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2 18:57최종 업데이트 22.08.12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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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이주자는 살아 숨 쉬는 자인가. 존 버거는 <제7의 인간>에서 이들을 가리켜 "불사의 존재, 끊임없이 대체 가능하므로 죽음이란 없는 존재"라 했다. 오직 노동하는 몸으로 기능하기를 요구받고, 표류함이 당연시 여겨지고, 존재할 권리를 국가의 허락에 구해야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와 난민의 현주소이다. 체류권을 '허가'받은 이주민들조차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제대로 획득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국가는 잔혹하고, 사회는 무심하다. 그럼에도 사람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일. 한국사회에서 살아 숨 쉬는 이주민들의 삶을 르포르타주로 담고자 한다.[편집자말]
고려인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재외동포를 일컫는 말이다. 오래전 연해주에서 살게 된 조선인들은 그곳이 옛 고구려 영토였던 것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불렀다.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이 삶의 터전을 일군 것은 1863년 고려인 마을이 생긴 것을 시작으로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 전까지다. 이 시기는 조선이 쇠락하고 일본에 주권을 빼앗긴 때와 일치한다. 이런 까닭에 연해주는 항일 운동의 거점 지역이기도 했다.

32개 마을이 생길 정도로 번창한 고려인 사회를 소련은 여러모로 이용했다. 일본과의 전쟁에 고려인을 징집하고, 혁명과 내전에 끌어들였다. 파란만장한 시대를 지나 일본이 연해주에서 철수하고 소비에트 체제가 시작되었지만 고려인에 대한 소련의 입장은 달라졌다. 소련은 고려인들에게 약속했던 정책을 지키는 대신 이들을 강제로 내쫓기로 결정했다.


연해주의 척박한 땅을 땀과 피로 일구며 지켜왔던 고려인들은 모든 풍요를 소련에 빼앗긴 채 삶의 터전을 떠나야 했다. 창문이 없어 널빤지로 문을 막아 컴컴한 상자 같던 기차를 타고 한 달이 넘는 시간을 갔다. 어떤 이들은 콩나물시루 같은 기차 칸에서 굶주림과 병으로 죽음을 맞기도 했다. 눈앞에서 가족이 죽는 일을 겪으며 도착한 곳은 카자흐공화국과 우즈베크공화국이었다.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이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강제 이주 열차는 바이칼 호를 지나고 이르쿠츠크와 노보시비르스크를 지나 카자흐공화국으로 들어갔다. 고려인들이 거쳐 간 6000km가 넘는 죽음의 길은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를 잇는 횡단 열차(9288km)와 노선이 겹친다. 누군가는 죽기 전에 한 번은 타보고 싶다는 러시아 횡단 열차가 86년 전 고려인들에게는 죽어도 타고 싶지 않았던 열차인 셈이다. 그때 열차에 실려 죽음의 길을 떠났던 고려인의 후손을 만난 건 장맛비가 한창인 여름이었다.
 

백한나 학생은 고려인 4세대로 이주 배경 청소년이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부르던 이름은 코밀라다. ⓒ 오시은

 
18세 한나

한나는 한국에 온 지 4년이 됐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고려인 강제 이주 때 우즈베크공화국에 정착했고, 그때부터 한나의 가족은 그곳에서 살았다. 한나가 태어난 곳도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다. 나이를 묻자 한나는 "만으로 18살이에요"라며 수줍게 웃는다. 4년 전 중학교 2학년에 편입한 한나는 현재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특성화고 중국어과를 다니고 있는 한나는 공부 얘기에 눈을 반짝였다.

"외국어에 관심이 있고, 외국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학교에서는 중국어와 영어를 배우고 있어요. 영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고, 중국어는 아직 배우는 중이에요. 한국어,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를 해서 4개 국어를 해요."

수줍으면서도 당찬 한나의 모습에서 긍정적인 에너지가 느껴졌다. 이주 배경 청소년을 생각할 때 흔히 갖는 편견이 있다. 한국말이 서툴다, 한국어를 못하니 공부를 잘하기 어려울 것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에서 왔으니 가정형편이 힘들 것이다, 따돌림이나 학교 폭력을 당하기 쉬울 것이다 등등. 모두 측은지심으로 위장된 편견들이다.

편견은 편견을 낳는다. 애초에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으면 그로 인한 갈등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편견들은 각종 통계와 수치, 나쁜 결과물을 바탕으로 당연시된다. 한나에게 이주민을 보는 편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한나는 자기 경험을 꺼내 놓았다.

