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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유무형의 질서유지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교통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운전자의 운전 습관이나 교통질서 의식, 신호등, 횡단보도 등 교통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질서유지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러한 질서유지 메커니즘을 체제라 부른다. 교통질서와 교통체제, 정치질서와 정치체제, 경제질서와 경제체제 등이 단적인 예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국가 중심의 국제사회에서도 질서와 질서유지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국제사회에서 국가들의 관계 유형을 의미하는 국제질서의 가장 일차적인 기능은 무력을 동반한 갈등을 방지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조정 없이는 국가나 개인들은 수많은 다른 가치들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무력 갈등을 방지하고, 안정된 국제질서를 확보하여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질서유지 메커니즘이 요구된다. 

국가들의 행위 관계의 유형을 의미하는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이 바로 국제체제이다. 국제체제는 주로 행위자와 행위자들 간의 힘의 배분 상태, 그리고 상호작용의 유형에 초점을 두고 국제정치 환경을 정의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국제체제는 국제사회의 핵심 구성원이자 국제정치의 주된 행위자인 국가의 사활적 가치를 보존․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질서유지 메커니즘이다.
  
단극체제의 종식

냉전 종식 이후 새로운 국제체제로 등장했던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세계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한 진영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상태)가 침식되고 국제적인 지도 국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코로나19가 발생했다. 코로나19는 개인의 일상적 삶의 행태뿐만 아니라 국제질서의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2022년 8월 현재 코로나19는 크고 작은 변종을 일으키면서 3년째 지속되고 있다. 이제는 코로나19와 더불어 살아가는 시대에 들어왔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진행됨에 따라 21세기 국제사회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도 지역적·국제적 협력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에 직면하여 주요 국가들이 보인 모습은 실망스러움을 넘어 충격적이었다. 미국과 중국은 코로나19 발생의 진원지를 놓고 격론을 벌였고 보편적 보건 안보 차원이 아니라 여전히 국가안보 차원에서 코로나19에 대응해 왔으며, 협력과 통합의 상징이었던 유럽연합이 보여준 코로나19의 대응 양상도 협력과 연대보다는 자국 우선주의와 각자도생의 모습이었다.

한편,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이 진행되는 와중에 발생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국제사회의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회복시키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 같으나 이는 서구 중심으로 한정되었고 그것도 매우 제한적이었다. 2022년 3월 유엔 총회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하여 러시아의 공격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과 전쟁에 따른 인도주의적 재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전자의 결의안은 찬성 141, 반대 5, 기권 38로 채택되었고 후자의 결의안은 찬성 140, 반대 5, 기권 38로 채택되었다. 또한 4월 7일 유엔 총회는 러시아의 인권위원회 자격을 중지시키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결과는 찬성 95, 반대 24, 그리고 기권은 58이었다. 이러한 유엔 총회의 투표 양상은 국제사회의 보편적 쟁점에 대한 국가들의 인식과 태도가 지극히 자국 우선주의에 바탕을 두고 전략적 이해관계에 따른 대외 행태의 결과라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처럼,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과 우크라이나 전쟁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협력과 연대보다는 각자도생에 기초한 자국 우선주의가 중시된다면, 현재 및 향후 국제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국제체제의 유형은 무엇이며, 그러한 유형에서 나타나는 국제질서의 주요 특성은 어떠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현재 및 다가올 국제질서의 모습을 '무질서의 국제질서'로 규정하고자 한다. '무질서의 국제질서'에서 무질서가 뜻하는 것은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질서유지 메커니즘이 뚜렷하게 특정하기 어렵거나 모호하다는 것이다. 즉, '무질서의 국제질서'는 국제질서를 유지하는 질서유지 메커니즘이 분명 존재하지만, 질서유지 메커니즘의 속성과 양상이 특정의 어떤 것으로 규정하기 힘든 상황을 의미한다.

미국 중심의 단극체제가 종식된 국제질서는 중국과 러시아, 유럽연합 등 외견상 다극체제의 모습을 보이지만, 국제질서에 미치는 이들의 영향력이 차등적이기 때문에 현재 및 다가올 국제질서가 다극체제에 의해 유지된다고 단언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스의 무극체제나 브레머의 G-제로 시대와 같은 주장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현재 및 다가올 국제질서에서는 '무질서의 국제질서'가 부상하거나 대두될 것이다. '무질서의 국제질서'에서는 질서유지 메커니즘을 하나로 특정하기 힘들고 설사 국가 중심적 국제체제를 고집하더라도 강대국 중심이 아닌 강대국과 지역의 주요 국가들의 조합으로 구성된 국제체제가 부상할 것이며 그러한 국제체제의 행태는 불규칙적이고 상당한 가변성을 보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맥락에서 '무질서의 국제질서'의 핵심적 구성원리는 자국 우선주의에 근거한 전략적 취사선택이 될 것이다. 국제사회가 코로나 시대로 진입할 이래 우리가 목격한 것은 협력과 연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이 아니었다. 자국 우선주의에 기초한 각자도생의 생존 원칙, 미국과 중국의 강대국 경쟁 격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로 인한 지정학 안보의 부활, 그리고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 세력의 대립 구도 형성 등 이전의 국제사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의 기저에는 자국 우선주의에 바탕을 둔 전략적 취사선택이라는 행동 원칙이 자리하고 있다.

'무질서의 국제질서'의 부상을 촉진하는 국가들의 전략적 취사선택이라는 대외정책의 핵심기조는 국제협력의 구심력을 떨어뜨리고 협력의 파편화를 촉진하여 기존의 다자제도를 통한 국제협력에 대한 전망을 매우 어둡게 만들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미국의 국제협력 전통을 강조하면서 중장기적으로 미국의 지도력 회복과 새로운 다자제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현실이 국제사회에서 향후 국제협력의 강화를 장담할 수 없다.

'무질서의 국제질서'에 대응하려면 

지난 3년 동안 코로나19에 대응하는 국가들의 대응 행태를 돌이켜 보았을 때, 우리는 통합과 연대, 그리고 다자협력이 얼마나 힘들고 취약한 것인지를 목격했다. '무질서의 국제질서'에서 국제협력의 강화 또는 회복은 바로 나타날 모습이 아니며, 그 가능성은 자국 우선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들의 전략적 취사선택의 조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러한 '무질서의 국제질서'에서 목격되는 오늘날 국제사회의 모습은 어둡기만 하다. 코로나19와 미중 전략경쟁의 격화가 결합되어 나타나는 세계화의 축소, 우크라이나 전쟁의 파장에 따른 느슨한 지정학적 진영화 추세, 그리고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새로운 종류의 무기를 개발하고자 하는 군비경쟁의 유혹 등이 국제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안정과 평화, 협력과 연대 등이 왠지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무질서의 국제질서'에서 우리가 처해 있는 대외 환경과 우리의 객관적 현실 간의 괴리를 최소화 해나갈 수 있는 전략적 나참반을 준비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는 다가오는 국제정세의 차가운 겨울로부터 우리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남북한 분단국가, 미국과의 동맹국가,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이익이 교차하는 한반도 반도국가, 그리고 오늘날 한국의 성장과 번영을 견인해온  세계적 통상국가라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전략적 나침반을 준비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 되어야만 한다.  

태그:#무질서의 국제질서, #우크라이나 전쟁, #국제체제, #지정학적 진영화, #한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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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정치학 박사 노무현 정부 통일외교안보정책실 행정관 역임 북한대학원대학교 겸임교수(현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현재) 민주평통기관지 통일+평화 편집위원(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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