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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산 유해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성인과 아기(오른쪽)의 고무신
 불갑산 유해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성인과 아기(오른쪽)의 고무신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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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16일 전남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가정마을 뒷편 불갑산에서는 '유해 발굴 중간보고회'가 열렸다. 방공호 자리에는 유해 100여 구가 즐비했다. 기자들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유가족의 입에서는 "아이구, 어쩜 좋아"라는 탄성과 울음이 교차했다.

유해 발굴 책임자인 최인선 교수가 입을 열었다. "M1, 칼빈, 권총 등의 탄두로 보았을 때 가해자는 대한민국 군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어진 최 교수의 말에 참석자들은 귀를 의심했다.

"반지, 거울, 비녀 등의 유품은 여성들의 것입니다. 여기 고무신 보이죠?" 최 교수가 나무막대로 짚은 곳에는 고무신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작은 고무신은 아기의 것임이 확실했다. "이 작은 고무신과 구슬은 피해자 중 아기와 어린이가 포함돼 있음을 증명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오랫동안 함평군 불갑산 사건은 한국전쟁시기 '국군의 빨치산 토벌'로 여겨졌다. 국군 제11사단 20연대 박기병 연대장이 작성해 최덕신 사단장에게 보고한 <전투상보>에도, '적 1,005명을 사살했다'고 기록됐다. 때문에 불갑산에서 죽은 이들은 58년이 넘도록 공식적으로 '빨치산', '공비'로 취급됐다.

2008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위원회는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 사건' 진실규명하고, 1951년 2월 20일 개시된 일명 '대보름작전'의 희생자 절대다수는 민간인임을 밝혔다. 그리고 2009년 유해 발굴을 통해서 불갑산 희생자에 아이와 여성이 상당수 포함됐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71년 전 함평 불갑산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진실위의 불갑산 유해 발굴 현장 모습.
 진실위의 불갑산 유해 발굴 현장 모습.
ⓒ 진실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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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삭 임산부와 뱃속 아기마저도

1951년 2월 20일 오후 함평군 해보면 광암리 운암마을. "당신이라도 피난 가씨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랑께!" 만삭의 김재임(당시 27세)의 말에 남편 박순용(당시 34세)은 펄쩍 뛰며 손사래를 쳤다. "당신과 태어날 아기는 내가 지킬꺼구만." 금세라도 아기가 나올 것 같아 박순용은 가마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불을 붙여 아기 목욕물을 준비했다. 박순용의 제수 강갑순(당시 27세)은 미역을 씻고 있었다. 갑순의 등에는 아기 박일례(당시 1세)가 업혀 있었다.

강갑순이 안방과 부엌을 오가고, 박순용이 초조하게 마당을 서성일 때 군인 한무리가 들이닥쳤다. "여태 뭐하고 있어. 전부 나왓!" "아이고. 군인 양반. 제 아내가 아기를 낳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군인의 눈동자에는 핏줄이 서 있었다.

오전부터 불갑산에서 총소리가 울렸고 방금 전에도 여기저기서 '탕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박순용도 피난 가지 않은 사람들이 변을 당했다고 생각했지만 곧 아이가 나오는데 집을 떠날 수는 없었다. 박순용은 두 손을 모아 빌며 군인에게 사정했다. "군인 양반, 하루만 살려 주씨오." 하지만 처절한 호소도 통하지 않았다. "요 개×끼!" 군인은 총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결국 아기를 낳기 직전의 임산부와 동서, 한 살짜리 아기는 집 앞에서 총살 당했다. 그리고 박순용은 신광 방면으로 연행되는 도중 목숨을 잃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불에 타 숨진 외할머니

박순용과 같은 운암마을에 살았던 장재수(1936년생)는 그날 새벽 군인의 공격이 시작되자 운암마을 뒷산을 넘어 산안 위쪽으로 피신했다. 이후 용천사 앞 밀재를 지나 다음날 새벽엔 장성군 태청산까지 갔다. 그는 함평군 신광면 매형 집에 있다가 한 달 후에 마을로 돌아왔다. 집을 살펴보던 소년 장재수는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집안에 외할머니가 불에 타 숨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인쟈 그 뒤로 와서 집을 보니까, 집은 싹 불났는데, 외할머니가 거기서 방에서 타서 흩어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요렇게 요렇게 뒤져보니까 그 머리 덜 탄 자국이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외할머니가 여기서 돌아가셨구나 하고는, 외할머니 원 고향이 신광면 가덕리라니까요. 가덕리 친척한테 얘기를 했어요."(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유해발굴 보고서』)

그의 외할머니 방매실(당시 79세)은 워낙 고령이라 군경의 소개령에도 움직이지 못하고 집에 그대로 있었다. 집안에 노인이 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인들은 불을 질렀다. 

