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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7일 오후 4시 2분]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에서 마련한 문학예술 산책 프로그램 두번째는 주로 이광수의 흔적을 쫓는 내용이었다. 지난 6월 25일(토), 날씨는 흐렸지만 무더웠고, 습기가 많아 조금만 걸어도 땀이 흘렀다. 그래도 1회에 이어 많은 분이 참석했고, 강사 김남일 작가의 설명은 구체적이고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배울 점이 많았다.

■산책코스: 효자동 허영숙 산원-->창의문-->백사실계곡(점심)-->이광수 홍지문 별장--> 소림사-->석파정 별당-->반계 윤웅렬 별장-->현진건 옛 집터-->윤동주문학관 (해산)

모임 장소는 경복궁 한쪽에 있는 고궁박물관 옆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였다. 우리처럼 도시를 탐험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이번에도 1회와 비슷하게 약 1만 6천 보 정도를 걸었다. 서울이라도 처음 가보는 곳이 많았고, 새로운 장소를 발견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이광수의 흔적을 찾아다닌 흔적
▲ 탐방 지도 이광수의 흔적을 찾아다닌 흔적
ⓒ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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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오면 '고궁박물관'이 나오는데, 고궁박물관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쪽으로 넓은 공간과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이곳에서 모여 오전 10시 조금 넘어 출발했다.

효자동 삼거리 못미처 청와대 사랑채 가기 직전에 '진명여학교' 자리가 있다. 이 학교를 세운 엄준원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1900년 중추원 의관, 1901년 한성부 판윤, 1903년 경무사 칙임관, 1905년 헌병사령관이었던 자로 1906년 진명여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다.

엄준원의 누이가 고종의 후궁으로 황태자 영친왕 '이은'을 낳은 순헌황귀비로, 엄귀비에게 교지를 받아 진명여학교를 설립했다. 이광수는 이때 진명여학교 학생들을 자주 보면서 일본어로 쓴 짧은 글을 하나 남겼다.
 
우리 집 이웃에는 진명고등여학교가 있어 토요일 오후에는 여학생들이 새색시 모양으로 머릿수건을 쓰고 바지런히 근처를 왕래하며 청소를 해준다. 더운 여름날 땀이 밴 얼굴을 붉게 후끈거리며 마차를 끄는 말이 싸놓은 똥을 흔적도 남김없이 깨끗이 처리하고 있다. 작년 언저리부터 방공훈련이 종종 실시되면서 어느 집 부인이나 아가씨도 몸빼를 입고 양동이를 들고 기어나오는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게 되었다. 여학생들의 근로봉사는 이미 당연하여 희귀한 일이 아니며 가정부인 역시 사다리를 걸치고 지붕에  올라가 이를 악물고 소방작업을 할 정도는 익숙해진 것이다. 올해(아니 작년이다) 여학교의 운동회에서는 양동이로 물을 나르거나 흙을 담은 자루를 어깨에 지고 달리고, 부상자를 업거나 들 것에 눕히거나 하는 경쟁이 프로그램에 새로 더해졌다. 황송하게도 제81회 의회 개원식의 조칙(詔勅)은  "바야흐로 전국(戰局)이 중대하다. 모름지기 억조일심(億兆一心)으로 더욱더 국력을 증강하고 적국의 분에 넘치는 야심을 분쇄해야 한다"고 분부하셨다. 국력 증강을 위해서는 여성의 산업 전선 진출이 더욱더 요청될 것이다. 옥 같은 얼굴, 눈 같은 살갗은 당분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햇빛에 그을은 피부, 밭의 먼지와 공장의 기름으로 더러워진 몸빼와 마디가 불거진 손 一 이것이 금후 일본 여성의 새로운 미(美)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또한 강한 자의 어머니 될 소질도 될 것이다. (香山光郞, <朝日新聞>(南鮮版), 1943.1.9)

여성 개업의 1호 의사

진명여학교 터 맞은 편으로 이광수의 아내 허영숙이 1938년 개업한 조선 최초의 조산병원인 '허영숙 산원' 건물이 있다. 효자동 175번지에 있는 허영숙 산원은 스무 개가 있는 순 조선식 큰 집으로 개업하면서 장안의 화제였다. 

1938년 5월 1일 개업한 허영숙 산원을 <월간 여성>에서 일하던 기자 노천명(시인 노천명)이 방문하고 쓴 기사가 있다.
 
