무운(武運)'에 이어진 '심심(甚深)하다' 소동

지난해에는 '무운을 빈다'에서 '무운(武運)'이 "전쟁 따위에서 이기고 지는 운수"라는 뜻인 줄 모르고 "운이 없다"라는 '무운(無運)'으로 전달한 기자의 방송사고도 있었으니 더는 보탤 게 없을 지경이다. 비슷한 사례가 나타날 때마다 '문해력'이 소환되지만, 정작 그게 '문해력'의 범주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는 망설여지는 대목이 많다.

'금일(今日)'을 '금요일'로 '사흘'을 '4일'로 안다거나, '꽃샘추위'를 '곱셈추위'로, '(미모가) 일취월장' 대신 '일치얼짱'이라 쓴다는 요절복통 사례를 무심히 웃어넘길 수 없다. 퇴직 전 여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면서 나는 아이들이 '삼라만상'이나 '양공주' 같은 어휘조차 모르고 있음에 충격을 받았었다. 

아이들은 시험을 치면서도 감독 교사에게 단어의 뜻을 묻는 일이 부지기수다. 국어 시간만이 아니고, 영어 시간도, 가정 시간도 아이들은 지문에 나온 어휘가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영문해석을 하다 보면 단어의 뜻도 설명해 주어야 한다면서 영어 교사는 자신이 국어 교산지 영어 교산지가 헛갈렸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는 문해력을 "일상적인 활동이나 가정, 일터 및 지역사회에서 문서화 된 정보를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광복 직후 78%에 이르렀던 12세 이상 인구의 문맹률은 2021년 현재 18세 이상 인구의 비문해율(1989년부터 쓴 '문맹률'의 대체 개념) 4.5%(교육부 통계)로 떨어졌으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있다. 
 
OECD의 독해력 시험 결과 우리나라의 젊은 층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55~65세 사이의 독해력은 최하위였다.
 OECD의 독해력 시험 결과 우리나라의 젊은 층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55~65세 사이의 독해력은 최하위였다.
ⓒ KBS뉴스 화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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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이가 많아질수록 중장년 특히 노년층의 문해력은 세계 최하위 수준으로 떨어진다고 한다. 교육부의 제3차 성인 문해 능력 조사 결과(2021.9.6.)에서 '일상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문해력을 갖춘 수준(중학 학력 이상 수준)' 이하는 50대는 17.2%지만, 60대는 35.6%, 70대는 58.9%, 80대 이상은 77.1%로 가파르게 오른다. 이는 OECD에서 회원국 노동 인력의 질을 평가하기 위해 실시한 문장 독해력 조사(OECD skills outlook 2013)에서도 드러났다. 

24세까지 젊은 층의 경우 문장 독해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55세에서 65세 사이의 독해 능력은 20위로 최하위권이었다. 65세 이상의 문해력은 더 말할 필요도 없으니 이는 선진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그런데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젊은 층의 문해력이 어떻게 '심심하다' 소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말이다. 

OECD에서 확인한 문해력이 사실과 다르지 않은 이상, 이 낱말 뜻으로 빚어진 '부분'의 소동을 문해력 '전체' 문제로 보는 것은 다소 무리일 수도 있겠다. 정중해도 시원찮을 사과문에 쓴 '심심하다'가 지루하다는 뜻이 아닐 것이라고 보는 건 그 담화의 맥락을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런 소동이 빚어진 것을 '맥락을 못 읽은 탓'이라고 본다면 이는 문해력의 문제로 여길 수는 있겠다.

'언문일치' 시대의 문어(文語)들

그런데 '심심(甚深)하다'는 사실상 구어에서는 쓰임새가 떨어진 문어다. 오랫동안 한자를 빌려 써 입말[구어(口語)]을 그대로 글말[문어(文語)]로 기록하지 못했던 시대를 끝내고 언문일치 시대가 시작된 게 1920년대다. 유명한 '기미독립선언서'를 배운 이들은 한자어투성이에다 토씨만 붙인 한글로 붙인 문어체가 얼마나 불편했는지는 절감했을 것이다. 

