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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15일 귀환한 삼창호 당시 사진
 1972년 9월 15일 귀환한 삼창호 당시 사진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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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씨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의 가족이다. 그의 부친 김달수씨는 1968년 신광호를 타고 조업 중 납북귀환되었고, 1972년 삼창호를 타고 조업 중에 또다시 납북되었다.

김해자씨는 현재 강원도 속초시에 있는 속초중앙시장에서 작은 옷 가게를 하며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느릿하고 조용한 말투였지만 부친의 이야기, 연좌제 피해를 이야기할 때는 빠르고 강한 어조의 말투로 바뀌기도 했다.

김해자씨의 아버지 김달수(당시 38세)씨가 처음 납북되었던 신광호는 명태잡이 배였다. 아버지가 처음 북에 납북된 1968년에 김씨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김씨는 배를 타고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행방불명되었다고만 생각했지 납북된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갑작스런 부친의 부재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오빠는 가장을 대신 해 오징어 배를 타고 나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초등학생이던 김씨도 학교 대신 돈을 벌겠다며 도로 공사장과 생선 장사 등을 전전했다.

초등학생 때, 엄마 몰래 사방공사장에 나간 김씨는 관리자에게 '나도 일하게 해 달라'고 고집을 부려 힘들게 허락받고 일했다. 같이 일하는 할머니들은 "아이고, 어린아이가 일도 잘하네"하며 도시락에 싸 온 꽁보리밥과 된장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김씨는 나뭇가지를 꺾어 젓가락을 만들고 산에 있는 나물을 뜯어 쌈 싸 먹는 것으로 요기를 면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시냇물에 얼굴을 씻고 들어가 공사장에 다녀온 것을 감췄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등교하지 않자 김씨를 찾으러 온 담임선생님에 의해 결석 사실을 들키고 말았다. 집에 들어서자 무서운 얼굴로 회초리를 들고 계시던 어머니는 차마 김씨를 때리지 못하고 대성통곡만 하셨다고 한다.

어느 날, 어머니가 배추 장사를 나가고 김씨 혼자 집에 있을 때, 경찰이 찾아와 갯배 쪽으로 나오라고 했다. 경찰의 말대로 갯배 둔덕에 앉아 있자, 함대(해안경찰대)가 속초항을 나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항구로 나갔던 함대와 함께 배 두 척이 따라 들어왔다. 그 두 척의 배 중 하나가 신광호였다.

모든 선원들이 배 옆으로 나와 서 있는 게 보여 김씨는 손을 흔들며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를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야속하게도 선착장에 선원들이 내리자마자 경찰들은 준비된 버스에 그들을 태워 어디론가 데려갔다.

김씨는 아버지가 경찰서에 계시다는 걸 알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경찰서 앞을 기웃거리며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렇게 며칠을 서성이던 중, 운 좋게도 조사받기 위해 이동하는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아버지에겐 집도 감옥이었다

김씨의 기억에 아버지는 파란 죄수복을 입고, 굵고 흰 밧줄에 묶여 이동했다. 김씨는 아버지가 보이면 달려가 '아버지! 아버지!'하고 부르며 울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겁에 질려 김씨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그런 아버지를 보며 김씨는 '죄 없는 우리 아버지를 왜 데리고 가느냐'며 겁 없이 경찰들에게 대들었다.

김씨의 아버지는 키가 크고 몸도 좋은 데다 건강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경찰조사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걷지도 앉지도 못하는 눈 뜬 시체와도 같았다. 제대로 앉아 먹지 못해, 누워있는 아버지 입에 미음을 넣어 드려야 했고, 그런 아버지는 겨우겨우 목으로 미음을 넘겼다. 그렇게 다쳤음에도 가난한 형편에 병원 갈 엄두는 내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집 밖에 나가지도 않으셨고, 당신 형제들이 오는 것도 싫어하셨어요.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를 피하는 것 같았어요.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는 이전과 달랐어요. 주무시다가 갑자기 짐승 소리 같은 괴성을 질러 가족들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깬 게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한 번 피를 토하면 작은 요강 하나 가득 찰 정도로 시뻘건 피를 쏟았어요 요강에 꽉 찬 피를 하얀 눈밭에 버리고 오면 다시 토하시기를 여러 번 하셨어요. 그때 '사람이 저렇게 많은 피를 쏟을 수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무서웠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 뒤 경찰들이 항상 집에 찾아왔다. 아버지는 그들이 왔다 간 날에는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힘들어했다. 그 모습이 싫었던 김씨는 경찰들이 오면 물바가지를 끼얹으며 '당신들이 왔다 가면 아버지가 밥도 못 먹고 몇 날 며칠 아파하신다. 망할 인간들아, 가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경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뒤로도 계속 집에 찾아왔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든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고, 때때로 경찰서에 불려 가기도 했다.

신광호 귀환 이후 집에만 있던 김씨의 아버지는 1972년 김씨의 오빠가 군대에 가게 되자 돈을 벌기 위해 다시 배를 탔다. 삼창호라는 배였는데 그 배 또한 납북되는 기구한 일(당시 42세)이 벌어졌다. 돈 벌러 나가 있던 김씨는 삼창호가 납북된 것도 이후 귀환한 사실도 모르고 지내다가 아버지가 대전교도소에 복역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다고 한다.
     