효자동 가는 전차를 타고 진명고녀 앞에서 내려 들어가노라면 삼분을 채 못 걸어 바로 길가에 유난히 눈에 띄는 아담한 순 조선식 큰 건물 하나가 있다. 살림집으로는 지나치게 크고 그렇다고 무슨 공무를 보는 집으로는 맞지 않게 아늑하고 다정한 맛을 주는 여기가 허영숙씨가 새로 개업한 씨의 산원이다… 이 산원의 특징은 조선식 온돌방에서 생활하고 또 이 온돌 따뜻한 방에서 해산을 해온 조선부인들이 병원엘 갑재기 들어가 침대 우에서 느끼던 종래의 불편을 일소하기 위해서 여기는 순 조선식의 좋은 점을 살려가지고 우리 부인들에게 맞게 설비한 점이라고 한다… ('허영숙산원 탐방기' 여성 1938. 12.)

이광수가 살던 집을 주로 둘러보는 과정이지만, 이광수의 아내 허영숙의 흔적을 만나는 건 필연이다. 이광수만큼이나 허영숙도 근대의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허영숙은 이광수와 혼인하기 전인 1920년 5월, 서대문정(당주동)에서 '영혜의원'을 개업한 여성 개업의 1호 의사였다. 이때 동아일보 기사를 보자.
 
재작년에 동경녀자의학뎐문학교를 졸업하야 조선에 처음으로 녀의(女醫)가 된 허영숙 녀사는 이번에 서대문뎡 일뎡목에 녀의원을 내이고 금일부터 개업을 한다는데 병원 일훔은 영혜의원(英惠醫院)이라 하며 이로써 조선녀자가 의원을 개업하기는 처음이라 하겟더라.('허영숙 여사 개업' 동아일보 1920. 5. 1.)

1921년 5월, 허영숙은 이광수와 결혼하는데, 이광수는 이미 결혼해 아내 백혜순이 있었으나 백혜순과 이혼하고 허영숙과 결혼한다. 이광수와 허영숙이 처음 만난 건 1918년 도쿄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에서였다. 허영숙은 경성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다음 학교 부속병원에서 실습하고 있었는데, 그때 일본 유학을 하던 이광수가 폐결핵에 걸려 이 병원을 찾은 것이 인연이 되었다.

결혼 직전 허영숙이 '모처의 부탁으로 무거운 사명을 받아' 상하이로 가서 이광수를 만났고, 이광수는 상하이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과정에서 신의주에서 체포되는데, '귀순증'을 지니고 있었다는 기사가 <조선일보>에 실렸다. 그래서인지 이광수는 불과 하루 만에 석방된다.

이후 한동안 당주동 집에 칩거하며 두문불출하던 이광수는 당주동 집과 동소문 밖에 있는 명륜동 집을 오가며 생활한다. 당시 숭삼동(명륜정 3정목 127번지) 집은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길 때 백인제 박사(백병원 설립자)가 이광수를 돌봐주던 집이기도 하다.

허영숙은 의사였지만 1923년 무렵부터 동아일보에 글을 싣기 시작해 1927년 3월까지 <동아일보> 기자로도 일했다. 이광수가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는데, 1925년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더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허영숙이 이광수가 하던 일을 이어받아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이때 쓴 기사는 허영숙의 전문 분야인 의학상식, 육아, 가정 등에 관한 내용이었고 1927년 퇴직하고 다시 의사로 돌아왔다.

슬픈 경계선 '자하문'

우리 일행은 창의문 앞에서 잠시 쉬며 김남일 작가의 설명을 들었다. 창의문(彰義門)은 자하문(紫霞門)으로도 부른다. 창의문이 나오는 소설이나 수필 작품을 보면, 최정희 작가가 쓴 소설 '흉가(1937년)', '정적기(1938년)', 수필 '화초밭(1939년)'이 있고, 엄흥섭의 작품 '산가영춘기(1937년)'도 있다.

최정희의 작품을 보자. 남편과 사이가 틀어져서 헤어지고 정동 집을 떠나 자하문 밖("고향은 端川. 지금 사는 곳은 紫霞門과 洗劍亭사이"(<삼천리>, 1937.1)에 나가 살게 된 시절의 이야기로 자전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정적기>는 일기체에, 자신이 쓴 작품 제목들을 고스란히 노출시키고 있다. 예컨대 <흉가>를 써서 집을 팔아먹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집주인에게 혼나는 이야기가 나오고, 창의문(자하문)은 서울에서 어떤 이유로든 쫓겨나게 된 사람들이 넘어가는 슬픈 경계선을 의미하는 내용도 나온다.
 