2월 20일 새벽 5시 군경토벌대는 불갑산 빨치산을 잡아들인다며 이른바 '대보름작전'을 개시한다. 그들은 거의 총 한 방 쏘지 않고 불갑산을 점령할 수 있었는데, 빨치산이 이미 산을 탈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군경은 불갑산 인근 마을을 이 잡듯 뒤져 마을에 있던 주민들을 현장에서 사살하거나 연행했다. 앞서 언급한 광암리 운암마을 임산부 김재임과 동서, 1세 아기도 희생자였다.

다른 곳으로 피난 간 이들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는데 박종한(당시 54세) 집안이 그런 경우였다. 운암마을 박종한 가족은 1950년 12월 소개령에 따라 해보면 산내리 송산마을로 피난갔다. 대보름작전 당일에도 그의 가족은 용천사 인근 구수재를 넘어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까지 갔다. 하지만 불행히도 경찰에게 발각돼 박씨 가족은 불갑지서로 사용된 불갑초등학교에 구금됐다.

이후 경찰 조사에서 박종한이 "아들이 경찰 편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자 지서장은 그에게 함평경찰서장의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박종한이 함평경찰서에 간 사이 예측하지 못한 일이 발생했다. 1951년 2월 24일 불갑초등학교에 구금돼있던 사람 중 일부가 탈출하다 붙잡힌 것이다. 결국 경찰이 살려 주기로 했던 박종한의 아내 심복치(당시 53세), 며느리 조복순(당시 20세)도 옴팍골에서 총살 당했다. 아들 박득수는(1938년생)는 나이가 어려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증언자 박득수. 운암마을 박득수 가족은 옴팍골에서 2명이 사살되었다.
 증언자 박득수. 운암마을 박득수 가족은 옴팍골에서 2명이 사살되었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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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빠져나간 불갑산엔 민간인들만

이처럼 제11사단 20연대 군인과 영광경찰서 소속 경찰은 2월 20일부터 25일까지 불갑산 일대와 인근 마을을 다니며 인간 사냥을 했다. 군경의 '대보름작전'은 왜 시작됐고, 희생 대상은 주로 민간인이었을까?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직후 빨치산들은 불갑산으로 모여들었다. 주봉인 연실봉은 해발 516m에 불과하지만 함평군 해보면과 영광군 불갑·묘량면 일대에 산자락이 형성돼 있고, 인근 산과의 연계가 용이해 빨치산 활동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근 주민들이 빨치산에 우호적인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연유로 UN군이 수복하고 인민군이 후퇴하던 1950년 9월 말부터 불갑산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인민군 점령기에 인민위원회나 여맹 활동을 했던 이들은 부역자 처벌을 피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 불갑산에는 당 조직과 유격대조직이 만들어졌다. 빨치산 불갑산지구에는 함평, 무안군당과 목포, 영광, 나주, 장성군당의 일부가 들어왔고, 각 군당은 생산유격대로 불리는 보급조직을 운영했다. 당 조직과 별개로 유격대조직도 있었다.

하지만 불갑산에는 빨치산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국군 제11사단은 불갑산 인근을 수복하면서 함평, 영광 등지의 수많은 민간인을 학살했다. 때문에 청·장년들은 학살을 피해 안전한 불갑산으로 피신했다. 또 불갑산 토벌 작전이 임박함에 따라 인근 주민들은 총격전에 대한 두려움, 우익 인사의 보복을 우려해 '일단 피신하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또 좌익의 강요로 입산하거나(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우익인사이거나 우익 성향인데도 경찰이나 우익과의 갈등 때문에 피신한 경우도 있었다.  

1951년 2월 20일 새벽 5시 불갑산 토벌작전인 '대보름작전'이 시작됐다. 제11사단 20연대 6개 중대와 연대 수색소대가 7개 방향에서 불갑산을 옥죄었다. 718명의 군인이 작전에 참여했고, 국군은 '적 1,005명을 사살했다'고 전과를 보고했다. 국군 피해는 전사 3명, 부상 24명에 그쳤다.

이렇게 국군과 빨치산의 피해 규모가 크게 차이가 났을까? 불갑산 빨치산은 500명, 350명이라는 설이 있으나, 실제 무장한 유격대원은 약 30~40명에 불과했다. 때문에 국군과의 전면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불갑산 빨치산 주력부대는 2월 20일 새벽 빨치산을 빠져나갔다. 국군은 총 한 방 쏘지 않고 불갑산 연실봉을 점령했다.

국군이 사살했다는, '적 1,005명'은 누구일까? 대부분 민간인이었다. 2009년 불갑산에서 발굴된 유해와 유품이 바로 그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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