"처음에는 학교에 외국인이 저밖에 없었어요. 함박마을(인천 연수구 소재로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사는 친구들이 다니는 중학교에는 고려인이 많은데,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없었어요. 학교 친구들이 제가 외국인이라고 관심을 많이 줬는데,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서 대화를 잘 못했어요. 아이들은 고려인에 대해서 몰랐어요. 해외 체류 동포가 뭔지도 모르고요. 그때 이렇게 모를 수도 있구나 생각했어요. 제가 역사 시간에 수행평가로 해외 체류 동포 이야기를 모아서 발표했어요. 아이들이 좋다고 얘기해줬어요. 그래서 공부를 더 많이 해서 고려인에 대해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친구들이 고려인에 대해서도 알고, 해외 체류 동포에 대해서도 많이 알아요."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풍경. 이곳에는 고려인 7천여 명이 살고 있다. ⓒ 오시은

 
한나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무심한지를 일깨운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말로는 다문화, 다문화 버릇처럼 말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은 미비한 수준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니 잘못된 편견만 굳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그렇게 고착된 편견은 기성세대에서 아이들에게 대물림된다. 편견에 대한 한나의 경험도 여기서 끝은 아니었다.

다문화 학생의 죽음

"나쁜 말 하는 애들도 있었어요. 한국에 왜 왔냐?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안 좋다는 말 하고 그랬어요. 그런 말 들어서 많이 속상했어요. 그때는 많이 울고 학교에 안 다니겠다고 했어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고 싶었어요. 그때 엄마가 그랬어요. 만약 이 일을 지금 해결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른 외국인 아이가 와서 똑같이 겪을 거다. 그러니까 이 일을 지금 해결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아빠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하고 상담 여러 번 하고 괜찮아졌어요.

애들이 그러는 거 이해도 됐어요. 나라마다 안 좋은 사람 있고, 좋은 사람도 있다고 생각해요. 학교 폭력이 없는 나라는 없다고 생각해요. 나라마다 학교 폭력이 있는데, 이거는 사람들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년 전에 러시아 다문화 학생이 괴롭힘 당해서 옥상 올라가서 자살했어요. 이런 것들이 없으면 좋겠어요. 문화 다양성 같은 거 교육하고, 사회 나가서 사람들이랑 잘 지낼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한나가 기억하고 있는 러시아 다문화 학생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추락사였다. 중학생들이 피해 학생을 옥상으로 끌고 올라가 폭행했고, 가해자에게서 벗어나려던 피해자가 균형을 잃고 추락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된 사건이었다. 이에 대해 당시 재판부는 "피해자가 느꼈을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렵다"며 가해 학생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풍경.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짐작할 수 있는 간판이 눈에 띈다. ⓒ 오시은


이주 배경 청소년이 한국 사회에 적응하고,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은 고단하게 여겨진다. 죽은 아이를 떠올리자 마주 앉은 한나와 수많은 이주 배경 청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한나가 우즈베키스탄에서는 편견이나 차별을 겪은 적이 없는지 궁금했다. 그곳에서 한나는 고려인으로 살았을 텐데, 우즈베키스탄은 고려인에 대해 차별을 하지 않는지, 다른 민족과 갈등을 겪지 않는지 알고 싶었다.

그에 대해 한나가 들려준 얘기는 또다시 편견의 한계를 생각하게 하는 얘기였다.

