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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전 8월 15일 12시,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이 땅에 해방과 자유가 찾아 왔다. 1894년 7월 경복궁 점령부터 일본은 50년 동안 이 땅에서 학살과 탄압, 통제와 수탈, 민족문화 말살 등을 자행했다. 그 아픔과 상처, 분노와 저항의 상흔이 아직도 용인 곳곳에 남아있다.

용인의 근대사 유적은 2008년 독립기념관의 사적지 조사(15곳)를 시작으로 경기문화재단과 용인시가 설치한 표지석을 통해 시민들과 만나고 있다. 이후 항일의병과 독립만세운동, 민족지사의 생가와 묘소 등이 추가로 발굴돼 이중 대표적인 유적지 몇 곳을 소개하려 한다.

광복절을 맞아 우리 곁에 묻혀 있는 생생한 독립운동의 현장을 발로 찾아 선조들의 숨결과 함성을 만나는 기회가 되길 기원한다. - 기자 말


맨몸으로 침략군에 맞선 의병들, 용인 곳곳에서 항전하다

경복궁이 일본군대에 포위당해 민비(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군대가 강제해산되며, 고종 황제마저 강제 퇴위당하자 전국에서 수많은 민초들이 일어났다.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본 침략군에게 맨몸으로 맞선 의로운 백성들의 처절한 투쟁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1896년 남한산성 연합의병에 참여한 신용희 의병장을 비롯해 1905년 농민군 이인응 부대, 1907년 임옥여와 이익삼·정주원·정철화 의병부대가 대표적이다. 특히 용인 양지면 추계리 송병준 별장은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본부로써 의병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고, 김량장에도 의병 수백 명이 근거지로 삼았다. 또 다른 의병 활동지로 백암장터와 굴암사(현 용덕사)를 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만세시위가 있었던 백암장터(현 백암우체국)
 일제강점기 만세시위가 있었던 백암장터(현 백암우체국)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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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암장터(처인구 백암면 백암리 434 일대) : 백암장은 용인 남부와 이천, 안성과 죽산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이며, 물산이 풍부한 농지다. 백암장터를 배경으로 항일의병이 출현한 시점은 민비가 일제에 시해된 1895년 가을부터였다. 1906년 2월 죽산군수가 30~40명의 의병이 백암장으로 몰려와 군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인 8월 12일 전주의병이라 칭하는 50여 명이 백암장에 나타나 일본인 1명을 총살했다. 9월 21일에는 일본군 1개 소대가 백암 송림에 있던 의병 100여 명과 교전해 8명이 사망했다. 11월에는 임옥여 부대가 백암시장에 나타나 일진회원과 순사, 순검 등 3명을 총살했다.

1919년 독립만세 시위 때에도 백암시장은 주민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당시 백암면사무소는 현재의 백암우체국이며, 백암파출소 자리도 일본 경찰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3월 31일 오후 백암면(당시 외사면) 일대 주민 3000여 명이 백암시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가 주민들을 수탈하고 억압한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자, 헌병들은 총을 발포해 강제해산시켰다. 4월 2일에도 주민 500여 명이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해산당했고, 이후 시위를 벌이려다 제지당하는 등 열기가 계속됐다.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처인구 이동읍 묵리 용덕사 굴암.
 의병활동의 근거지였던 처인구 이동읍 묵리 용덕사 굴암.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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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암사(현 용덕사, 이동읍 묵리 산57) : 처인구 이동읍 묵리의 굴암(窟庵)사는 용덕사의 옛 이름이다. 산세가 매우 가파르고 절터 뒤에 커다란 암굴이 있어 의병들의 은거지로 활용되었다. 1905년 4월 의병장 이인응이 이곳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당시 죽산군수가 의병 25명 중 12명을 체포했다고 보고했다.

1907년 5월 22일 임옥여 부대가 추격하는 일본군 토벌대와 이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임옥여는 이천 창의소 좌장이 돼 광주·양근(현 양평)·이천읍을 무대로 활동했는데, 포군 70여 명과 함께 굴암에 머물다가 일본군과 격전 후 이동했다고 한다.

광주(성남) 출신 의병장 남상목도 1907년 용천곡(현 백암면 용천동)과 굴암사에서 의병 50여 명과 함께 활동했고, 정주원 의병장도 굴암에서 30여 명과 함께 거병해 일본군 정찰대와 전투를 벌였다. 의병들은 바위굴을 통해 포위망을 뚫고 산을 넘어 원삼 문촌리와 죽산으로 이동하며 활동했던 것이다.

