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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충사 신사당 내삼문의 배롱나무 ⓒ 임영열
   
흔히들 하는 말로 '화무십일홍(花無 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고 한다. 아무리 붉고 아름다운 꽃이라도 10일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라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요즘 시중에서는 5년마다 진보와 보수 정권이 뒤바뀐다는 의미로 '권불오년'이라는 말이 더 회자되는 것 같다.

중국 송나라 때 시인 양만리(楊萬里)는 '섣달 월계화 앞에서'라는 시에서 "그저 꽃이 붉어도 열흘을 못 간다(只道花無十日紅) 말하지만 이 꽃은 봄바람이 불지 않는 날이 없네(此花無日無春風)"라고 읊었다.
     
시인 양만리가 찬양한 월계화(月季花)는 중국 남쪽 지방에서 자생하는 강한 생명력을 지닌 야생 장미의 일종으로 개화기간이 길어 4월부터 9월까지 수시로 꽃을 피운다. 뿌리와 잎은 약용으로 사용한다.
 
포충사의 배롱나무 ⓒ 임영열
 
송나라 시인 양만리가 월계화를 사랑했던 것처럼, 조선 전기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한 쿠데타를 죽음으로 항거했던 여섯 명의 충신,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중 한 사람이었던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 유독 사랑했던 붉은 꽃이 있다.

"어젯밤 한 송이 떨어지고(昨夜一花衰)/ 오늘 아침에 또 한 송이 피어(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너와 마주하여 한 잔 하리라(對爾好衡杯)"

성삼문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어린 단종을 향한 변치 않는 일편단심(一片丹心)과 충절을 일백일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백일홍 꽃에 빗대어 표현했다. 지금쯤 충남 논산에 있는 성삼문의 무덤가에도 그가 사랑했고 그를 닮은 붉은 충절의 꽃이 만개했을 것이다.
 
포충사 신사당 내삼문 앞의 배롱나무 ⓒ 임영열
 
본격적인 불볕더위가 시작되는 요즘, 남도 지방을 온통 붉게 물들이는 꽃이 있다. 한 낯 폭염에도 화사하게 붉은빛을 뭉텅이로 토해내는 배롱나무 꽃이다. 배롱꽃은 나라꽃 무궁화와 연분홍 실타래를 늘여 놓은 듯 한 자귀나무 꽃과 함께 남도의 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다.

남도의 여름은 배롱꽃과 함께 한다. 배롱꽃이 피면 여름은 시작되고 배롱꽃이 지면 여름 가고 구름 높은 가을 하늘이 다가온다. 뜨거운 태양이 지글거리는 요즘 서원이나 향교, 사당, 사찰, 정자, 고택, 공원, 무덤 등 어디를 가나 붉디붉은 배롱꽃 세상이다. 심지어는 길가 양쪽을 온통 붉게 물들이며 드라이브족들을 유혹하는 거리도 여러 곳 있다.
 
포충사 배롱나무 ⓒ 임영열
 
100일 동안 피고 지기를 반복하는 목 백일홍은 배롱꽃, 자미목, 해당수, 양양수, 백양수, 간지럼나무, 파양수, 만당홍, 쌀밥 나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이처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나무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숨겨진 이야기가 많다는 방증이다.

그중에서 '쌀밥 나무'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게 됐을까. 남도지방에서는 이 꽃이 세 번 피었다 지면 비로소 벼가 익어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 나무라고 불렀다 한다. 배고프던 시절의 슬픈 이야기다.

배롱꽃은 개화기간이 길어서 여름 내내 7월부터 9월까지 백일 동안 남도 땅 어딜 가도 볼 수 있다. 백일홍에서 소리 나는 대로 '배기롱'이 돼었다가 '배롱'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원산지는 우리와 기후가 비슷한 중국 남쪽 지방이다. 지난 8월 초 광주에서 배롱꽃이 아름다운 문화유산 몇 곳을 둘러봤다.
 
포충사 신사당. 1980년대 유적 정화사업으로 지었다 ⓒ 임영열

임진왜란 때 두 아들과 순절한 의병장을 기리는 '포충사'

요즘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압촌마을 제봉산 기슭에 있는 포충사는 전국 각지에서 오는 사진 동호회 회원들로 붐빈다. 경내에 만개한 붉은 배롱꽃을 담기 위해서다. 국가명승으로 지정된 담양 명옥헌의 배롱꽃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들 입을 모은다.

포충사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처럼 밀집되어 있지 않고 넓은 구역에 듬성듬성 심어져 있다. 막 피어난 진홍빛 배롱꽃이 한옥의 지붕과 담장, 연초록 잔디, 짙푸른 소나무 숲과 강렬한 보색을 이루며 카메라맨들을 유혹하고 있다.
 
