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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명이 밝아올 무렵, 한 무리의 군인이 총을 사방에 갈겨대며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長橋)마을에 진입했다. 1950년 12월 6일 새벽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소속 군인 15~20명은 장교마을 7가구 집집마다 불을 질렀다. "살고 싶으면 마을 앞으로 나와." 몸을 사시나무 떨듯 하는 주민들에게 군인들은 욕지거리를 해댔다. 차가운 날씨만큼 공기는 얼어붙었다.

그날 새벽 강영주(당시 28세)는 큰아들 종탁이를 앞세우고 둘째 아들 종필(1948년생)이는 업은 채 마을 논으로 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이 옹기종기 서있는데 군인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나 죽는다"고 악을 쓰는 사람에다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비명이 잠잠해지자 군인들은 논을 다시 한번 휘저으며 발포를 했다. 확인 사살이었다.
 
장교마을 학살지에 선 안종필(형 안종탁이 학살)
 장교마을 학살지에 선 안종필(형 안종탁이 학살)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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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수라장에 강영주의 큰아들 안종탁(1945년생)은 즉사했고, 강영주는 옆구리와 허벅지에 총상을 입었다. 다행히 급소를 피해 목숨은 붙어 있었다. 군인들은 총을 맞고도 살았는지, 쓰러진 사람들의 머리를 군홧발로 차댔다. 강영주에게도 군인이 왔다. "탁." "읔!" "이× 아직도 살아있네." 군인은 방아쇠를 당겼고 총알은 강영주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녀의 옆구리를 뚫은 총알은 아기 종필의 엉덩이를 관통했다. 그런데도 아기 종필은 울지도 않았다. 옆에 쓰러진 강풍전의 어머니가 신음을 내자, 강영주가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날 새백 일곱 가구가 살던 장교마을에서 22명이 학살됐고 강영주 모자와 강풍전의 엄마만이 살아남았다. 다행히 강영주의 남편은 전날 형님 댁에 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른바 함평민간인학살의 서막이었다.

젖 빨고 있는 아기에게 총 쏴

그날 새벽 5중대 군인들이 7가구가 살던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장교마을과 80가구가 살던 동촌마을에 나타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UN군이 수복한 후에 북한군과 지방좌익 일부는 불갑산과 태청산에 입산해 빨치산 투쟁을 했다. 대한민국 군경이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해 불갑산 인근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었다. 

그러던 1950년 12월 2일 한새들전투에서 5중대 군인 2명이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고 산사람들은 12월 5일 '승전축하잔치'를 벌였다. 인근 마을 일부 주민도 참여해 마을 뒷산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꽹과리를 쳐대며 잔치를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부하들이 전사해 분노가 극에 달했던 5중대장은 산사람들 행위에 더 약이 올랐다. 5중대장 권준옥 대위는 불갑산·태청산의 빨치산 대신 인근 마을을 토벌하기로 마음 먹었다. 보복은 월야면 장교마을에서 시작해 동촌마을로 이어졌다.

동촌마을에 들이닥친 군인들은 초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논바닥 모이게 한 다음 기관총과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젊은 남자는 이미 피신하고 대부분 노약자와 여성 들만 남은 상태였다. 총격이 끝난 다음 병사 10여 명이 쓰러진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확인 사살을 했다. 두 살배기 박양님이 총 맞아 죽은 엄마 김순란(1929년생)의 젖을 빨았다. 아무리 빨아도 젖이 나오지 않자 아기는 앙앙거리며 울어댔다. 지나가던 군인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아기를 향해 발포했다. 

이후 군인들이 물러가고 논바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김순례가 서용기(1901년생)의 시신을 지나칠 때였다. 이미 죽은 목숨이었지만 겉옷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서용기가 너무 안돼 보여, 김순례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서용기에게 덮어 주었다.(김영택, 『한국전쟁과 함평양민학살』) 두 살배기 아기에게 발포한 군인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총상 입은 손주를 살리기 위해

5중대의 야만극은 해를 넘겨서도 계속됐다. 1951년 1월 12일 함평군 해보면 상곡리 모평마을에 군인들이 들어왔다. 110여 가구가 살던 이 마을은 파평윤씨 집성촌이었다. 농촌치고는 부촌이던 모평마을은 빨치산이 보급투쟁을 한다며 많이 다녀갔다. 모평마을이 불갑산에 가까워 당연한 일이었다.