대전교도소에서 1년 6개월 만에 출소하신 아버지는 힘든 옥살이에 코와 손, 발에 동상이 걸렸고, 펴지도 굽히지도 못하는 다리 때문에 잠 잘 때도 앉아서 자야 했다. 이도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모두 빠져버렸고, 귀 한쪽은 듣지 못하게 되었다. 나가지도 않고 누구도 만나지 않는 아버지에겐 집도 감옥이었다.

어려서부터 집안 살림을 책임졌던 김씨의 고생은 결혼생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간암 투병을 하고 있는 친정어머니, 가난한 시댁과 친정. 이 모두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옷 가게, 정육점, 식당, 노래방 등 쉬지 않고 일해야만 했다.

김씨의 남편은 공무원이었다. 법원 공무원이었던 남편과의 결혼은 간첩 누명을 벗고 싶었던 부친의 바람이 컸다. 정작 결혼식 날짜가 정해지자 결혼식 직전까지 경찰이 찾아와 '결혼할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이냐, 진짜 결혼할 거냐' 등을 물었다. 남편의 미래가 걱정되어 '아무래도 나랑 결혼하면 진급도 안 되고 수난을 겪게 될 거다'라고 말하며 결혼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했지만 남편은 '그래도 좋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납북사건으로 어그러진 가족 모두의 삶
 
속초중앙시장.
 속초중앙시장.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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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편은 결혼 후 승진 시험에서 계속 떨어지자 결국 원망의 화살을 김씨로 돌렸다. 김씨는 결국 1980년 초 큰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이혼을 하였다.

김씨는 이혼 후 태어난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 밤마다 '미친 사람'처럼 산등성이에 올라가 울며 지냈다. 그러다 '그냥 죽어야겠다' 생각하고 약국을 돌아다니며 조금씩 수면제를 사 모았다. 그리고 그 마음을 먹은 날, 베개 밑에 '엄마, 저 일어날 때까지 깨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라는 쪽지를 남긴 채 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행히도 김씨는 병원으로 이송되어 눈을 떴으나, 그녀는 괴로운 마음에 의사들을 향해 '죽을 사람 왜 죽지도 못하게 살렸냐'며 난리를 피웠다고 한다. 이 일로 이혼했던 남편이 찾아와 사과하며 새로 시작하자며 간곡히 애원하는 바람에 결국 재결합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가정을 꾸려 둘째도 낳았다. 그런데 평소엔 온순했던 남편이 술만 마시면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다' 탓하며 또다시 난폭하게 굴기 시작했다. 심지어 남편은 법원에 사표를 낸 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결국 두번째 이혼을 했다. 그런데 정작 이혼하고 나니 앞으로 두 아이들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다. 지긋지긋하게 힘든 세상을 견디기 힘들어하던 그녀는 다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러나 다행히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1년 뒤 남편이 매일 찾아오다시피 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사과했고, 그런 남편을 믿고 세 번째로 살림을 합쳤다. 그러나 반복되는 원망과 싸움에 지쳐, 아이들이 모두 독립한 후 세 번째로 힘들었던 결혼생활을 끝냈다.
 
"오빠는 아버지가 귀환하시고 언제부턴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만취가 되어 있어요. 오빠도 자기 나름대로 꿈이 있었을 텐데 어린 나이에 갑자기 고기잡이배를 타고 나가 시퍼런 바다에서 고생하고 다녔으니 힘들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오빠는 배를 타지 않았고, 다른 어떠한 일도 하지 않으며 폐인처럼 지내기 시작했어요. 그런 오빠에게 지친 올케는 이혼도 하지 않고 그냥 집을 나가버렸어요.

올케가 집 나갈 당시 그 상태 그대로 놔둔 오빠 집은, 이제 폐가가 되다시피 해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해요, 그 집에 살고 있는 오빠 말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삐쩍 마른 몸에 몽땅 빠진 이, 머리며 손톱이며 엉망인 채, 오빠가 그런 집에서 혼자 술만 마시고 울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 정말 참혹할 지경이예요. 세상에서 고립되어 그렇게밖에 못사는 오빠가 정말 왜 그러는지 밉고 원망스럽기도 해요."

시장에서도 평소에 담대하고 당차다는 말을 듣는 김씨지만, 납북사건으로 가족 모두의 삶이 어그러진 걸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분해 자다가도 눈물이 나 지치도록 울곤 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나올 눈물도 없겠지'라고 여길 만큼 눈물을 흘리고는 울음 끝에 병이 날 때도 있다고 한다.

최근 납북귀환어부모임을 가지면서 아버지의 피해에 대해 좀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오빠의 마음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위로를 받고 있지만, 무엇보다 가난하고 아프고 억울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간첩 누명을 벗고 하늘에서라도 편히 쉬셨으면 하고 간절히 바랄 뿐이라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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