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4일, 러시아의 전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러-우전쟁이 어느덧 6개월을 훌쩍 넘겼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폭격에 이어 국제 협약상 금지된 무기인 백린탄까지 대량 사용하는가 하면, 부차지역에서는 러시아군에 의한 400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부차시민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집계된 우크라이나의 민간인 사망자만 무려 5237명을 넘겼으며, 지금도 전쟁의 피해는 날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시간을 돌려 약 30년 전 1992년, 유럽 발칸반도의 세르비아가 일으킨 보스니아 전쟁은, 역사적 갈등과 잔혹한 민간인 학살 등 많은 부분에서 지금의 러-우전쟁과 많이 닮아있다. 역사는 전쟁이 무고한 이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전한다.
 
8월 25일 방송된 JTBC <세계다크투어>에서는 '우크라이나 그리고 보스니아 전쟁'을 주제로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전문가 김지윤 박사가 투어 가이드로 나서서 두 전쟁의 역사적 교훈을 조명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러우전쟁이 시작된 이후 지난 4월 13일 연설에서 "당신의 가계 예산, 기름을 채울 수 있는 능력 등 그 어느 것도 독재자가 전쟁을 선포하고 지구 반바퀴 밖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데 달려 있어서는 안된다"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전범'으로, 러시아군의 전쟁범죄를 '제노사이드(집단학살)'로 규정하고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현대사에서 이러한 러-우전쟁과 유독 닮은 꼴이라고 평가받는 보스니아 전쟁(1992-1995년)은, 2차대전 이후의 20세기 후반 인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잔인한 전쟁으로 꼽힌다. 오래되고 복잡한 역사적 악연, 잔인한 민간인 학살, 지도자의 그릇된 선택이 낳은 비극 등이라는 점에서 두 사건의 성격과 진행방식은 매우 흡사하다.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는 1914년 1차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의 암살, 1984년 사회주의 국가 최초의 동계올림픽 개최 등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로 유서깊은 도시다. 하지만 1992년에 접어들며 사라예보는 세 개의 다른 종교와 민족, 이웃이 적으로 대립하는 비극의 땅이 됐다. 유고 연방에서 독립하려는 보스니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의 갈등은, 수많은 피를 부르는 잔혹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JTBC <세계다크투어>의 한 장면.

JTBC <세계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2차세계대전 이후 건국된 유고 연방은 초대 대통령 요시프 브로즈 티토 체제에서 서방국가와의 외교와 통합의 리더십으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970년대 석유파동 등으로 인한 국가경제의 침체, 1980년대 절대적 지도자 티토의 사망까지 유고 연방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혼란한 시기를 틈타 등장한 것이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였다. 1990년대에는 잔혹한 유고 내전을 주도한 '발칸의 학살자'로 불리운 전범이자, 2022년 현재는 러우전쟁을 일으킨 푸틴과 자주 비교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여러 민족의 통합을 강조한 티토와 달리, 밀로셰비치는 강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부흥 표방했다. 이에 반발한 유고연방 국가들은 1991년 6월 슬로베니아를 시작으로 크로아티아-북마케도니아-보스니아-몬테네그로 등이 하나둘씩 연방탈퇴와 독립을 선언했다.
 
문제는 보스니아였다. 다른 지역과 달리 보스니아는 자국 계열의 인구가 43.5%로 가장 많았지만, 세르비아계의 숫자도 무려 31.2%에 이르렀다.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인들은 독립시도에 반발하며 민병대를 결성하고 라도반 카라지치를 대통령으로 하는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설립한다.
 
당시 유고연방군의 70%는 세르비아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벙력과 물자를 빼내어 스르프스카를 배후에서 지원했다. 수도로 진군한 세르비아 민병대는 산으로 둘러싸인 사라예보의 지형을 이용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꼼짝없이 갇혀버린 시민들을 향하여 무차별 폭격을 자행했다. 도시는 삽시간에 시민들의 절규와 핏자국으로 가득한 생지옥으로 변했다. 전쟁이 일어난 44개월 동안 매일 평균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수도는 1425일이나 봉쇄되었다.
 
세르비아군이 사라예보 포위전을 시작하던 그날, 10만 명에 가까운 사라예보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평화시위를 벌였다.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에게 세르비아 민병대는 경악스럽게도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 맨앞에서 행진하던 보스니아 의회공무원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올가 수취치, 23세의 의과대학생이던 수아다 딜베로비치가 가장 먼저 총격에 맞아 쓰러졌다. 수아다는 "여기가... 사라예보입니까?"라는 안타까운 유언을 남기고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들은 이후 3년 10개월간 이어질 사라예보 포위전의 첫 희생자가 됐다. 훗날 시민들은 추모의 의미로 그녀들이 사망했던 다리의 이름을 '수아다와 올가'로 변경했다.