산사람(빨치산)이 자주 출현하자 군경은 모평마을 주민에 소개령을 내렸다. 마을의 유력자들은 광주나 함평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면 먹고살 게 막막했던 다수 주민들은 마을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여기에다 해보면 광암리와 산내리, 대각리 주민들도 소개령을 피해 이 마을에 와있었다. 월야면 용정리 송정마을에 살던 장규옥도 처가인 모평마을로 피난왔다.

1월 12일 오전 9시 30분경 마을에 들어온 5중대 군인들이 주민들을 집 밖으로 내몰았다. 쌀과 이불을 이고 진 주민들이 쌍구룡 쪽으로 가는 도로를 꽉 메웠을 때였다. 인근 산에 설치된 기관총과 소총에서 불이 뿜었다. 

도로와 논바닥에 있던 주민들이 짚단 쓰러지듯 했다. 장규옥과 아내 윤손임, 장인, 장모가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총 맞아 죽은 윤손임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가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자식인 장종석(1947년생)이었다. 집 나이 다섯 살이지만 만 38개월의 아이였다. 자신도 총을 맞은 할아버지 장씨는 손자 종석을 살리기 위해 허둥댔다. 장씨는 자기가 입은 두루마기를 벗어 손자의 발을 감쌌다. 종석의 발은 총상 때문에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손자를 등에 업고 사돈집에 온 장씨는 몇 개월 동안 늙은 호박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늙은 호박의 속이 지혈에 좋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그렇게 귀한 손자 장종석을 살려놓고 할아버지 장씨는 일찍 세상을 떴다.

5중대의 인간사냥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1950년 11월 20일경부터 1951년 1월 14일까지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 해보, 나산면과 광산군 본량면, 장성군 삼서면 일대에서 빨치산을 토벌한다며 수많은 민간인을 집단학살했다.

명분은 빨치산을 도운 이들을 처형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학살된 이들의 성별과 연령대를 보면 부역과는 관련이 없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설령 빨치산을 도왔더라도 조사를 통해 법적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11사단 군인들은 법적절차 없이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특히 여성과 아이에 대한 살해는 용서받을 수 없다. 함평군 월야면 동촌마을 사례처럼 죽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두 살배기 아이에게 총구를 겨눈 것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다. 

군경이 빨치산 활동 지역에 소개령을 내렸다고 해서 불법학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1948년 제주 4.3사건 이후 한국전쟁기에 지리산 등지에서 이루어진 소개령은 현실성 없는 토벌정책이었다. 그 소개령은 주민들이 안전한 피난처로 격리(수용)되어 적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소개령이 되려면 안전한 피난처와 식량, 의복 제공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어떤 것도 주민들에게 제공되지 않았다.

혹자는 "전쟁 중에 누가 안전한 피난처와 의복, 식량을 제공하는가?"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1949년 제정된 제네바협정은 '적이라 하더라도 항복하면 포로로서 예우'한다고 못 박고 있다. 포로도 그럴진대 민간인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11사단 5중대의 함평학살은 '빨치산 토벌 중에 벌어진 불가피한 사건'이 아니라 인권 의식이 부재한 집단의 '인간사냥'이었다.

장교마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영주는 남편 안기준과 함께 마을에서 정미소를 했다. 정미소는 도정을 잘하기로 소문나 함평군청에 집결한 나락(벼)을 소구루마에 실어 옮겨왔을 정도였다. 농촌에서 정미소를 할 정도면 부유한 축에 속했고 강영주는 빨치산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외할아버지 집으로 피난 갔다가 11사단 5중대에 의해 부모와 외조부모를 잃은 장종석은 천애고아가 됐다. 자신을 살려준 할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자 그는 큰집으로 보내졌다. 꼴 베고, 소 키우고, 밥 얻어먹는 생활이 이어졌다. 학교도 못 다니고 기술도 없는 그는 농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10년 전에 콤바인에 팔이 잘렸다. 70여 년 전 전쟁터에서 다리와 발에 총상을 입었던 그가 60년 후 팔까지 잘려 나간 것이다. 하지만 장종석은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 역경을 헤치고 오뚜기처럼 일어난 그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하다.  
 
모평마을 현장에 선 장종석. 10년 전 콤바인 사고로 오른팔이 없다.
 모평마을 현장에 선 장종석. 10년 전 콤바인 사고로 오른팔이 없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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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함평군, #장교마을, #동촌마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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