포충사 옛 사당 외삼문의 배롱나무 ⓒ 임영열
 
호남의 대표적 호국선열 유적지로 조성된 포충사(褒忠祠)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7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과 그의 두 아들을 비롯한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 등 5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호남의 유생들은 고경명 선생과 두 아들을 비롯한 충의의 인물들을 모실 사당을 건립하였고 1603년 선조는 '포충(褒忠)'이라는 액호를 내렸다. 1980년대 유적 정화 사업의 일환으로 새로운 사당과 유물관을 건립하였다. 경내는 옛 사당 구역과 새로 지은 사당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1592년 그해 뜨거웠던 여름, 금산성 전투에서 순절한 선열들의 변치 않은 붉은 마음을 닮아서일까. 포충사의 배롱꽃은 더욱 붉고 선연하다.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충장사. 경열사, 충민사와 함께 광주 4대 사우 중 한 곳이다.
 
포충사 옛 사당 내삼문 앞의 배롱나무 ⓒ 임영열
 
신라 말 비운의 천재, 최치원을 배향하는 '지산재'

포충사에서 멀지 않은 곳, 남구 양과동 지산 마을.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산 아래에 잘 꾸며진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어깨를 나란히 나란히 하고 있다. 검은 기와지붕과 붉디붉은 배롱꽃의 조화가 아름답다.

이곳은 신라 말 대학자이며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인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서원 '지산재(芝山齋)'다.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산재. 검은 기와지붕과 붉디붉은 배롱꽃의 조화가 아름답다 ⓒ 임영열
   
지산재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학문의 공간인 지산재 강당 ⓒ 임영열
 
1737년 영조 13년에 이곳에 영당을 건립하여 고운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다가 1846년 지산사를 건립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철되었다가 1922년 다시 세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영당과 내삼문, 강당인 지산재, 동재와 서재, 솟을대문이 있다. 전면에 학업의 공간을 배치했고 후면에 묘당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 시대. 6두품이었던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은 이를 극복하고자 열두 살의 어린 아들을 당나라로 조기 유학을 보낸다. 최치원은 독하게 공부하여 17살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지산영당의 배롱꽃. 단청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 임영열
   
지산영당의 배롱꽃이 신라 말 비운의 천재, 최치원 선생을 위로하고 있다 ⓒ 임영열
 
16년 간의 당나라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 신라로 돌아왔지만 골품제에 의한 신분 차별은 여전했다. 38살이 되던 해 시국 타개책으로 진성여왕에게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건의했지만 성골과 진골 세력들의 반발로 무산됐다. 신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한 최치원은 침몰해가는 신라를 뒤로하고 전국을 떠돌다 말년에 해인사로 들어가 여생을 마친 비운의 천재였다.

왜 이리 늦었던가... 늦게 돌아온 사람 효우당의 '만귀정'

이제 광주 서구 쪽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서구에도 배롱꽃이 아름다운 문화유산들이 여러 곳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드넓게 펼쳐진 송정 평야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극락강이 흐른다. 옛날 이 강에 배들이 드나들며 세곡을 운반하고 보관했던 큰 창고가 있었다. 광주의 서쪽에 있는 창고라 하여 '서창(西倉)'이라 불렀다.
 
늦게 돌아온 사람 효우당의 만귀정이 붉은 배롱꽃으로 뒤덮여 있다 ⓒ 임영열
   
만귀정은 광주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 임영열
 
풍요로운 농토를 가진 동하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인공으로 조성된 커다란 연못에 세 개의 정자가 일렬로 나란히 서있다. 연못에는 연잎들이 푸르고 정자들은 각종 수목과 붉은 배롱꽃으로 뒤덮여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만귀정(晩歸亭)'이다.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옛사람들의 우주관을 반영해 연못에 세 개의 인공섬을 만들고 정자를 지었다.
 
만귀정은 세 개의 정자가 일렬로 나란히 서있다. 각각의 정자는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 임영열
 
만귀정은 1750년경 조선 영조 때 남원에 살던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羽 1704~1774)가 이곳으로 이거한 후 후학들을 가르치고 자연과 더불어 여생을 보내고자 지은 정자다.

처음엔 초가로 지어진 것을 1934년에 후손들이 정면 측면 두 칸에 팔작지붕으로 다시 지었다. 지금도 이곳 동하마을은 흥성장씨의 집성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만귀정 인근 서창 한옥 마을에는 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들을 모아 참전했다 순절한 의병장 김세근 장군의 후손인 거사 김용훈(金容燻 1876~1948)을 기리는 정자 '야은당(野隱堂)'이 있다. 이곳 배롱꽃도 어느 곳 못지않다.
 
야은당. 거사 김용훈이 은거했던 곳에 제자들이 지은 정자다 ⓒ 임영열
 
서창 한옥마을에 자리한 야은당이 붉은 배롱꽃에 덮여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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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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