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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는데 한 할머니가 묻는다.

"아니, 집에서 놀면서 왜 애를 놀이방에 보내?"
"네? 아 네... 그러게요. 하하하."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집에서 노는 거 아닌데요'라고 따져 묻거나, '육아가 너무 힘들어서요'라고 읍소하거나 뭐라도 말이 나오면 좋겠는데, 허둥지둥 대다가 웃음으로 마무리하고 말았다.

아이를 양육하면서 집안일을 전문으로 하는 전업주부. '주부의 노동을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 얼마'라는 식의 뉴스가 끊임없이 나와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전업주부는 집에서 노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결혼 전까지 계속 일을 했던 나 역시 처음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노는 것만 같았다. 퇴근 없는 육아와 끝도 없는 집안일을 하는 삶을 살면서도 내 업(業)이 없다는 생각에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아이를 낳고 몇 년 동안은 나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압도당해 살았다. 겨우 숨을 쉬게 된 건 아이를 기관에 보내면서부터다. 조금 여유가 생기자 주변에서 슬슬 둘째 이야기를 꺼낸다.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말한다. 둘째는 없다고. 다시 나를 잃어버리는 짓은 못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둔 이유

잘 다니던 회사를 서른 중반에 그만뒀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스트레스로 건강이 너무 나빠졌기 때문이다. 등에서 자꾸 열이 나서 한의원에 갔더니 50대 이상 주부한테서나 볼 수 있는 화병 증상이라고 했다. 퇴근하는 내 모습을 지켜본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매일 시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 같았단다.

"엄마는 딸내미가 일기예보야."

힘들어하는 내 옆에서 더 힘들어 하는 엄마를 보는 게 죽을 맛이었다. 안 힘들다고 맹구 표정에 이런저런 몸개그를 섞어봐도 엄마의 흐림은 맑음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다 아니까. 그날로 사표를 냈다. 그리고 1년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났다.

회사를 그만 둘 당시에는 왜 회사를 그만두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확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이 가장 문제였지만 건강을 망가뜨린 스트레스의 원인은 복합적이었다. 그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된 건 여행을 하면서다.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싫었다. 더 정확하게는 '팔아야만' 굴러가는 시스템 속에서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일하는 것이 싫었다. 그것이 어린이책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이라서 더욱 힘들었다. 굳이 없어도 되는 책을 수명을 줄여가며 팔기 위해 만들어 내고 늘 마감에 쫓기는 삶. 나무에게도 미안했다.

나도 나지만 외주 기획자를 사지로 몰아넣는 일을 해야 하는 것도 괴로웠다. 일정이 촉박한 책들은 외주 기획사에 통으로 맡기고 내부에서 확인 작업을 하는 턴키(turn key)로 진행한다.

그러면 금요일 밤늦게까지 꾸역꾸역 작업물을 확인하고 외주 기획자에게 넘긴 뒤 "월요일 아침에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일이 반복된다. 가끔 외주 기획사에 방문하면 다들 며칠 밤을 새서 퀭한 눈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꼭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외주비는 10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없는데, 일정은 더 촉박하고 강도는 더 세졌다. 돌아보면 '나도 힘드니까, 마감을 맞춰야 하니까, 어쩔 수 없어'라고 체념하며 버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서른 중반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 퇴사 서른 중반 회사를 그만두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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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고 이한빛 PD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TvN 드라마 '혼술 남녀'의 신입 조연출로 일했던 그는 계약직 직원들을 해고하는 업무를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스스로도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던 사람. 그는 유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루에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두세 시간 재운 뒤 다시 현장으로 노동자를 불러내고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나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일을 외면할 정도로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모아놓은 돈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용기가 부족했다. 지금 회사를 그만 두면 다시 일을 할 수 있을까 불안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친구가 세상을 떠났다. 암이었다. 한동안 연락이 되지 않아 궁금했는데 급히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다. 친구의 마지막 생일을 눈물과 웃음으로 함께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깨달았다. 삶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짧을지도 모른다고.