또한 이 다리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다리'라는 또다른 별명이 있었다. 세르비아계였던 보스코, 보스니아계였던 아드미라는 영화 속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원수인 두 민족이 대립하던 시기에 사랑에 빠졌다. 두 연인은 전쟁이 발발하자 사라예보를 탈출하려고 했으나 다리를 건너던 도중 저격수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아드미라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이미 즉사한 보스코의 곁으로 기어가 눈을 감았다고. 당시 두 사람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두 사람의 시신은 무려 8일간이나 현장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동안 이 사건을 취재한 미국인 종군기자 커트 숄크가 사라예보 연인의 비극적인 사연을 보도하며 전 세계에 소식을 알렸다. 결국 세르비아군은 한밤중에 몰래 시신을 수습했고, 몇 년 후 전쟁이 막을 내린 뒤에야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사라예보 라이온스 묘지에 안장될 수 있었다.
 
추악한 보스니아 전쟁이 충격을 안겨준 또다른 이유는, 인류가 긴 냉전을 끝내고 이제야 평화가 찾아왔다고 안도하던 순간 불시에 찾아온 전쟁인 데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혹한 행위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제네바 협약은 전혀 적용되지 않았고 고립된 시민들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다.
 
 JTBC <세계다크투어>의 한 장면.

JTBC <세계다크투어>의 한 장면. ⓒ JTBC

 
높은 건물에 숨어있던 저격수들이 무고한 민간인들을 사냥감처럼 노리고 저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밀로셰비치의 지시로 사라예보에서 저격수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구역은 '저격수의 거리'로 불렸다.
 
도시구조상 시민들은 민가구역에서 직장, 관공서, 은행, 병원 등 필수적인 경제활동구역으로 이동하려면 유일한 루트인 저격수의 거리를 지날 수밖에 없었다. 시민들은 자신과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저격수의 거리를 내달리거나, 도시에 들어왔던 유엔 평화유지군의 도움을 받아서야 간신히 이동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의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민간인들의 피해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마르칼레 시장을 수 차례 포격하여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세르비아가 노린 것은 바로 '비용'이었다. 크로아티아-보스니아와 동시에 각각 전쟁중이어서 인적-물적 부담이 컸던 세르비아는 봉쇄전을 통하여 무방비 상태의 만만한 시민들을 공격하면 자신들은 거의 피해를 받을 걱정이 없는 데다 상대의 공포감을 유도하여 항복을 유도할 수 있다는 효율성을 감안한 전략이었다.

오늘날 푸틴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수군사작전이라고 주장하며 자행한 비인간적인 민간인 학살은, 목적을 위하여 가장 빠르고 잔인한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30년 전 세르비아군의 행태와 흡사하다.
 
우크라이나가 그러하듯이, 당시의 보스니아와 사라예보 시민들도 굴복하지 않았다. 전쟁에 있어서는 결과만이 아니라 명분과 여론도 중요하다. 보스니아 정부는 외신 언론을 통하여 사라예보의 참상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세르비아는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악화되며 점점 외교적으로 고립되었고 국내에서도 싸늘해진 민심은 밀로셰비치 정권에 등을 돌렸다.
 
사라예보의 한 호텔은 전쟁 초기에 공격의 최전선에서 포격까지 당했으나 건물은 끝내 살아 남았다. 이후 호텔에는 외신 기자들이 상주하며 국제사회의 비난에 부담을 느낀 세르비아군은 더 이상 호텔을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다. 용감한 기자들은 이곳에서 목숨을 걸고 사라예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고, 공포에 떨던 시민들에게 유일한 소통창구가 되어줬다. 언론의 진정한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잔혹한 전쟁은 문화유산에도 손실을 불러왔다. 1896년 개관한 사라예보 국립도서관(현 사라예보 시청)은 전쟁 당시 포격을 받아 100년 이상 오래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고문서들이 대부분 소실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도서관은 2014년 장소를 옮겨 재건됐고, 사라예보 교향악단 수석첼리스트인 베드란 스마일로비치는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사라예보의 각 지역을 찾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연주를 진행하고 있다.