"우즈베키스탄은 문화 다양성이 넓어요. 한민족이 아니고 다민족이기 때문에 인종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은 없어요. 다른 문화에 관심도 많고요. 할아버지들이 처음 우즈베키스탄에 왔을 때 많이 힘들었대요. 집도 없고 음식도 없고, 기차에서 돌아가신 분도 많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살 방법을 많이 얘기했대요. 회의도 하고요. 그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서 같이 살게 됐대요. 우즈베키스탄은 고려인에 대해 같은 나라 사람인데, 전통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한나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편견이나 차별을 겪지 않은 것이 안심되었고, 남의 나라 땅에서 겪지 않은 일을 할아버지의 나라에 와서 겪은 것은 속상했다. 한편으론 이 모든 걸 유창하게 한국어로 말하는 한나가 대견하기도 했다. 낯선 나라에서 그 나라의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생존과 연결되어 있다. 최초의 고려인들이 낯선 땅 연해주에서 그곳의 언어인 러시아어를 익힌 것도 마찬가지다. 언어를 익히는 것은 그 사회로 편입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첫 번째 관문이다. 한나가 한국어를 익히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한국 와서 가장 힘든 게 말이 통하지 않는 거였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학교 다닐 때 한국어 공부했는데 그래도 힘들었어요. 처음엔 "안녕하세요"라고 말하고, 한글 조금 읽을 줄 아는 정도였어요. 말이 잘 되지 않아서 취미생활도 할 수 없고, 밤새워서 번역기로 공부했어요. 친구들도 번역기로 도와줬고요. 의사소통을 잘하게 된 건 1~2년 정도 걸린 거 같아요. 그 정도 지나니까 친구들과 얘기도 하고 수업도 잘 들을 수 있었어요. 친구들은 제가 러시아 말 하는 거 신기해했어요. 중학교 때 친한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저한테 러시아어 배웠어요. 친구가 러시아어 배우는 거 좋아했어요. 그 친구는 지금도 친해요."

낯설고 힘든 한국 교육

대한민국의 교육이 대학에 가기 위한 입시 교육이라는 것은 너무나 유명하다.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의 교육을 모두 경험하고, 여전히 학생의 위치에 있는 한나는 한국의 교육시스템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국 교육이 좀 심하다고 생각해요. 살면서 행복하게 지내는 게 중요하고, 그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한국 친구들 보면 스트레스 많이 받고, 자기 길을 찾는 것보다 대학을 위해 더 많이 공부하는 거 같아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자기 꿈을 위해 공부를 하는 거라고 배웠어요. 그런데 한국은 공부만 시켜서 힘들었어요. 꿈을 위한 공부가 아니라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하는 거라고 했어요. 한국 교육이 바뀌면 좋겠어요. 학생들이 자유로워지면 좋겠고요.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자살하는 학생도 많아서, 그런 게 바뀌면 좋겠어요. 저도 처음 2, 3년은 엄청 스트레스 받았어요. 그런데 상담도 하고, 진학 얘기도 많이 해서 마음이 조금씩 편안해졌어요."

한국 청소년에게도 버거운 입시 교육이 이주 배경 청소년에게는 얼마나 큰 어려움으로 여겨질지 짐작이 됐다. 소통의 어려움이 있으니 진로나 진학을 위한 정보를 얻기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이주 배경 청소년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지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한나의 의견을 물었다.

"진로 선생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그런 걸 혼자 찾을 때는 힘들었어요. 고려인 친구 중에 진학과 진로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는 친구들 많아요. 부모님이 일을 많이 해서 응원해 줄 수 없고, 의사소통이 힘들어서 포기하는 친구도 많아요. 꿈도 있고 똑똑한데 학비가 너무 비싸서 대학 입학을 포기하는 친구도 있고요. 학교 시스템에서 지원 받고 활용하면 좋은데 그걸 못하면 힘든 거 같아요. 언제 중간고사 보는지, 기말고사는 언제 보는지, 수행평가는 어떻게 하는지, 원서 같은 건 언제 쓰는지 이런 걸 잘 알려주면 좋겠어요. 그래서 멘토링 같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 풍경. 러시아 식료품을 판매하는 잡화점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 오시은

 
한국에 온 이유

낯선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이토록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익숙한 곳을 떠나기로 하는 것은 어떤 마음일지 생각해 봤다. 얼마나 많은 고민 끝에 한국에 오기로 했는지, 그 결정을 내렸을 때 한나의 심정은 어떠했는지 들어보기로 했다.

"2015년에 엄마랑 저랑 할머니가 한국에 여행을 왔어요. 그때 함박마을에 친척들이 살았어요.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서 엄마랑 얘기 많이 했어요. 한국에 오는 거 2년 정도 계속 생각했어요. 걱정도 되고,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긴장도 되고, 기대도 됐어요. 아는 친구들한테 한국 생활 어떤지 물어봤어요. 그때 할머니가 많이 응원해줬어요. 그래서 가보자고 마음먹었어요."

