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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독립해 4인 가족이 마침내 제각각 1인 가구가 됐던 날. 훵~해진 집에 갑자기 냉장고가 엄청 거대해 보였다. 다가가 들여다봤다. 용량 870리터. 오 마이 갓! 1인 생활자가 감당하기엔 어마무시한 용량이 아닌가.
 
곧장 냉장고 파먹기가 시작됐다. 냉동실에 장기 투숙 중인 정체불명의 비닐봉지들을 털어내는 게 시급했다. 개별 포장된 홈쇼핑 조기랑 고등어, 언제부터 도사리고 있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곤드레나물, 시래기나물이 쏟아져 나왔다. 멸치랑 황태포, 고춧가루, 들깨가루에다 포장된 갈비탕, 쑥인절미, 가래떡에다 유효기간이 달랑달랑한 만두까지. 전쟁이 나도 한 달은 생존 가능할 만큼의 물량이다. 혼자 힘으로 다 먹어 치울 수 있을까.
 
냉장고가 홀쭉해질 때까지 장보기를 덜 하기로 결심했다. 아예 장보기를 안 할 도리는 없었다. 버섯이나 대파, 올리브 오일 같은 것들은 끊임없이 필요했으니까.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 냉장고는 만족스러울 만큼 홀쭉하지 않다.
 
내가 냉장고를 끌어안고 낑낑거리는 사이, 라이프스타일 슬림화를 단행한 친구들이 있다. 35년 직장 생활을 끝내자마자 중대형 승용차를 팔아버린 친구, "지하철이랑 버스가 서울만큼 잘 연결되는 도시가 세상에 어디 있니? 굳이 운전할 필요가 없어졌어. 퇴직자가 자동차 세금이랑 기름값을 내면서까지 차를 갖고 있으면 바보 같아." 단칼에 자동차를 끊은 그녀가 위대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외동딸을 시집보낸 후 살짝 우울증을 앓다가 거실의 잡동사니들을 내다 버리기 시작한 딸바보 아빠도 있다. 동네 친구의 남편이다.
 
"프랑스 근무 때 샀던 앤틱 거실장이 너무 키가 커서 우리 아파트 거실엔 안 맞았어. 그래도 차마 못 버렸거든. 근데 딸아이가 집을 떠나고 나니까 내 남편이 그걸 버리자는 거야. 온라인 중고마켓에 처분했어. 어찌나 후련하던지. 그 길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갔었다니까."
 
거실장을 시작으로 84㎡ 아파트에 켜켜이 쌓인 살림살이들을 거의 한 달 동안 정리했단다. 단칸 셋방 신혼 때부터 결혼 생활 40여 년간 사들여 아끼던 물건들이었다. 일부는 재활용 분리수거로, 일부는 온라인 중고 가게나 헌 옷 수거함으로 보냈다. 예쁜 그릇들은 친구들에게도 나눠 주었다.
 
"제일 좋은 게 뭔 줄 알아? 아파트 평수가 넓어졌어. 그 물건들을 끼고 살 때는 20평대 아파트처럼 느꼈거든. 근데 정리하고 나니까 원래 아파트 평수가 회복되더라. 뱃살이 쭉 빠진 것 같아. 기분 째진다."
 
이제부턴 빼기야
 
인생의 세번 째 30년을 가볍게 살기 위한 실천은 더하기보다 빼기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 살림살이도 줄이고 번거로운 관계도 줄이자는 제안이다.
▲ 베이비부머의 일상 다운사이징 인생의 세번 째 30년을 가볍게 살기 위한 실천은 더하기보다 빼기의 기술을 사용하는 것. 살림살이도 줄이고 번거로운 관계도 줄이자는 제안이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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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살이 빠지는 기분을 느껴보려고 나도 집안의 물건들을 정리 중이다. 틈틈이 오래된 옷들을 버렸는데도 옷장과 서랍장엔 뭐가 그리 많은지. 아직 미련을 못 버린 브랜드 정장 몇 벌을 비롯,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 쇼핑으로 늘어난 티셔츠와 바지들, 죽을 때까지 입어도 다 못 입을 만큼이다.