경기문화재단이 설치한 안내판에는 이곳 스님들이 3·1만세운동도 이끌었다는 내용이 있지만 아직 사료로 확인되지 않았다.

학생들이 앞장선 독립만세운동, 세상을 뒤흔들다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의문의 죽음은 3월 1일 전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용인에서는 3월 21일 원삼면 좌항리 좌찬고개에서 첫 횃불을 올린 후 24일 용인읍내 김량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29일부터 4월 3일까지 수지·모현·포곡·양지·백암·이동·남사면 등 전역에서 약 1만5000여 명이 참여했다. 이중 새로 발굴된 김량장 읍내 시위지와 수지구 만세운동의 현장을 찾아본다.

- 옛 김량장공립보통학교(현 용인초등학교, 김량장동 228-1) : 용인초등학교의 전신인 김량장공립보통학교는 1915년 11월 5일 개교한 학교로 1919년 3월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에서 올린 '극비 독립운동에 관한 건(제28호)'에 의하면, 3월 24일 김량장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수료식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학생 30여 명이 김량장 시장으로 이동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이에 순찰 중이던 헌병이 해산시켰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 중 6명이 헌병대에 체포돼 졸업장을 빼앗기고 구류에 처한 후에 풀려났다. 학생들의 시위는 4월까지 용인 전역에서 릴레이 형식으로 벌인 독립만세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옛 용인군청 자리. 현재 용인중앙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옛 용인군청 자리. 현재 용인중앙공영주차장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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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용인군청(현 용인중앙공영주차장, 김량장 80-2번지 인근) : <매일신보> 1911년 7월 28일 기사에 따르면, 용인군청은 그해 7월 19일 읍삼면(현 기흥구) 언남동에서 수여면 김량장리로 옮겨 이전식을 가졌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수원지도나 신축 군청의 설계도면(국가기록원 소장), '토지조사부'에 의하면 당시 용인군청 주소는 수여면 김량장리 80번지로 확인된다.

이곳은 오늘날 용인중앙공영주차장이 자리한 곳이다. 군청 인근에는 일본 헌병대(경찰서)와 보건소, 일본인 거주지와 신사까지 자리한 식민통치의 중심지였기에 항전의 대상이 된 것이다.

1919년 3월 28일 이른 아침 모현면을 출발한 만세 시위대는 포곡면과 김량장리를 거쳐 1000여 명에 이르렀고, 목적지는 용인군청이었다. 군청 앞에 운집한 시위대는 용인 군수와 헌병 분대장의 설득으로 잠시 해산했지만, 곧 다시 집결해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이때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를 가하자 1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다수가 발생해 해산했다. 현재 이곳이 만세시위지였으며, 옛 용인군청 자리였다는 걸 아는 이가 드물고, 인근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신축 중이기에 옛 자취가 사라질 상태이다. 독립만세의 현장임을 알리는 안내판 설치 등 보존 대책이 절실해 보인다.
 
수지구 고기동 고기초등학교 앞 머내만세운동 표지석.
 수지구 고기동 고기초등학교 앞 머내만세운동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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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초등학교와 옛 수지면사무소(수지구 고기로 385, 풍덕천로 190번길 18) : 수지구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오전 안종각과 함께 고기동 구장 이덕균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덕균은 각 집에서 1명씩 나와 동천리 방면으로 시위에 참여하도록 했다.

고기리 마을 입구인 현 고기초등학교 앞 공터에 모인 주민 100여 명은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 뒤 아랫마을인 동천리를 거쳐 동막골, 하손곡 등의 300여 주민들과 합세해 수지면사무소(현 용인서부경찰서 수지지구대)를 향해 행진하면서 만세를 외쳤다.

3월 30일 안종각은 이불 호청을 뜯어 태극기를 만들고 홍재택 등 주민들을 규합해 다시 수지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풍덕천에 이르러 10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구성 삼거리를 거쳐 읍삼면사무소가 있는 마북리로 향했다.

이날 기흥 신갈지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성 삼거리로 진출한 김구식 등 300여 명과 합류한 시위대는 용인군청이 있는 김량장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위대가 마북 삼거리(옛 경찰대학 입구)에 당도할 무렵, 김량장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대가 시위대를 막아서다가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이때 총격으로 안종각과 최우돌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이덕균도 일경에 체포돼 징역 1년 6개월형의 옥고를 치렀다.

