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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치자마자 잊고 살았던 먼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학습지 교사로 이름을 올리고 가정을 방문해서 아이들과 글쓰기 활동을 진행하던 때가 있었다. 아이들 주변의 것에서 사물을 관찰하고 이야기를 만들어 글로 표현하는 과정이었다. 가르침은 즐거웠지만 기억에서도 희미할 정도로 길게 가지는 않았다.

잠깐 몸을 담았던 그 일은 벌써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다. 작품 속 연우가 느낀 보험회사 영업소인 듯한 어색하고 불편했던 분위기는 기억나지만, 학습지 교사에 대한 부당한 구조적 문제까지는 다행히도 알지 못했다.
 
책표지
▲ 방서현, <좀비 시대> 책표지
ⓒ 장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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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서현 작가의 첫 소설 <좀비 시대>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호러물은 아니다. 제목의 '좀비'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야기는 허구지만 소설의 상황은 상당히 구체적이고 인물은 사실적이다. 주인공 연우의 노동 현장인 수재 학습지 2지국은 현실의 어딘가에 실재하는 것 같다.

연우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치르는 임용고시 1차에서 1점 차로 아깝게 떨어진다. 이후 몇 번의 시험에서 연속으로 실패한 후 수재 학습지 교사로 취업한다. 가르치는 것이 좋아 선택한 일이었고 신문의 모집 광고는 교사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처럼 근사했다. 게다가 여유로운 출퇴근 시간은 오전 시간을 활용하여 임용고시 공부를 계속하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생각과 달리 학습지 교사로서의 연우의 삶은 순조롭지 않다. 회원 모집을 강요하는 지국장, 휴회를 하겠다는 학부모와 공부 생각이 전혀 없는 아이들. 10분의 관리 시간은 학생을 가르치고 새로운 과목 테스트도 하게 하고 학부모에게 추가 가입을 종용하고 계획에 없던 변수까지 감당해야 하는 난감한 시간이다.

게다가 분명히 고용되어 있지만 근로자는 아니다. 학습지 회원은 회사에 가입했는데도 여타 민원이나 탈퇴의 책임은 고스란히 학습지 교사가 진다. 연우가 사측과 맺은 '위탁사업계약서'는 책임은 있고 기본급도 수당도 연월차도 없는 특수형태의 근로다.

그 사회의 밖에서는 전혀 알 수 없었던 특수형태의 근로종사자,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는 근로자가 연우의 현재 위치다. 독립사업자, 좋게 말해 프리랜서라고 불리며 함께 일하는 교사들은 회사의 부당한 시스템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개인사업자지만 자신의 결정권은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실적을 위해 "가짜 입회와 퇴회 홀딩이 빈번"하다.

연우는 그곳에서 대학 동창이었던 수아를 만난다. 자연스럽게 하는 일의 어려움을 나누며 둘은 가까워진다. 학습지 교사로서의 현실, 노동 착취, 고용의 문제와 위탁사업의 병폐는 수아의 투신자살로 인해 표면으로 부상한다. 수아의 죽음과 회사의 사후 처리 과정에서 연우는 자신이 겪었던 부당함과 수아가 겪었을 어려움의 실상을 자각한다. 그녀가 남긴 일기(usb)를 읽으며 현실을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한다.

수아가 관리했던 과목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밝혀진 백 개가 넘는 '가라 입회', 수아의 투신은 모든 학습지 교사들이 겪는 부정 업무와 관련이 있음에도 회사는 수아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 그녀의 죽음을 결론짓는다. 경찰의 조사 결과도 회사의 입장 정리와 다르지 않다. 결국 수아의 죽음에는 산재보험금이나 보상금, 어떠한 위로금도 없고 악소문만 무성했다.

매해 20% 이상의 성장, 십 년 연속 '학부모가 뽑은 교육브랜드 대상 수상'으로 교육업계 최고의 기업으로 우뚝 솟은 수재교육은 아이들에 대한 큰 사랑을 표방하고 있다. 연구개발과 교사교육에 투자하는 신념과 교육에 대한 가치를 갖고 있다고 홍보하지만 현장을 뛰는 학습지 교사에 대한 이해는 없다.
 
