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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서 새롭게 발견된 단어가 있다. 하나는 추앙, 또 하나는 해방. 극 중 배우 손석구도 그렇지만, 실제 이 드라마를 보면서 '추앙'의 정의를 새삼 찾아본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 글을 쓰는 사람들이야 원래 자주 국어사전을 들춰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사전을 보게 만드는 힘이라니.

이후로도 한참동안 추앙이란 단어는 여러 곳에서 등장했다. 기사에서 칼럼에서 에세이에서, 인터넷 시대에 유행을 탄 언어는 삽시간에 각 분야로 퍼져 나갔다. 나는 이런 현상을 보면서, 작가는 '단어를 발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죽어가던 단어를 살릴 수 있는 펜을 쥔 사람, 그게 바로 작가가 아닐까.

제목에 실린 '해방'이란 단어도 새롭게 발견되긴 마찬가지였다. 해방은 사실 일제시대에 부르짖던 단어다. 일본으로부터 독립하고 해방되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외치던 비장하고 묵직한 단어가 바로 해방인 것. 과거와 함께 묻힐 뻔한 단어가 7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드라마를 통해 되살아나고 있다. <나의 해방일지>에서 한번,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또 한번.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주인공인 배우 김지원이 사내 동아리로 해방클럽을 결성하면서 해방이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동아리 멤버들은 각자 무엇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지를 생각하고 글로 쓰는 활동을 지속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도 해방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9화에서 배우 구교환은 자칭 어린이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등장해 종일 공부에 매여 살아가는 아이들의 구원자가 되고자 한다. 이 드라마에서 인상 깊었던 건 어린이의 입을 통해 해방이란 단어가 언급된다는 사실이었다.

해방이라는 단어가 가장 활발히 사용됐을 시점(일제시대)으로부터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어린 아이가 해방을 언급함으로써, 이 단어는 새로운 시대의 짐을 짊어지게 된다. 이 시대 역시 해방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주고 나아가 해방이란 단어 자체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드라마 안으로 들어가 그 아이에게 묻고 싶었다. 너에게 해방은 무엇인지, 왜 해방이 필요한지.

해방의 사전적 의미는 구속이나 억압, 부담 따위에서 벗어나게 함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해방이 쓰인 사례를 찾아보면 대표적으로 노예 해방, 8.15 해방, 아우슈비츠 해방 등 하나같이 묵직하기 그지 없는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해방은 절실한 것이며, 해방 이전의 속박 사회는 자유가 박탈된 억압의 시대다.

인권이 만들어지기 전의 사회는 해방이 더욱 절실했다. 피부색으로 인간을 구분짓고, 인종을 빌미로 학살을 하고, 문명사회를 만들겠다며 강제로 다른 문화권을 억압하는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과거 우리에게는 해방이 필요했다. 인권이 만들어지고 다양성이 인정되면서 인간 사회에서 해방이라는 단어는 조금씩 잊혀져 갔다.

죽어가는 대부분의 단어들을 아쉽게 생각하지만 해방이라는 단어만은 사라지더라도 상관 없었다. 해방이 사라진다는 건 속박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사회라면 단어 하나쯤 사라져도 괜찮았다. 하지만 세상은 해방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해방은 시대를 거슬러 다시 소환되고야 만다.  

어린이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해방이 필요한 시대를 살아간다. 과거보다 많은 것들이 진보하고 더 다양성을 인정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지만, 동시에 우리는 더 편협하고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성공과 안정의 길이 좁아질수록 이전보다 넓고 세분화된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비슷비슷한 길로만 들어서려 안간힘을 쓰게 된다. 

우물 안 개구리인 줄도 모르고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남들이 하는 것처럼 학원 뺑뺑이를 돌리며 아이를 키우고, 다음달 카드값을 걱정하며 직장으로 나간다. 아이들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해 일상을 포기하고, 어른들은 안정적인 자본을 지닌 삶을 위해 일상을 반납한다. 

그렇게 일상은 지옥이 되고 일탈로 만족하던 사람들은 이제 더이상 일시적인 일탈만으로는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결국 울부짖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완전하고 영구적인 해방이라고. 

사회가 발전하면, 세상이 더 다양한 가치들을 인정하면 인간의 삶 또한 더 자유로워지는 게 맞을 것 같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국가나 단체로 인한 속박은 줄었을지 모르나 사회 인식이나 분위기로 인한 속박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나와 남을 비교하는 문화, 조금만 다르면 손가락질하는 혐오의 확산, 먹고 살기가 점점 빠듯해지는 부의 양극화 등은 결국 인간을 인간 스스로 옭아매는 결과를 초래했다. 

국가가 대놓고 억압하지 않아도, 우리는 어려서부터 스스로 구속된 삶을 살아간다. 조금만 실수해도, 조금만 어긋나도 사회에서 이탈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은 우리를 더 한 줄로만 서게 한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고 나면 꼬일대로 꼬여버린 나를 마주하게 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명확히 알지는 못하나 확실한 하나만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원하는 건 무언가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라는 것.

2022년, 그렇게 다시 해방의 시대가 도래했다. <나의 해방일지> 방영 이후 지역별로 해방클럽을 모집하는 글들이 제법 많이 올라온다고 한다. 내 경우도 최근 글쓰기 모임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모임 이름을 해방클럽으로 정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해방은 이제 더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과거의 단어는 더더욱 아니다. 해방은 현재의 낱말이며, 누구나 듣기만 해도 숨통이 트이는 살아있는 말이다. 그렇게 해방은 시대를 반영하는 언어가 되었다. 갑자기 드라마에서 튀어나와도 더이상 낯설지 않은, 누군가가 대화 중에 언급해도 시대착오적이란 비판을 받지 않는 그런 단어가 되었다. 

갑자기 도래한 해방 열망의 시대,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무엇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하는가. 내가 원하는 해방은 어떤 상태인가. 이 시대의 해방은 과거의 해방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2022년에 왜 다시 해방의 시대를 맞았는가. '해방'이라는 단어는 왜 다시 등장했나.  

태그:#해방,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나의 해방일지, #드라마,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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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 『아직도 글쓰기를 망설이는 당신에게』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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