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꼭 십오 년 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예전에도 면허증만 땄을 뿐 운전을 한 적은 없으니 그야말로 '찐' 초보다. 사설 연수도 받았지만 영 자신감이 붙지 않았다. 운전을 하기 전엔 화장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건 기본. 티셔츠까지 뒤집어 입고 나가며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날, 차 사고가 났다
드디어 '감'이라는 게 생긴 것 같다며 의기양양해진 어느 날, 사고를 내고 말았다. 공사로 인해 도로가 없어진 상황에서 무리하게 차선 변경을 시도하다 앞차를 들이받은 것이다. 영락없는 내 잘못이었다. 교통사고 중 백 퍼센트 일방 과실인 경우는 드물다는데 그 어렵다는 일을 내가 해냈다.
순식간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운전 경력이 짧고 사고를 수습해 본 경험도 없는 나는 벌벌 떨며 차에서 내렸다.
놀랍게도, 상대 차주는 무척 친절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화내거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우선 내 걱정을 먼저 해주신 것만은 분명하다. 덕분에 차분히 보험사에 전화하는 등 정신을 차리고 수습을 할 수 있었다. 필요한 조치들을 취한 뒤, 곧 나 혼자 남게 되었다.
문제는 끝이 아니었다. 도로 상황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한쪽으로 차를 옮기려는데, 내 차의 범퍼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니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게 아닌가. 질질 끌고 차를 몰면 위험할 것 같고, 그렇다고 힘으로 뚝 떼는 것도 일을 키우는 게 아닐까 싶어 이도 저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나타난 행인 한 분이 내게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닌데도 나는 그 말을 냉큼 알아듣고 얼른 운전석에 앉았다. 곧이어 그는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범퍼를 번쩍 들었고 손으로 '오라이, 오라이' 표시를 하며 내게 신호를 주었다. 덕분에 나는 차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내리자마자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외쳤지만 그는 이미 갈 길을 유유히 가고 있었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에 대고 몇 번이고 더 고맙습니다, 말했을 뿐. 딱히 보답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척 아쉬웠다. 그날의 사고는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생각보다 다정한 세상
김남희 작가의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를 보며 내가 타인의 호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호의를 주고받는 일은 동화 속 이야기만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생각보다 무척 다정한 곳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돌이켜보면 이토록 오래 여행을 해왔는데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건 그런 사소한 것들이다. 타인의 호의에 무심코 기대었던 순간. 누군가를 완전히 믿어버렸던 찰나. 잠시 벌어진 그 틈 사이로 스며든 번개 같은 공감과 소통.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내 삶을 이루었다." (8쪽)
여행 작가로서 살아온 저자는 코로나로 인해 발목이 묶이게 된 뒤, 막막한 순간을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의 호의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길이 열리고 그녀의 직업도, 인생도 더욱 충만해지게 되었다고. 그 진솔한 고백 덕분에 나 역시 내 경험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는 나이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좋은 기억들이 더 많다. 며칠 전엔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할 수 없어 맞으며 걷고 있는데, 낯선 여인이 다가와 우산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럴 때마다 매번 다짐한다. 내가 받은 것들을 보답하며 살겠다고.
"코로나가 내게 일깨워 준 건 나는 타인의 온기로 생명을 유지하는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혼자 살기에 적합한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건 일상의 공간을 혼자 점유한다는 것일 뿐. 사람에게 기대어 살아야만 했다." (144쪽)
일흔여덟의 나이에 십 킬로미터 마라톤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어머니 이야기도 인상 깊다. 점점 더 기록은 하향 경신되고 있고 심지어 꼴찌를 하는 날도 있지만,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계속해 대회에 출전 중이라고 한다.
늦어도 괜찮다
마흔 넘어 운전을 시작한 것이 너무 늦은 것 같다고, 이쯤에서 포기할까 잠시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늦은 지 이른지는 상대적인 개념일뿐더러, 설령 좀 늦었으면 또 어떻단 말인가.
여전히 초보운전을 벗어나지 못한 나는 도로가 무서울 때가 많다. 그때마다 되새길 일이다. 도로 위 운전자들 역시 다정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그걸 믿고 뻔뻔한 무법자가 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의 최선을 다하며 사람을 믿겠다는 것이다. 괜한 겁은 고이 접어두고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도로 위에 나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