"이만하면 고향 손님이 와도 부끄럽잖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 "엄마 왜 우리는 밤낮 이사만 해... 우리 지금 가는 집은 하늘 끝에 있어?" 하고 정동 집에서 떠나던 날 자하문턱을 해가 저물어서 넘을 때 자하문으로 뵈는 하늘을 넘어다보며 울 듯 겁나는 듯한 얼굴로 아이가 내게 묻던 말도 기억에 있기는 하나 그래도 나는 날이 밝으면 집주인에게 돈을 찾아가지고 이사를 하리라는 마음을 먹었다.(<흉가>)
 

엄흥섭이 <조선일보>에 연재했던 수필 '산가영춘기(1937년)에는 다음처럼 기록하고 있다.
 
창의문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 사람은 쓰봉 기럭지가 길어서는 안 된다. 깃도구두니 강가루껍질 구두를 신어서는 안 된다. 실용적인 복수구두니 병정구두에 뒷축 앞코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징을 박아두지 않으면 안 된다. 여자이면 긴 치맛자락을 끌어서는 안 된다. 백설 같은 흰버선을 신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굽 높은 구두를 신어서는 더구나 안 된다. 창의문 고갯길은 돌밭길이요 바위 언덕길이요 모래 흙투성이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 고개 너머엔 부암, 홍지, 신영, 구기 등의 여러 동리가 이 산골짝 저 산골짝으로 흩어져 산다. 이 4,5 동리의 동민들은 대부분이 '지게'와 친한 사람들이다. 봄엔 여러 가지 꽃 장수를 하고 여름에서 가을엔 능금 장수 사과 장수 감 장수, 겨울엔 문안에 들어와 똥오줌을 퍼내가고 '시메나와' 장사까지 하는 악착스런 근로척급들이다."(조선일보, 1937년 3월 26일)

창의문(자하문)을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약간 오르막 길을 오르면 부암동 백사실 계곡으로 향한다. 
     
백사실 계곡 안에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남아 있는데, 건물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는 연못과 계곡과 함께 이곳이 조선시대에도 꽤 사람이 많이 찾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다.
▲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 건물은 사라지고 주춧돌만 남았다.
ⓒ 백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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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실 계곡을 내려와 평지에 이르면 계곡이 만나 흐르는 곳에 세검정 정자를 볼 수 있다. 부암동 일대에는 역사와 관련한 흔적이 많다. 무계원(武溪園)은 종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도심 속 전통문화공간으로 무계원에서 인왕산 안쪽으로 150m쯤 올라가면 무계정사지(武溪精舍址)가 있다. 세종의 셋째 왕자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의 별장인 무계정사가 있던 터다.
 
종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무계원
▲ 무계원 종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무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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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아버지 반계 윤웅렬의 별장도 부암동에 있는데 1905년 유행병을 피해 부암동에 별장을 짓고 살았으며, 윤웅렬 사후에는 셋째 아들 윤치창이 상속받아 안채 등 한옥건물을 추가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부암동에는 대원군의 사랑채인 석파정 별당과 석파정이 있는데, 일본작가 나쓰메 소세키가 1909년 조선을 방문해서 남긴 기록에 이곳 석파정에 관한 기록이 있다. 또한 화가 김환기의 미술관도 있는데,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은 본명이 변동림으로, 천재 이상의 아내이기도 했다. 이상의 죽음을 지켜본 변동림은 1944년 김환기와 결혼한다. 김향안은 환기미술관을 부암동에 짓고 미술관 옆에 '수향산방'을 짓고 살았다.

부암동 325-2번지는 현진건 작가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살던 곳으로 생계를 위해 양계를 했다. 이 시기에 주로 역사소설, 신문소설을 집필했다. 현진건의 외동딸 현화수는 나중에 소설가 박종화의 아들 박돈수와 결혼(주례는 최남선)했고 집은 2003년 헐렸다.
 
현진건의 집은 사라지고, 집터가 있었다는 걸 알리는 표지석만 서 있다.
▲ 현진건 집터 표지석 현진건의 집은 사라지고, 집터가 있었다는 걸 알리는 표지석만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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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동 산장

이광수는 1934년 8월에 자하문 밖 홍지동 40번지에 산장을 완공 짓는데, 그 과정을 잡지 <삼천리> 1936년 1월호에 '성조기(成造記)'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앞부분을 보자.
 