'글로 쓰는 문장이 입으로 말하는 언어와 일치되는 현상'이 언문일치다. 우리 말글의 언문일치는 교과서의 한글 전용과 1980년대의 일간지의 한글화를 통해 한글이 주류 통용 문자의 지위를 얻게 되면서 비로소 그 형식과 내용을 제대로 갖추어 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입말과 글말이 특별히 다르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언문일치 시대가 되었으나 여전히 '문어'는 남아 있다. 문어는 언중의 선택에 따라 살아남거나 소멸의 길을 가게 된다.
 언문일치 시대가 되었으나 여전히 "문어"는 남아 있다. 문어는 언중의 선택에 따라 살아남거나 소멸의 길을 가게 된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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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상생활 속에 문어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설을 쇰'을 뜻하는 '과세(過歲)', 고리타분한 공문서에 흔히 쓰이던 '상기(上記)', '타(他)', '살피어 앎'을 가리키는 '양지(諒知)하다', '해량(海諒)·혜량(惠諒)' 같은 말이 그것이다. 이런 말들은 실제 말보다는 글에서 주로 쓰이는 어휘로, '심심하다'도 마찬가지다.(그림 참조) 

문어는 옛날 편지 등에서 '상투적 문구'로 형식화되어 쓰였다. '부모님 전 상서'야 띄어쓰기를 무시하고 '전상서'(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로 더러 쓰이지만, 나머지 문구는 이미 소멸의 길로 접어들었다. 언중(言衆:같은 언어를 쓰는 사회 속의 대중)이 아무도 쓰지 않게 되면 그 말은 소멸하는 것이다.(그림 참조)
 
한때 편지에서 쓰였던 상투적 문어. 지금은 '전 상서' 정도만 남고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한때 편지에서 쓰였던 상투적 문어. 지금은 "전 상서" 정도만 남고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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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경험의 태부족이 빚은 어휘력 소동

젊은이들은 이제 구세대와 달리 그런 문어로부터 자유로운 세대다. 그들에게는 문어보다 요즘 유행하는 줄임말이 훨씬 가깝다. 자신들의 일상에서 이미 죽어가고 있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문해력'을 나무라는 건 성급하거나 지나치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젊은이들이 낱말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디지털 접속을 꼽는다. 이들은 디지털 매체를 이용하면서 '듬성듬성 건너뛰며 읽기나 빠른 겉핥기식 읽기'에 익숙해지면서 문해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분석이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읽기 경험'의 태부족이다. 따라서 한자어 '심심하다'를 이해하지 못해서 빚어진 소극은 당사자들의 어휘력 부족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젊은이들은 말뜻을 잘못 새길 뿐 아니라 맞춤법에 어긋난 표현도 곧잘 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한자를 몰라서 생긴 일이라고 하면서 한자를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를 한자 교육의 부족으로 보는 것은 단견이다.

'심심(甚深)하다'의 뜻을 아는 것은 여기 쓰인 한자 '심할 심(甚), 깊을 심(深)' 자를 반드시 알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한자어 가운데 한자의 훈을 알아서 그 뜻을 아는 어휘는 그리 많지 않다. 사람들이 '고동색'을 아는 것은 그 글자가 '고동(古銅:헌 구리쇠, 오래된 동전)'임을 알아서가 아니다. 우리는 한자 없이 뜻을 먼저 익히고, 한자를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고유어처럼 여기지만, 기실은 한자어로 된 말을 우리는 적지 않게 쓴다. 아래 낱말들은 모두 한자어다. 한 번도 한자어이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낱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낱말들을 일상에서 쓸모 있게 잘 쓴다. 이는 반드시 한자를 알아야만 그 뜻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라는 방증이다.
 
한자라는 의식 없이 마치 고유어처럼 사용하는 한자어들. 한자를 알아야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증해 주는 사례다.
 한자라는 의식 없이 마치 고유어처럼 사용하는 한자어들. 한자를 알아야 뜻을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반증해 주는 사례다.
ⓒ 장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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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독서)'로 익힌 어휘, 세계를 바르게 표현하는 강력한 도구

특정 단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맞춤법에 어긋나게 쓰는 일이 잦은 것은 그걸 '읽어 본' 적이 없어서다. 그런데 읽기는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낯선 낱말의 뜻도 유추할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그런 읽기의 경험을 통해 숱한 단어를 따로 배우지 않고 나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새 낱말을 만날 때마다 굳이 국어사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그 뜻을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언어 능력 덕분이다.

그러므로 '읽기'는 '쓰기'와 이어지면서 귀로 들어 다소 불분명한 낱말과 의미를 분명하게 확정하는 과정이다. 눈으로 보고 낱말을 익히고 쓰게 되면 '일치얼짱'이나 '곱셈추위'라고 쓰진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는 '독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독서는 낯선 어휘를 자기표현의 도구로 받아들일 기회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대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깊이 읽기'는 비판적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성찰할 수 있게 해 준다. '독서'로 받아들인 더 많은 어휘는 세계를 더 정교하고 깊게 묘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다. 

처서 지나며 더위가 성큼 물러났다. 고리타분하게 '등화가친'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녀들에게 독서를 권하기 전에 먼저 내가 책을 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개인 블로그 ‘이 풍진 세상에’(https://qq9447.tistory.com/)에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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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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