값싸니까 많이 사고 많이 쓰라는 자본주의의 속삭임에 속절없이 넘어가 버린 바보 1인! 앞 베란다 수납공간도 두 아이를 키운 결혼생활의 유물로 초만원이다.
 
젊었을 때는 참 갖고 싶은 게 많았다. 진짜 필요해서가 아니라 갖고 싶은 욕심 때문에 사들인 것들이 많았다. 젊은 날들을 지배했던 심리적 허기가 쇼핑 욕구로 해소됐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 갈팡질팡의 시대가 끝난 후 남은 것들로 내 다용도실이 넘쳐난다는 사실만이 엄연하다. 깊은 후회의 심호흡과 함께 주먹을 불끈 쥔다.

"그래, 젊었을 때 못 해본 것, 나이 먹은 김에 실컷 해 보지, 뭐. 지금까지 더하기만 했으니까 이제부턴 빼기야."
 
하루에 뭐든 세 개씩 버리라던 한 친구의 말도 생각났다. 정리정돈의 여신인 그녀의 아파트는 미니멀리즘의 진수를 보여준다. 부럽다. 그렇다고 내가 엄중한 미니멀리스트가 될 것 같진 않다. 여태까지보다 조금 더 간소하고 단순한 생활 모드로 진입하는 정도랄까.

한 가지 좋은 징조는 이제 사들이고 싶은 것이 적어지거나 없어지는 나이임을 깨닫고 있다는 거다. 제로 웨이스트는 내게 비현실적인 목표. 그저 덜 사고 덜 쓰는 인간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먹고 싶은 것도 줄어들고 있다. 나이를 먹으며 이미 소화 기능이 떨어졌다. 하루 세끼를 다 먹는 건 부담스럽다. 순전히 내 기준이지만 65세 이후엔 하루 2.4끼 정도가 적정량이 아닐까 싶다. 저녁을 6시 이전에 먹되 튀김이나 식용유를 많이 쓴 음식을 피하는 요령도 생겼다.

헤어질 준비일까
 
요즘엔 음식물 쓰레기뿐 아니라 플라스틱과 비닐 사용을 줄이려 제법 애쓰는 편이다. 이제부터라도 지구에 쓰레기 테러를 자행하지 말아야지. 그렇다고 지금까지 플라스틱을 별생각 없이 쓰고 버린 내 죄가 줄어든 건 아니겠지만. 다행히 최근 우리나라의 '시타'라는 중소기업이 세계 최초로 플라스틱 분해 기술을 개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인간관계도 최근 2년여 동안 구조 조정을 거친 듯하다. 코로나19 시국 덕분이기도 하다. 불필요한 사교계 출입을 줄이다 보니, 자연히 인간관계의 선택과 집중이 가능해졌다고나 할까. 이미 관계의 폭보다 깊이가 더 중요해진 나이니까.
 
한결 단순해진 올 후반기 실행할 계획이다.
 
1. 친구랑 한 달에 한 번, 당일치기나 1박 2일 여행 다니기.
2. 96세 친정엄마에게 더 많이 웃는 얼굴을 보여드리기.
3. 한 달에 한 번, 일 인당 1만 5천 원 안팎의 점심에 신세 진 선후배나 친구 초대하기

 
북한산 자락길, 대모산 둘레길도 틈날 때마다 걷고 싶다. 향기 좋은 커피도 많이 마시고 싶다. 가까이 있든 없든 인연을 맺은 모든 이들을 축복하고 싶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되 너무 훌륭하진 않기로!
 
이런저런 모드 전환은 결국 헤어질 준비일까. 언젠가 이별할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습관이 생긴 건 순전히 나이 먹는 덕분일 테니까.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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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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