낯선 곳에서 살기로 했을 때는 걱정도 있지만 기대도 컸을 거다. 기대만큼 한국 생활이 괜찮은지 묻는 말에 한나는 "한국이 좋다"고 했다. 힘든 일도 있었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은 한나를 기대와 열정으로 이끄는 듯했다. 한나는 학교 공부도 하고, 식당에서 알바도 하고, 너머 센터와 지역사회에서 봉사를 하며, 이모의 속옷 가게를 맡아 운영 했다. 소셜미디어 마케팅을 배워서 오프라인과 온라인 매장을 운영하는데, 수익은 이모와 나눈다고 했다. 월급을 받는 직원이 아니라 어엿한 운영인인 거다. 수익을 나눈다는 말에 놀라는 나를 보고 한나가 되레 놀란다. 자기 몫의 수익을 갖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거다. 고려인이 많이 거주하는 인천 연수구의 함박마을에 대한 질문에도 한나의 긍정적인 생각들이 이어진다.

"인천에는 차이나타운도 있고, 송도국제도시도 있어서 외국인이 많은데, 함박마을에도 외국인들이 많고 러시아 음식도 있고, 축제도 하고, 역사적인 것들도 있어요. 그래서 함박마을도 지역의 특색을 살려서 관광지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아요. 사람들이 다문화를 경험하고 어울릴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한나는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대학에서 미디어학부를 전공하고 브랜드 매니저가 되는 것이 꿈이다. ⓒ 오시은

 
이쯤 되니 한나의 꿈이 궁금해진다.

"대학에 가서 미디어 콘텐츠를 공부하고 싶어요. 홍보 마케팅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알바도 거기 맞춰서 하고 있어요. SNS 홍보하는 게 재미있어요. 공부를 하고 글로벌기업에서 브랜드매니저를 하고 싶어요. 

담임선생님이 하는 말인데, 사람은 못 하는 게 없대요. 원하는 거 있고 목표가 있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엄청나게 하고 싶으면 다 할 수 있다고 했어요. 그 말이 좋고 힘이 돼요."

"나는 고려인 4세"

한나는 고려인 4세다. 한국에서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얘기는 까마득한 옛날 일에 속한다. 3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가족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한나는 어떨까? 한나가 고려인에 대해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밤마다 할아버지들 얘기 많이 해줬어요. 설날에 만두 만들 때도 얘기하고, 저녁 먹을 때도 얘기해줬어요. 명절이나 환갑, 결혼식 때 가족들이 모여서 어떻게 지내는지, 절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줬어요. 새해에 어른들한테 절하면 선물 같은 거 주셨어요. 돌아가신 분이 계시면 땅에 묻고 음식 만들어서 일 년에 다섯 번 정도 무덤에 가서 절을 해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한국에서 살았대요. 3.1운동 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한테 여동생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끌고 갔대요. 그래서 아주 못 찾았대요. 그때 여동생이 15살이었대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귀여웠대요. 할머니가 그런 거 잊지 않게 계속 얘기해 주셨어요. 지금도 우즈베키스탄에 살고 있지만 전화해서 얘기해 주세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학교 다닐 때는 역사 시간에 배웠어요. 교장 선생님도 고려인이어서 한국에 대한 것들 배웠어요. 한복도 입고, 김밥 만들기도 하고요. 한국에 와서는 너머 센터(고려인 너머-고려인 동포 지원센터)에서 배웠어요. 그때도 할머니한테 들은 얘기가 많이 도움이 됐어요."

 

인천 연수구 함박마을에 있는 너머 센터(고려인 동포 지원 센터)의 입구 ⓒ 오시은

 
인터뷰를 마무리 하면서 연해주에 처음 정착했던 고려인을 떠올려본다. 낯선 땅에서 삶을 개척해야 하는 마음이 어떤 것일지, 그 후손인 고려인 3세대와 4세대가 다시 할아버지의 나라로 돌아와 삶을 개척하기로 한 마음은 어떨지 헤아려본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품어야 할까?

마지막으로 한나에게 어디를 고향으로 생각하는지 물었다. 망설임 없는 한나의 대답이 축축한 여름을 맑게 한다.

"태어난 곳은 우즈베키스탄이지만 제 마음의 고향은 한국이에요."
 
덧붙이는 글 <이주민 르포 :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사람들>은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와 <오마이뉴스> 공동 기획으로 2021년부터 진행되고 있습니다.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국사회 민주주의의 심화 발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소박한 일들에 힘을 보태기 위해 김판수·염무웅 선생님, 송경동 시인, 민변 조영선 회장, 김소연 비정규노동자의집 꿀잠 운영위원장 등의 발의와 참여로 만들어졌습니다. '길동무 청년문학학교', '길동무문학·예술창작기금', '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 등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gildongmu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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