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난 아저씨처럼 살지 않을 거야."

흥행 1위를 달리고 있는 <헌트> 속 대학생 조유정(고윤정)의 대사다. 무심한 듯 자신을 물심양면 보살피는 12년 경력 안기부 해외 팀장 박평호(이정재)가 "나쁜 놈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충고하자 안타깝다는 듯 되돌려준 조유정의 답이었다.

때는 1983년. 안기부와 보안사가 간첩단을 조작하고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인사들을 고문하고 때려잡던 독재자의 시대. 조유정의 말처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주체들 중엔 분명 대학생들도 있었다. 박평호가 가리킨 "나쁜 놈들" 역시 '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시위에 가담한 그 대학생들이었다.

영화 속 조유정이 소위 운동권은 아니었다. 시위 가담 여부를 묻는 박평호에게 가담 사실을 극구 부인한다. 그러고는 유치장에서 형사에게 두들겨 맞아 기절한 대학생 친구와 동료들을 집으로 데려와 김치가 반찬의 전부인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려준다. 박평호는 그 대학생들을 전화 한 통으로 유치장에서 꺼내준다.

안기부 내 스파이, 그러니까 밀정을 잡는 데 혈안이 돼 있던 박평호의 그런 호의는 또 있었다. 대폿집에서 혁명이 어쩌고 독재가 어쩌고 난상토론을 벌이다 몸싸움을 벌인 대학생들을 방면시켜 준 이도 조유정의 부탁을 외면하지 못했던 박평호였다.

안기부 내 스파이를 쫓는 이정재 감독의 데뷔작 <헌트>는 1980년대 군부독재의 스산한 풍경을 정면으로 대면한다. 그 속엔 물론 고문과 취조의 풍경도 포함돼 있다. 안기부 내에서 자행됐던 소위 '통닭구이' 등 각종 고문 기술이 시대적 배경으로 소환된다. 박평호가 아니었다면 영화 속 고유정의 친구 대학생들도 일찌감치 안기부로 끌려갔을지 모를 일이다.

이정재 감독이 인터뷰 등을 통해 밝힌 그대로, 재일조선인이자 영화 중반부 이후 북한 스파이로 의심받는 고유정을 포함해 <헌트>가 가리키는 세상의 변화을 향한 열망은 바로 이 젊은 세대로부터 비롯된다.

'대통령을 제거하라'는 홍보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 안기부 내 밀정을 쫓는 듯하다 결국 '아웅산 테러'라는 실제 사건을 연상시키는 과감하고 비극적 결말로 치닫는 <헌트>. 이 비정하고 냉철한 작품이 남겨 놓은 유일한 희망의 단서가 대학생 고유정과 같은 세대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현실 속 '대학생 밀정(프락치)' 의혹이 회자되는 상황에선 더더욱 말이다.

<헌트>와 밀정 의혹 속 1983년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전두환 정권은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학생운동 가담자들을 대상으로 개개인의 포섭 및 회유 작업을 벌였다. 이른바 '녹화사업'이다. 이 녹화사업은 대학생들을 군에 강제 징집한 뒤 갖가지 방법으로 교화를 시키고 밀정 활동에 활용했다. 일종의 변절 및 밀정의 체계화 및 조직화의 일환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헌트>가 4050 세대를 포함해 전 연령대 관객들을 불러 모으는 사이, 극장 밖에서도 때 아닌 밀정 논란이, 1983년의 대학생들이 소환되는 중이다. 행정안전부에 신설된 신임 경찰국장의 밀정(프락치) 의혹 때문이다. 본인은 극구 부인하는 가운데 의혹을 입증하는 증거로 볼 수 있는 당시 보안사령부(보안사) 문건까지 나왔다.

해당 의혹은 이 신임 경찰국장이 과거 대학 재학 및 졸업 이후 공안 기관의 밀정으로 활동했고, 재학 중이던 대학 써클 활동과 특정 노동단체 활동을 밀고한 대가로 경찰에 특채된 이후 내부 인사에서 승승장구했다는 내용이다.

MBC 보도를 통해 공개된 1983년 보안사 문건에 따르면, 보안사는 특수학변자(교내 시위를 하다 강제징집 당한 특수학적변동자)로서 군 복무 중이던 신임 경찰국장에게 당시 학내 이념서클의 조직도는 기본이요, 무슨 책을 읽었는지, 합숙 MT가 언제인지 등 구체적인 서클 활동 동향을 보고 받았다. "술 마신 것만 보고했다", "전혀 모르는 내용"이란 해명과 배치된다.

또 보안사는 경찰국장이 대학을 졸업하자 노동 단체 활동도 보고 받았다. 해당 단체 회원들은 해당 국장이 잠적한 직후 국가보안법 혐의로 15명이 줄줄이 구속된 반면 경찰국장은 핵심 간부였음에도 구속은커녕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헌트>가 그리는 그 폭력과 고문과 시대에 동료들을 팔아먹은 밀정 활동은 지탄의 대상을 넘어 그 시절을 버텨냈던 당사자들에겐 공포와 악몽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로, <헌트> 속 박평호와 함께 밀정으로 의심받는 김정도(정우성)가 안기부 이전 근무했던 곳이 전두환 군부독재의 최전선 집행 기관인 바로 군 보안사였다.

이처럼 구체적 자료까지 제시된 밀정 의혹을 시대의 아픔이라 치부할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일 것이다. <헌트>를 본 관객들이 당시 엄혹했던 시대를 떠올리듯, 군사독재의 피해자들이, 그 당사자들이 엄연히 살아남아 그 시절의 끔찍했던 기억과 경험을 본인들의 육체로 증언하고 있다.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릴 것인가'
 
 영화 <헌트> 스틸컷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군사독재 시절 대학생 프락치의 유래라 할 수 있을 일제강점기 밀정들의 행위의 배경은 <헌트>를 연출한 이정재 배우의 <암살> 속 명대사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 노년이 된 염석진이 끝끝내 찾아와 총구를 겨누는 안윤옥(전지현) 앞에서 내뱉는 그 변명 말이다.

"해방될지 몰랐으니까. 알면 그랬겠나."

때마침 광복 77주년을 맞아 15일 EBS가 방영한 <밀정> 속 정채산은 경찰이자 일본군 '밀정' 이정출(송강호)과 밤낚시를 즐기다 이렇게 묻는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만주에서 활동하는 정채산의 이 질문은 생존과 사익을 위해 독립군을 팔아넘기던 이정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암살> 속 염석진에게도, 현실의 경찰국장에게도 해당되는 질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어디에 올려야 할지를 정해야 할 때가 옵니다. 이 동지는,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리겠습니까." - 영화 <밀정> 속 독립군 수장 정채산(이병헌)의 대사

'어느 역사 위에 이름을 올릴 것인가'. <밀정>과 <암살>을 본 관객만 물경 2000만 명이다. 이러한 간접체험을 통해 연령과 관계없이 동시대 우리 관객들이 이 '밀정'의 활약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고 있다는 얘기다.

1980년대를 살아낸, <헌트>가 그리는 그때 그 시절 대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고. <헌트>의 흥행과 때아닌 '밀정' 논란이 교차하는 2022년 광복절, <헌트>를 극장에서 보고 나온 관객들이 뉴스를 장식한 밀정 논란을 접하며 느낄 감정은 단순히 시대의 아픔만은 아닐 것이다.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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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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