학습지 회사는 가르치는 일도 힘든데 교재 정리에 회원 관리, 홍보 활동, 수금 등 많은 노동이 요구된다. 매달 말일 마감을 할 때마다 피 말리는 실적 경쟁을 해야 하며, 월초에 주어지는 실적을 못 채우면 관리자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계약해지를 감수해야 한다. 고소득 프리랜서라 홍보되는 교사들은 실적을 맞추라는 강요에 유령 회원을 만들어 회비를 대신 물고, 회원에게 회비를 받지 못하면 월급에서 자동으로 제한다. 개인사업자라는 허울로, 불합리한 조건을 지워 노동권의 사각지대에서 신음하는 이들이 바로 학습지 교사인 것이다.

수아의 죽음에 분노한 연우는 동료 교사 두 명과 사업국 국장을 만나서 수아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갑다. 결국 연우는 임용고시를 코앞에 두고 본사 앞에서 1인 시위에 돌입한다. 근로자지만 근로자가 아니며 지국의 교사들조차 외면하는 현실, 노조가 있지만 홀로 투쟁해야 하는 그는 사측으로부터 생명의 위협도 받는다. 동시에 그의 위탁계약은 해지된다.
 
연우는 피켓 폼보드에 붙은 종이를 뗀다. 피켓 문구가 적힌 붉은색 사이즈의 종이를. 연구는 그것을 북북 찢는다. 허공에 두 손을 들어 올리고서. 지나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연우에게로 쏠린다. 가던 길을 멈춘다. 연우는 종이를 갈기갈기 찢는다. 찢은 종이로 바닥에 글자를 쓴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사람들은 휴대폰으로 사진과 영상을 찍는다. 연우는 먹물을 찍어 쓰는 듯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쓴다. 사람들은 연우의 행위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숨죽인 가운데 셔터 소리만 들려온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종이 글자. '좀비들'

1인 시위가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시도한 퍼포먼스에서 그가 쓴 '좀비들'은 누구였을까? 1평도 안 되는 고시원 좁은 공간에 안식했던 수아였을까? 옥탑방에서 편의점 음식으로 만찬을 즐기던 연우였을까? 아니면 인간의 어떤 감정도 상실한 듯 보이는 수재 기업의 사람들이었을까? 어느 것도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누구든 좀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이 해시태그를 달아 SNS를 통해 '좀비 학습지'를 나른다. 우리 시대의 교육은 결국 무수한 '좀비를 위한 교육', 즉 '좀비 교육'이고 그러한 교육을 받은 좀비들이 살아가는 미래이자 두렵고도 무서운 좀비 시대로의 결말을 예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소설의 마지막은 다소 극단적이다. 방향성을 상실한 젊은 청춘들이 스러지는 안타까운 결말이다.

고시원 1평의 방에 이르도록 자신을 지키고자 애썼던 수아와, 희망 없는 세상이지만 내일을 당당하게 맞고 싶었던 연우의 저항과 좌절에서 우리 시대의 젊은이의 슬픈 초상을 보는 듯하다. 하면 될 거 같은데 안 되는 일이 많은 세상, 답이 없는 문제를 풀고자 노력하지만 결국은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될 수밖에 없는 세상.

"소설은 간접고용과 중간착취의 위험, 엄혹한 노동 억압을 겪고 있는 노동자의 현실을 얘기한다."(p.223 해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살을 자본주의 체제가 만든 비극적 현상으로 봤다.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많은 빈곤한 사람들이 어떤 도피 수단도 없는 처참한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스스로를 죽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양질의 일자리와 복지가 제공되는 등 삶의 조건이 개선되면 자살이 준다. 각자도생이 아닌 집단적 투쟁과 연대가 늘어나면 또한 자살률이 준다"라고 했다. 수아에게 약간의 복지가 제공되었다면, 연우의 투쟁에 동료들의 연대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고용노동부와 한국노동연구원이 공동 조사한 '특수형태 근로종사자의 규모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말 기준 기준으로 특고 노동자 수는 220만 9,343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체 취업자 2,709만 명(2018년 10월 기준)의 8.2%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한다.

참고로 2021년 7월 1일부터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직 종사자도 고용보험이 적용되고 있다. 또한 2022년 7월부터 산재보험 적용도 받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지금의 현실은 여전히 고용은 불안하고 청춘들은 극단으로 내몰리고 있으며 제2의 수아와 연우들은 아직 곳곳에 너무나 많다.

좀비시대

방서현 (지은이), 리토피아(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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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씁니다. 50대 후반, 남은 시간을 고민하며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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