그 무렵 나는 <로봇의 부상>, <특이점이 온다>와 같이 '노동의 종말'을 예고하는 책들에 빠져있었고, 그때만 해도 생소했던 기본소득을 받으며 살게 될 거란 희망도 있었다.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이유들이 하나둘씩 쌓이니 용기가 났다. 마침내 사표를 던질 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근데 선생님은 앞으로 뭘 하고 싶으세요?"

그림책 공부 모임이 끝나고 지난 번과는 다른 참여자가 또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한 번만 더 선생님이라고 하면 강의료를 받겠다고 했다. 이제 그런 농담을 던질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부모의 불안감을 끊임없이 자극해, 주머니를 털어 먹고사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책이든 교육이든 강의든 뭐든.

아이 선물을 항상 그림책으로 달라는 친구가 있다. 생일에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도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면 그림책 좀 골라서 보내달라고 한다.

"책 고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차라리 그냥 신발이나 옷이나 그런 거 사달라고 해."
"네가 그런데 나는 오죽하겠어."


앓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요즘 아이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물어보고 며칠 씩 고민해서 책을 보낸다. 그럴 때마다 항상 같은 반응이다.

"내가 도서관에 가면 진짜 이상한 책만 고르게 되던데, 넌 어떻게 이렇게 좋은 책만 골라?"

하루에도 너무 많은 어린이책이 쏟아져 나온다. 예전보다 더 많은 책을 만들면 좋은 책들도 더 많아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시스템에 의해 촉박하게 찍어내는 책들은 깊이를 담보할 수 없다. '책은 사람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다'던 선배들의 말은 진리다.
 
친구에게 선물한 그림책 중 하나
▲ <애너벨과 신기한 털실> 친구에게 선물한 그림책 중 하나
ⓒ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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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의 글쓰기>에서 저자는 글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글을 쓰는 이유는 나의 글로써 무엇인가를 움직이고 변화시키고 이루고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적어도 나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투명 인간으로 살기 싫어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저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작한 그림책 공부 모임이었다. 배부른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당장의 밥벌이 보단 육아로 잃어버린 나를 다시 찾고 싶었다.

친구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좋은 그림책을 소개하고, 부모들이 스스로 좋은 그림책을 고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일. 그 일을 하면 어떨까. 엄마들과 함께 그림책 공부 모임을 하면서 그 마음을 이어가고 싶다. 공부를 잘하게 하는 책 읽기가 아닌 부모도 아이도 행복한 책 읽기를 나누고 싶다.

물론 돈 벌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아니다. 여행을 준비하며 비행기와 호텔을 알아볼 때면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해진다. 늦은 밤까지 저렴한 땡처리 표와 가성비 숙소를 검색하고 있는데 카톡이 울린다. 그림책이 왜 좋은지 몰라 모임에 와 봤다는 참여자였다. 

"지혜님, 오늘 밤이 지나면 잊어버릴 거 같아서 늦은 밤 보냅니다. 늘 바쁘게 쫓겨 살다가 아이와 그림책을 천천히 보는데 뭔가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같이 보면서 둘 다 괴물 이야기에 푹 빠지는 경험을 했답니다. 지혜님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신 것 같아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어요. 시민모임 참 좋네요."

진심이 담긴 장문의 카톡이었다. 

예전에는 그랬다. 그림책 읽기 노하우나 숨겨진 좋은 그림책 같이 사람들이 잘 모를 법한 정보는 왠지 나누기 싫었다. 힘들게 얻어낸 무언가를 말 몇 마디로 가져가려는 사람들이 얄미웠다. 하지만 이제는 나누어야 행복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과 나눌 때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에도 더 가까워진다.

모임 사람들이 내게 빨대 꽂기를 바란다. 지식이 짧아 줄 수 있는 게 그리 많진 않겠지만 맘껏 나를 활용하고 뽑아(?) 먹기를 바란다. 이 모임을 통해 더 많이 묻고 생각하고 알아가면서 나도 그들도 함께 자라나기를 꿈꾼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시민모임,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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