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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얼굴에서 얼핏 외할머니의 얼굴을 본다. 동그란 얼굴, 볼록한 볼과 초승달 같은 눈. 영락없이 외할머니다. 그 간극이 멀게 느껴져 신기하고 기이하다. 먼 시골에 살아 자주 볼 수 없었던 외할머니와는 살가운 관계가 아니었다. 그랬던 외할머니를 딸아이를 보며 떠올린다. 외할머니의 얼굴과 삶, 그 흔적을 더듬어본다.

그런데도 남편을 쏙 빼닮은 딸아이는 아빠 붕어빵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요즘은 엄마 닮았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는다. 아이의 얼굴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담겨 있는 걸까. 나와 남편, 나의 부모, 그리고 남편의 부모, 내 부모의 부모, 그들의 부모까지.
 
책 <평범한 인생>
 책 <평범한 인생>
ⓒ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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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렐 차페크의 소설 <평범한 인생> 속 문장처럼 "우리 각자는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인지 모른다."(222쪽) 개인의 삶은 단지 개인의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라고.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된 여러 존재들이 한 사람을 만들고 그의 생을 이끄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에 대한 믿음 간직한 작가

체코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작가인 카렐 차페크(1890~1938). '민족성을 드러내는 위트와 유머감각, 다채로운 서사적 본능, 쉽고 명확한 구어체로 풍요로운 체코어의 결을 포착한 문체'(김선형, 네이버 캐스트) 등 그의 문학을 수식하는 어구는 많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과 휴머니즘일 것이다.

파시즘의 공포가 세계를 혼란으로 몰고 가던 시기 개인과 국가를 너머 세계를 끌어안고자 했던 그는 문학을 통해 '부단히 이삭을 줍는 '사람'의 평범한 삶을 옹호'했다. <호르두발>(1933), <별똥별>(1934)과 더불어 철학 3부작이라 불리는 <평범한 인생>(1934)에는 그가 추구했던 상대주의와 휴머니즘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은 철도 공무원으로 성실하게 한평생을 살아온 이가 죽음을 앞두고 삶을 돌아보며 '평범한 이의 자서전'을 쓴다는 내용이다. 

소설 중반부까지는 주인공의 과거가 평이하게 그려진다. 병약하고 조용하여 책에 파묻혀 지낸 유년기, 학업에 열중했던 청소년기를 거쳐 대학에 진학. 잠시 시를 쓰며 방황했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철도 공무원에 자원한 일. 그렇게 시작된 공무원 생활이 평생의 업이 되고 자기 만의 역을 완성하면서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그. 단순하지만 행복한 삶이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그때 내면에서 이상한 목소리가 불쑥 솟아나 질문한다.
 
"온전한 진실이라고?"
(129쪽)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송순섭 역, 열린 책들

낯선 목소리가 등장하면서 '서로 싸우는' 두 목소리가 소설을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로 전개해 간다. 새로운 목소리는 주인공의 내면에 숨어 있던 다양한 자아를 들춰낸다. 성공을 바라 억척스럽게 매달렸던 그, 소심하고 우울했던 겁쟁이, 시를 쓰고 몽상을 즐겼던 낭만주의자, 성적 경험에 눈 뜬 이후 타락에 대한 환상에 시달렸던 파괴 주의자. 평이해 보였던 하나의 삶은 내면을 파고드는 질문으로 세 갈래, 다섯 갈래, 여덟 갈래로 갈라진다. 

이 목소리는 인간 내면이 지닌 여러 페르소나를 보여주면서 한 사람이란 객관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모습으로 정의될 수 없음을 알려준다. 그의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그에게 더 공감하게 된다. 그러면서 그가 지닌 욕망들이 '특별한' 인물이 지닌 이해 불가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라면 적든 크든 품고 있을 본성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마치 커다란 잔치 같군요. 인생이 이런 향연이라는 걸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을 테죠!"
(227쪽)

그는 새롭게 발견한 다양한 자아가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가족이라는 관계를 통해 씨앗처럼 심어지고 자라났음을 깨닫는다. 이러한 발견은 개인을 너머 모든 인간을 끌어안는 휴머니즘으로 확장된다. 우리 각자가 "세대에서 세대를 통해 불어나는 사람들의 총합"(222쪽)이며 "한 핏줄"이라고. "우리들 개개인은 우리를 이루며, 개개인은 무한대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집합"(237쪽)이 된다고.

'나'라는 가장 작은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우리'라는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연결되며, 가장 내밀하고 개인적인 영역이 인간 보편의 삶을 포괄하고 있음을 이 소설은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자아에 대한 이해 또한 깊어지고 이를 통해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239쪽)된다고 카렐 차페크는 말한다.

'평범한 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음

내면에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주인공의 자각은 자기 극복과 초월의 의지로 읽힌다. 자기 안에서 다양한 '우리'를 포용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카렐 차페크가 말하는 평범한 인생의 비밀은 이타적인 사랑과 연대에 있는 게 아닐까. 그것이 우리 삶을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는 진실된 삶에 다가가게 해 준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누구나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욕망과 성질을 품은 채 자신과 다투거나 화해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온전한 진실인가", 라는 질문은 우리 모두를 향한다. 소설 속 주인공이 지니고 있던 다면성 중 무엇 하나만을 '진실된 그'라고 꼽을 수 없듯, 우리 또한 '가장 나다운 나'라는 통일된 자아로 사는 건 불가능하니까. 빈칸을 채울 정답을 찾듯 자신을 보여줄 명쾌한 하나를 구하려는 것보다 나의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당신의 복잡성을 인정하는 것이 평온한 삶을 사는 지혜이지 않을까. 
 
"그것이 진정하고 평범한 인생이며, 가장 평범한 인생이다. 내 것이 아닌 우리의 삶, 우리 모두의 광대한 생명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면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평범하면서도 그것은 축복이다."
(240쪽)

이 책은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고 여겨지는 주인공의 삶이야말로 전혀 평범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 안에 축적된 사람들의 다채로운 개성들을 펼쳐 보여주면서 한 사람의 삶 속에 숨어 있는 '광대한 생명'의 만남을 축제처럼 그려낸다.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고 뒤섞이어 살아간다는 데서 "우리 모두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카렐 차페크는 말한다. 하지만 그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볼수록, 우리 안에 축적된 무한한 사람들을 헤아려볼수록, 나는 우리 모두가 참으로 고유하고 비범하다는 생각이 든다. '평범한'의 역설로 내 삶과 당신의 삶, 우리 모두의 삶이 제각각 귀하다는 걸 깨닫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평범한 인생 - 열린책들 세계문학 275

카렐 차페크 (지은이), 송순섭 (옮긴이), 열린책들(2021)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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