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10 21:29최종 업데이트 22.08.10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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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 [편집자말]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SF)이 무엇이냐고 누가 물어보면 1시간은 너끈히 이야기할 수 있다. 유명한 정의들 중 7가지와 그 내용과 시대 별로 바뀌어온 역사 등. 결론은 물론 '완벽한 정의는 없다'이다. 완벽하게 정의할 수 없음을 인정하되 계속 이해하고 분석하려고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문화적 성취를 정리할 토대가 쌓인다는 뜻이다.

정이담의 <순백의 비명>은 SF 농도가 옅어서 장르를 구별하기 아리송한 쪽이다. 표지에는 사변소설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은 추론해보는 소설 정도로 옮길 수 있는데, 본래 SF에 과학소설(Science Fiction) 외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나온 말이다. 그러다 20세기 후반에는 SF가 아니어도 비현실을 다루는 여러 장르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고, 나중에는 비평적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책 <순백의 비명> 표지 이미지 ⓒ 아작


<순백의 비명>은 SF 장르 관습에 들어맞는 부분이 적은 탓에, 사변소설이라고 쓴 이유가 이해가 된다. 보육용 로봇인 '로봇 이모'는 SF적인 요소지만 중간에 등장하는 '얼굴 없는 여자'들은 마술적인 요소에 속한다. 그래도 SF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미로 소개하고 싶었다.

"서로 엄마가 돼주면 어때"

주인공 선과 율은 보육원인 선우원에서 자란다. 선은 아기 때 어머니가 칼로 찔러댄 탓에 온몸에 흉터가 있다. 율은 인어처럼 합쳐진 다리를 타고나 어릴 때부터 걷지 못했고 여러 차례 큰 수술을 받았다. 둘은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원래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 들거나 죽게 내버려 두려 했다는 점을 기억한다.


<순백의 비명>에서 딸과 어머니는 서로 죽여야 하는, 양립할 수 없는 희생양의 관계다. 딸은 "희생자가 낳은 희생자", 어머니는 "여자의 운명을 전수한 여자들"이다. 배움에는 상처가 가득하다. 어머니의 칼, 어머니의 표정, 얼굴 없는 여자가 주는 공포, 제물이 제물을 부르는 희곡은 날카롭게 마음을 찌른다.

찔린 자리에는 하얗게 흉터가 남는다. 자기 이름이 붙은 이팝나무의 새하얀 꽃, 이팝나무 꽃처럼 가늘고 하얀 율의 이빨, 뼈가 산산조각날 때의 하얀 파열음, 화이트 노이즈가 연상작용으로 이어진다. 붙잡을 곳 없는 순백 사이에서 선과 율은 싸우고 배우고 의지한다. 선은 보육원 아이답게 사랑을 준다는 사람을 경계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지만 "안녕을 고하는 미래를 알면서도 한 번 더 믿고 싶은 마음을 놓지 못한다."

어머니를 부정하면서도 선은 율에게 "서로에게 응석을 허용하는 엄마가 되어주면 좋겠"다고 바란다. 율은 선에게 속삭인다. "그냥. 영원한 사랑도, 기다림도 없지만 마음을 참는 건 힘드니까. 서로 엄마가 되어주면 어때. 그런 생각이 났어." 둘은 서로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희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상대를 받아줄 수 있다.

투쟁하는 삶, 연대하는 삶 

둘은 기억 속의 어머니뿐만 아니라, 보육원 출신을 바라보는 차별에서도 자기를 지킨다. 보육원을 졸업한 '언니'는 아등바등 살다가 끝내 자살했다. 선은 언니가 남긴 일기장을 읽으며 보육원 안과 밖의 괴리를 배운다.
 
"언니는 동정의 대상이 되면서도 정말 필요한 조력은 얻지 못했다.... 자신들은 넉넉한 형편 아래에서 약간의 노력을 해 얻은 것이면서,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도 얻지 못한 걸 가지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그걸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 했다. 차별받을 만하다고 했다. 그게 현실이라고 했다. 자신들도 힘들었으나 극복했다고 자랑했다.... 사람들은 그걸 약육강식이라는 말로 포장했다. 자신들이 사는 세상은 짐승의 생태계가 아니라 사람의 세계이면서, 그 사실을 잊은 듯했다. 고개를 돌린다고 우리 삶이 없어지는 게 아님에도, 땅속에 목을 집어넣으면 세상이 안 보일 줄 아는 타조들처럼 구는 이들이 많았다.... 언니도 이런 마음으로 바깥에 나갔을까. 바깥이 요구하는 삶과 내 현실이 통합되지 않는 사이를 버티는 삶. 그러다 보니 죄다 메마르고 마비되는 삶." (92~93쪽)
 
싸움이 선우원을 둘러싼 비리 문제로 커지면서, 투쟁의 경험은 연대의 경험으로 확대된다. 선우원 아이들과 보육사 '이모'들은 함께 일상을 유지하려 한다. 이들 주변에는 거짓말하고 욕하는 사람들, 그리고 동정하며 다가왔다가 관심이 꺼지면 떠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분통을 터뜨리는 아이들에게 이모들은 말한다.
 
"괜찮아. 미울 수 있어. 화날 수 있어. 하지만 울화의 방향을 잘 봐야 해. 가까운 사람이나, 우리를 도우려 했던 사람에게 향하면 안 돼. 나름의 방식을 인정해야 해. 분노는 더 큰 곳으로 가야 해. 억압의 뿌리를 끝까지 질문하고, 그 자리에 더 크게 화내야 해." (211~212쪽)
 
삶 속에서 벌여야 하는 삶의 투쟁에 비하면, 나를 죽이려던 어머니를 죽이려는 칼날은 가벼운 것이다. 같이 싸우는 법을 배우고 나면 어머니와 같은 "한 여성이 떠맡는 일들"이 홀로 감당하기에 얼마나 버거운지 짐작이 간다. 선의 몸에 남은 흉터는 훈장이 된다. 선이 들었던 식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순 같은 초록색 물관이 보이는 이팝나무 파편이 남는다.

언니는 일기를 썼지만, 선은 자기 글을 기록이라고 부른다. 일기의 독자는 자신뿐이다. 기록은 왜곡되지 않기 위한 투쟁의 방법이다. "누구도 대신 써주지 않을 작품"이고 "누구도 대신 실행하지 않을 투쟁"이다. 선에게는 엄마의 사랑이 없어도 열 명의 이모들의 사랑이 있고, 율이 있고, 선을 따라온 보육원의 이팝나무가 있다. 그런 것들이 마음껏 울어도 안전한 공간을 만든다.


순백의 비명 - 정이담 장편소설

정이담 (지은이), 아작(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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