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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자괴감이 들었다. 나의 밥벌이란 왜 이 모양이란 말인가.

퇴근 후 소시지 야채볶음과 두부조림을 만들던 때였다. 먼저 퇴근한 아내는 이미 밥을 다 먹은 상황. 이번 주는 같이 일하는 식당 직원이 집에 일이 있어 못 나오는 바람에 쉬는 날 없이 연장근무를 했다. 그런 탓에 우리 부부는 단 둘이 식탁에 앉아서 밥 한 끼 같이 먹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퇴근 후 만들어 놓은 반찬을 냉장고에 넣어 놓고 다음 날 꺼내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뿐. 몸이 고단해서 그런가 괜히 짜증이 났다.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좀 더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어도 그럴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너무 피곤해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밀키트로 대체한 날도 많았다. 요란하게 갈비찜 같은 걸 차려주고 싶다는 얘기가 아니다.

20분 만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건강하고 간단한 요리들이 세상에는 많다. 오징어를 넣은 펜네 파스타를 해 줄 수도 있고, 닭가슴살과 샐러리를 굴소스에 볶아 내놓을 수도 있다. 우중충한 날에는 배추전이나 김치 부침개를 부쳐줄 수도 있을 것이다.

저녁 한 끼 같이 먹기 힘든 현실
 
저녁마다 막 만든 요리를 나눠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일상은 현실의 결혼 생활에선 꽤나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저녁마다 막 만든 요리를 나눠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일상은 현실의 결혼 생활에선 꽤나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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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마다 막 만든 요리를 나눠 먹으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는 일상은 현실의 결혼 생활에선 꽤나 호사스러운 것이었다. 밤 열 시 넘어 집에 와 옷을 갈아입고 간단한 밑반찬 한 두 개 만든 뒤 미처 못 한 개인 정비를 하고 나면 이미 자정이 훌쩍 넘어가 있었으니까.(아내는 퇴근 후 나머지 가사를 분담한다.)

같이 저녁 식사 한 번 하기 힘든 일상을 이리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이유는 뭘까. 다 알고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회의감이 덜한 것은 아니었다. 가끔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면 주변의 기혼자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였다. 개중에는 전적으로 밀키트와 배달 음식에 의존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 역시 신혼 밥상에 대한 로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격무로 인해 일찍 그 희망을 접은 듯했다. 

사실 그 친구들과 우리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가족 계획이 없다는 사실. 두 집 모두 둘이서 같이 저녁에 밥 한 끼 먹기도 벅찬데 가족을 꾸린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아이나 부모나 서로 고단하고 피곤할 뿐. 
 
학창시절 내내 가족들이 전부 모여서 밥을 먹는 날은 손에 꼽았다.
 학창시절 내내 가족들이 전부 모여서 밥을 먹는 날은 손에 꼽았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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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어른이 되는 내내, 장사를 하는 부모님은 아침에 나가 자정이 다 돼서야 들어왔다. 실패한 예전 장사로 쌓인 빚을 갚고 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모님은 돈벌이와 가족과의 시간을 통째로 맞바꿔야만 했다. 나에게 엄마의 집밥이란 냉장고 한편에 쌓아 둔 반찬통 안에서만 존재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여 엄마의 집밥을 재구성했다. 밥은 동생과 같이 먹을 때도, 각자 방에서 먹을 때도, 아예 혼자서 먹을 때도 있었다. 다 같이 수저를 드는 날은 손에 꼽았다. 

공휴일에 가족들끼리 먹을 피자를 사러 온 손님들을 보면서 저 집안과 우리 집안의 삶의 차이는 과연 어디서 오는 걸까 혼자 생각하곤 했다. 그 일상이 딱히 힘들거나 우울하지는 않았다. 삶이란 으레 그런 것이구나 했으니까. 실제로 주변 친구들 모두 그랬으니까.

단지 같이 떠난 여행지에서의 추억과 외식의 즐거움과 함께 웃고 떠들던 일들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 그 무제한의 노동을 담보로 내가 자랐다는 부채의식을 체득하게 됐다는 것, 그 뿐이었다. 

변하지 않는 밥벌이의 현실

TV에서는 주기적으로, 그리고 기계적으로 저출산의 심각성을 논하곤 한다. 마치 거대한 재앙이 찾아옴을 예견하는 어투로 이제껏 수백 조 원을 썼는데도 출산율이 곤두박질치고 있고, 10년 뒤에는 부산시 규모에 해당하는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들 거라는 보도들.

실제 언론보도 내용을 보자. 지난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1년 출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출생아 수는 26만600명으로 1년 전보다 1만1천800명(-4.3%) 감소했으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은 0.81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 대비 0.03명(-3.4%) 감소한 수치다. 이 통계에 따르면, 역대 최저치로 OECD 38개 회원국 가운데 합계출산율이 1명에 못 미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해결책도 늘 똑같다. 국공립 어린이집을 늘리고 출산 수당을 증액하며, 경력단절 여성을 위한 맞춤형 일자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이야기.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생각하며 채널을 돌린다. 

탄력근무란 미명 하에 100일 간 일일 14시간의 노동을 견뎠던 지인과 365일 쉬지 못하고 가게에 매여 있는 부모 옆에서 숙제를 하고 테이블을 치우는 단골 쌀국숫집의 아이들, 둘이 요리할 시간조차 지치고 고단해 매 끼니를 밀키트와 배달음식으로 해결하는 친구 부부의 삶은 전혀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근로감독관의 행정력은 여전히 노동현장 구석구석 미치지 못하고, 선거철마다 주 4일 근무가 공약으로 나오지만 그 누구도 모두가 평등하게 쉴 권리를 얘기하진 않는다. 

퇴근 무렵 TV뉴스에서 본 "국가가 국민의 일할 자유를 제약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은 그런 의미에서 큰 실망이었다. 무제한으로 일할 자유로 생겨날 일상의 부자유는 생각해 봤을까? 하루의 대부분이 노동에 잠식된 삶에서 우리는 나머지 일상을 통해 무엇을 누릴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을 새로 태어날 아이들에게 권할 수 있을까?

후세에게 자신 있게 삶을 권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그 아이들이 이 나라에 태어날 이유는 뭘까? 국내 기업의 핸드폰을 사주고 군대에 가주고 고갈돼 가는 국민연금을 충당해줘야만 해서?

휴식없는 삶 바뀌지 않으면 

길게 적었지만 결국 출산율은 일상의 반영이다. 출산율의 기본 동력은 두 사람의 사랑과 사적 행복, 그리고 그 행복을 자신의 후손에게 전해주고 싶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애국자도 오로지 공적인 동기만으로 출산을 결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10년 뒤에 사라질 수백만의 생산가능 인구와 끝내 멸종할지도 모를 한민족의 미래 따위를 이야기하지만, 그 지표 안에 담겨있는 고단함을 읽지 못한다면 이토록 거대한 당위들은 이제껏 쏟아부은 수백 조의 예산만큼이나 부질없을 뿐이다. 

국가가 무엇을 바라보며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나 지금이나 현실은 우리 코앞에 있었다. 우리가 늘 함께 하는 식사 상대. 내가 최근에 누렸던 휴식의 형태. 가족과 나눈 대화의 길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들. 

내가 아는 한 지난 30년 간 바뀌지 않은 건 출산율이 아니라 휴식없는 삶에 녹아버린 각자의 일상이다. 무제한으로 일할 자유만이 보장된 세상에서 지금보다 더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다면, 그게 과연 좋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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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군지 묻지마 뀨잉뀨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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