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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해역과 한산도 일대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 장면.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해역과 한산도 일대 지도를 살펴보고 있는 장면.
ⓒ 미디어 경남N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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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3일 경남 통영한산대첩문화재단은 통영롯데시네마에서 영화 <한산: 용의 출현> 특별시사회를 개최했다.

<한산>을 만든 김한민 영화감독은 본격적인 개봉(7월27일)에 앞서 진행된 이날 시사회에 참석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이곳 통영에서 첫 시사회를 개최하게 돼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산해전 또는 견내량해전의 무대는 통영이 아니라 '거제'다. 영화 속에는 거제도와 한산도, 당시에는 생기지도 않았던 통영이라는 지명까지 표기돼 있다.

통영은 통제영을 줄인 지명이며, 통제영 최초 설립은 견내량 해전이 벌어진 후 1년 뒤인 1593년이다.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정이었다 하더라도 당시 이 해전의 중심, 그리고 역사는 오롯이 거제의 역사임에도 특별시사회는 통영과 부산에서 진행됐다는 점도 아쉽다.

한산도를 비롯해 현재 통영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적잖은 섬들은 1900년 진남군의 설치로 분리됐다가 1953년 거제군 복군 당시 돌려받지 못한 거제의 섬이다.

이 섬들은 거제도민들에게 점점 잊혀져 원래 우리의 섬이라는 인식조차 없는 상태다. 그러나 1200년간 거제와 함께한 역사만큼은 잊어선 안 된다.

1200년 함께한 거제의 섬 '한산'
   
우리나라 해전사는 물론 세계 해전사에서까지 회자되고 있는 견내량해전의 배경은 견내량과 한산도다.

이순신 장군이 견내량해전을 조선 조정에 보고한 장계인 '견내량파왜병장(見乃梁破倭兵狀)'에 따르면, 이 해전에서 조선수군은 전선 55척(거북선 3척·판옥선 52척)으로 일본함대 73척중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나포했다. 이후 조선수군은 남해안 일대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견내량 해전과 최초의 통제영이 설치된 한산도가 1900년까지 거제의 행정구역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심지어 1604년 통제영이 설치된 두룡포도 1617년까지 거제현의 땅이었으나 이후 고성현으로 이속됐다.

한산도는 통일신라시대 거제의 3속현 중 하나인 명진현 지역이었고 이후 조선시대까지 1200년 가까이 거제의 땅이었다.

한산도는 통영에서 30분이 걸리는 뱃길이지만 거제에선 10~15분이면 닿는 지형적으로도 거제와 가까운 섬이다.

통영시지(1999) 및 한산면 홈페이지 자료 역시 한산면 지역은 원래 거제의 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한산도와 일대 부속섬의 경우 통일신라·고려 시대는 거제현의 3현 가운데 하나인 명진현(현 거제시 동부면 지역), 조선 초기까지는 거제현 남면, 후기에는 거제부 둔덕면 7방에 속했다.

이후 한산도는 광무 4년(1900) 거제군과 고성군 일부 지역을 분리 독립해 설치한 진남군에 편입돼 진남군 한산면에 이어, 용남군(龍南郡) 한산면(1909)이었다가 1914년 용남군(龍南郡)과 거제군(巨濟郡)을 통합한 통영군(統營郡)의 한산면으로 유지됐다. 

거제군 복군... 되찾지 못한 거제의 섬

1949년 4월2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1914년 당시의 총독부로부터 국내의 행정기구를 축소·간소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거제도를 육지와 가장 가까운 통영군에 합병했고, 현재 거제사람들은 한결같이 거제도 복군을 갈망하고 있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는 내용이 실렸다.

당시 경상남도 초대 도의원에 이어 제2대 경남도의회 의장직을 맡게 된 진석중 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채오(李采五) 의원이 제2대 국회 제14회 제31차 국회 본회의(1952년 11월27일)에서 '시군의 설치와 군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안' 중 '통영군 행정구역 변경안' 의결까지 이끌게 된다.

이 안의 쟁점은 거제군의 복군에 원래 거제땅이었던 한산도를 비롯한 부속 섬을 포함시키느냐였다. 또한 한산도가 거제군에 포함되면 통영의 정체성을 우려한 통영 지역민의 반발이 강력해 쉽게 결정을 할 수 없다는 우려도 있었다.

당시 거제 출신 이채오 의원은 '이 안건의 목적은 원래 거제땅이었던 한산도를 통영에 포함시키느냐 마느냐가 아닌 거제군 복군이었으며, 한산도의 역사와 지리적 특성상 거제에도 매우 중요한 섬'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1952년 12월12일 대통령령 제271호로 거제군 설치법이 공포되고 이듬해인 1953년 1월 거제군은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독립하게 된다.

거제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한산도

제2대 국회 제14회 제31차 국회 본회의에서 서상호 의원(통영군 갑) 등이 '통영과 한산도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적으로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만큼 한산도는 거제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섬이다.

한산면의 주원방포(周原防浦, 현 추봉리 추원포)는 고려말 이래 왜구의 약탈을 막고 섬을 비우고 육지로 떠난 거제도민 환도의 첫 단추를 끼운 곳이다.

1419년(세종1) 5월 14일 상왕(태종)은 전군에 비상소집령을 내려 조선수군의 주력군을 거제 견내량에 집결시키라 명한다.

하지만 6월 17일 견내량를 떠나 출정한 이종무는 기상악화로 출발을 미뤘다. 이틀 뒤인 6월 19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가 돼서야 거제도 남쪽 주원 방포(周原防浦, 한산도 추봉리 추원포)에서 대마도 정벌을 위한 닻을 올린다.

당시 조선수군은 삼군도체찰사 이종무가 병선 227척과 병력 1만7285명을 이끌고 대마도로 출발했고 조선은 대마도 정벌 후 100여년간 왜구 침입이 없는 태평성대를 누렸다. 태평성대에 힘입어 섬을 떠난 거제도민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또 견내량전 이후 한산도는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조선수군을 총지휘하는 '최초의 조선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제2대 국회 제14회 제31차 국회 본회의 이후 70년 까까이 통영시의 관할구역으로 굳혀진 한산도 등 거제의 옛 섬들을 다시 거제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하기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되돌려받지 못한 거제의 옛 섬들은 거제와 함께 한 역사와 인연이 더 깊은 만큼 우리가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할 역사다. 그렇지 않으면 한산(閑山)은 거제사람들에게 한산(恨山)으로 기억될 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거제신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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