현재 고기초등학교 입구에 머내마을 주민들 주도로 제작된 독립만세 발상지 표지석이 세워져있고, 매년 3월 30일 재현행사가 열리는 명소가 됐다.
 
여준 선생이 구국운동차원에서 세운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소재 삼악학교 터 표지석.
 여준 선생이 구국운동차원에서 세운 처인구 원삼면 죽능리 소재 삼악학교 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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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사들의 삶터, 대한민국의 기틀이 되다

- 삼악학교 터(원삼면 죽릉리 390-1) : 삼악학교는 신교육 기관이 필요하다고 여긴 여준 선생이 1908년 원삼면 죽능리에 설립한 사립학교이다. 북간도 용정에서 서전서숙이란 민족학교를 운영한 바 있는 여준은 가족과 형님이 살고 있는 원삼면 죽릉리에서 외가인 해주오씨 친척들과 상의해 오항선의 집터에 학교를 세웠다.

<대한매일신>에도 설립 소식이 실린 이 학교는 국어와 역사, 영어와 지리 등 신학문을 가르쳤다. 모스크바 비행학교 유학생이었던 김공집이 교사로 재직했고 만주독립군 오광선 등을 배출했다. 학교는 일제가 강제 폐교시킨 1914년까지 존립했다가 폐교되었다.

죽능5리 주민들은 학교터로 죽능리 390-1번지로 확인해 주는데, 현재 개인 소유의 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근에 대표적인 만주 독립군 오광선 장군과 일가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3대독립운동 기적비'가 있다.

올해 말이면 SK반도체클러스터 조성공사로 이 지역이 사라질 예정이다. 죽능리 마을 입구에 전시관을 조성할 계획이라 하는데, 많은 독립지사들을 배출한 민족교육의 산 교육장으로 기록돼야 할 것이다.
 
여성 독립운동가 정현숙 지사의 처인구 이동읍 화산리 생가.
 여성 독립운동가 정현숙 지사의 처인구 이동읍 화산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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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현숙 생가 터(이동읍 화산리 263) : 여성 독립운동가인 정현숙(본명 정정산)은 1900년 이동면 화산리에서 태어나 14살에 3살 위인 오광선과 결혼했다. 1915년 남편이 서간도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자, 1919년 의병장인 시아버지 등 시댁 식구들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했다. 화전을 일구며 옥수수와 조를 재배해 만주 독립군들을 먹이는 헌신적인 뒷바라지를 하며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다.

193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가족과 함께 남경에 이어 중경으로 이동하며 뒷바라지를 했고, 1941년에 한국혁명여성동맹 회원으로 활동했다. 두 딸인 오희영과 희옥을 광복군 대원으로 참여하게 했으며, 본인도 1944년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에 화산리 친정집을 자주 찾았으며 1992년 서거했다. 현재 가옥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나 생전에 머물렀던 방이 친정 일가의 관심으로 보존되고 있다. 2022년 8월 15일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안내판을 설치할 계획이다.

- 조선의용군 정철수 묘(모현읍 능원리 219번지) : 정철수(중국명 고철)는 모현면 능원리에서 태어난 포은 정몽주 선생의 24대 직계 종손이다. 1930년 모현공립보통학교에 이어 1934년 수원공립보통학교을 졸업한 후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 1942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했다.

재학 중 결혼해 장녀를 낳았으나 1943년 12월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1944년 3월 탈출한 그는 조선의용군에 가입해 항일전선에 나섰다. 조선혁명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해 항일 연극 활동에 전념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조선의용군 연변 교육과장에 이어 길림중학교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후 연변대학교 일문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4년 KBS 라디오방송을 통해 '노모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41년 만에 고국을 방문해 상봉했다.

1986년 10월 부인과 장남 내외와 함께 영구 귀국한 후 황폐화된 포은 묘역과 종손 묘역을 정비했다. 그후 1989년 2월 17일 사망해 모현읍 능원리 219번지 역대 종손묘역에 묻혔다.

김명섭(단국대) 박사, 김지혜 용인독립운동기념사업회 연구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용인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항일의병, #만주독립항쟁, #정현숙, #3대독립운동가, #용인만세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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