장기간의 봉쇄가 주민들에게 준 또다른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주민들은 물자 부족으로 식수, 전기, 식량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세르비아군이 포위한 사라예보에서 유일한 안전지대는 UN 점령지였던 사라예보 공항 건너편이었다.
 
사라예보 시민들은 전쟁 2년차인 1993년부터 민가로 이어지는 760미터 길이의 지하터널을 4개월 만에 만들어내며 각종 물자는 물론이고, 부상자 운송이나 보스니아 지원군까지 사람들의 이동통로도 활용됐다.
 
이 터널을 통하여 운송된 식량만 550만kg, 연료는 45만 리터에 이른다. 절망과 공포를 이겨내고 사라예보를 구원해낸 상징으로써 '희망의 터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지하터널로 연결된 민가의 주인이자 터널 공사에도 동참했던 코울러 가문의 후손 이디쓰 코울러는 "전쟁 당시 이 터널이 사라예보 뿐만이 아니라 보스니아 국가를 구했다"고 평가했다.
 
1995년 7월 세르비아 민병대는 보스니아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스레브레니차를 공략한다. UN은 주민보호를 위하여 안전구역을 설정했지만 세르비아는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한다. 자기방어를 제외하고 무력행사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던 UN 평화유지군은 무차별 공격을 저지르는 세르비아군을 제어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세르비아군이 평화유지군을 'UN 자기보호군(Self Profor)'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세르비아군은 UN와 나토군이 공습을 시도하려고 하자 포로로 잡고 있던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인들과 난민들을 인질로 내세워 학살하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결국 평화유지군은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던 보스니아인들을 내주고 포로들을 구출해와야했다. 또한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인들의 피난 버스를 세우고 비무장 민간인임에도 후환이 될 수 있는 남성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
 
평화유지군은 결국 임무수행에 한계를 느끼고 무력하게 스레브레니차 철수를 결정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민들은 살기 위하여 차량에 처절하게 매달리면서 필사의 탈주를 감행해야 했다. 평화유지군이 떠난 이후, 당시 스레브레니차에서는 민병대에 의하여 민간인을 학살하는 총성이 매일같이 울려퍼졌고 공식사망자만 8000명, 생존자들 주장은 2만~3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2차대전의 나치 독일 이후 최악의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이자 '인종청소'사건으로 꼽힌다.
 
훗날 생존자들은 '스레브레니차의 어머니'라는 유족 모임을 결성하고 당시 포로협상을 위하여 보스니아인들을 세르비아 민병대에 넘긴 네덜란드 평화유지군에 소송을 건다. 법원은 네덜란드군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네덜란드에서도 훗날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에 돌입했지만 2002년 네덜란드 의회는 당시 무장도 제대로 되어있지 못했던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 민병대를 막아내고 보스니아인들을 보호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허울만 그럴 듯하고 유명무실했던 평화유지군의 행보에 대한 자기반성의 계기로 이어졌다.
 
당시 스레브레니차에서 남편을 잃었던 생존자 파딜라 에펜디츠의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지금도 나토나 유엔, 그 누군가가 우리같은 죄없는 민간인들을 구할 거라고 믿지 않는다. 민간인이 죽어가고 있으니가 전쟁을 중단하는 게 아니라, 이익이 있을 때 전쟁을 중단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국제사회의 역할과 진정성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그동안 내전이라는 이유 때문에 적극적인 참여를 주저하던 UN와 나토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계기로 비로소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됐다. 미국은 1995년 테이턴 협정을 통하여 보스니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의 평화 협정을 중재했다. 사이가 그나마 나쁘지 않았던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계를 중심으로 스르프스카 공화국을 포함하여 '한국가 두체제 세민족'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형성된다.
 
전쟁범죄자들은 늦게나마 역사의 심판을 받았다. 스르프스카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는 종전 이후 해외로 도피했다가 몰래 세르비아에 정착했으나 2008년 결국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끝까지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던 밀로셰비치는 전범 재판 도중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인류가 겪은 수많은 전쟁중에서도 내전의 잔혹함은, 어제의 친근한 내 이웃이, 오늘은 언제든 내 가족을 해치는 가해자가되는 모습을 보게되는 순간이다. 건물과 땅위에 남은 전쟁의 흔적들은 다시 짓거나 덮을 수라도 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남긴 상처는 어떻게 언제쯤에나 아물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전쟁은 지금 이 순간도 지구 어디에서인가 계속되고 있으며 결코 우리에게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1992년의 보스니아, 2022년의 우크라이나를 관통하여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세계다크투어 유고내전 민간인학살 밀로셰비치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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