서기 일구삼사년 칠월, 영아(榮兒)는 홍역을 치르고 나고, 정란(廷蘭)도 봄철에 홍역을 치르고 난 뒤로 잘 추서지 아니할 뿐더러 이웃집에 백일해를 앓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원산 해수욕장에나 가서 한여름을 나리라 하고, 밤차로 떠날 양으로 짐을 끌어 내려 할 때에 어멈이 말썽을 부려서 원산행을 중지하고, 그 이튿날 이왕 묶어 놓은 짐이요, 가까운 소림사로나 가자고 하여 창의문 외에 소림사로 나오게 되었다. 이것이 연이 되어서 소림사에서 칠월·팔월 두 달을 유하였다. 나는 영문학과 라틴어를 공부하는 여가에 이웃으로 돌아다니다가 삼지동에 터 하나를 발견하였다. 감나무 박힌 일백오십사 평의 조그마한 밭이다.

하지만 '육장기'에는 이 시기가 매우 불행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내가 이 집을 짓던 해는 내 평생의 가장 암흑한 시기 중의 하나였소. 내 어린 것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것이나, 내가 평생을 바쳐보려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간 것이 이해였소. 그뿐 아니라, 나는 정신적으로 모든 희망을 잃어버려서 이제 내가 인생에 아무것도 바라는 것도 없고, 할 것도 없으니, 이것이 내가 죽을 때가 된 것이 아닌가 하도록 나는 막막한 심경에 빠져 있었소. 내가 사랑하고 믿던 이들까지도 다 나를 뿌리치고 가버린 듯하여서 나는 음침한 죽음의 근로에 혼자 버림이 된 혼령과 같이 붙일 곳이 없었소.

이런 심경에서 나는 아주 세상을 떠나 버릴 생각을 하였던 것은 그대도 잘 아는 일이 아니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산에 들어 일생을 마칠 결심으로 금강산으로 달아났던 것 아니오? 나는 거기서 며칠 지나서는 오대산으로 가려 하였소. 오대산에를 간다고 방한암 같은 이를 찾아서 도를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깊이깊이 산을 들어가서 세상을 잊고 또 세상에서 잊어버림이 되자는 것이오. 그때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 하면 제 죄를 뉘우치는 생활을 하여서 내가 평생에 해를 끼친 여러 중생을 위하여서 복을 빌자는 것뿐이었소.(<육장기>, 1939)

홍지동 산장에 관한 기록은 이광수의 작품에 많이 보인다. 산문 <봉아의 추억>(1936), <성조기>(1936), <산거기>(일기, 1939). 단편 <만영감의 죽음>(1936, 일어), 장편 <사랑>(1938), <무명>(1939), <육장기>(1939) 이광수의 딸 이정화가 쓴 <아버님 춘원>(1956) 등에 홍지동 산장 이야기가 나온다.

'성조기'에도 나오지만 홍지동 산장을 짓기 전에 머물던 '소림사'는 산장에서 매우 가깝다. 이광수의 '육장기'를 보면, 이광수는 소림사에서 올연선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데, 여기서 올연선사는 '청담 스님'을 뜻한다. 청담 스님은 이광수의 육촌인 봉선사 운허 스님의 부탁으로 자하문 밖 소림사에서 이광수를 만나 일주일간 <법화경>에 대해 대화하는데 결국 이광수는 처음의 패기만만함을 잃고 번역을 포기한다(매일경제 1969.8.30)

이광수는 홍지동 산장을 1939년 5월에 6천원을 받고 판다. 이 산장을 지을 때 고생하고, 만족했던 기록이 있지만, 1938년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기소되고, 건강도 여의치 않았다. 산장을 팔고 다시 효자동으로 합가했다 1943년 양주군 진건면 사릉리 520번지로 이주했다 1948년 9월 다시 효자동 집으로 돌아온다.

이 효자동 건물은 해방 이후 1949년, 반민특위가 이광수를 체포한 곳이기도 하며, 1950년 7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에서 내려온 시인 리찬이 이 집으로 이광수를 찾아와 월북할 것을 종용했다. 이광수가 납북되고 전쟁이 끝난 이후 허영숙은 '광영사'라는 이름의 출판사를 세운다. 이광수의 '광'과 허영숙의 '영'을 따서 만든 이름으로 허영숙 소유의 출판사였다. 한국 전쟁 이후 1956년부터 허영숙은 이곳에서 <춘원선집> 24권을 펴내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누구나 아는 친일 작가이면서 또 깊이는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이번 이광수가 살던 집과 흔적을 찾아보면서, 이광수의 삶을 보다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창의문(자하문), 부암동, 백사실계곡, 세검정 일대를 걸어본 것도 처음이지만, 서울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태그:#이광수, #허영숙, #부암동, #창의문, #자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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