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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네이터> 연속물에는 주인공(아놀드 슈워제네거)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주인공의 활약을 돋보이게 하는 숨은 존재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배우 이병헌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정답은 '스카이넷'이라는 인공지능 슈퍼컴퓨터입니다. 먼 미래에 기계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핵심을 이룹니다.

<터미네이터 제니시스>에서는 스카이넷이  '제니시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바로 세상의 모든 정보가 하나의 운영체제에서 통합되어 공유됩니다. 예컨대, 여기에서는 휴대전화가 컴퓨터와 자동차로도 연결되는, 그래서 삶의 모든 것이 온라인에서 언제든 연결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편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이 결국 인류의 파멸을 가져오고, 터미네이터와 그의 동료들은 제니시스를 막기 위해 사투를 벌입니다.

휴대전화를 강요하는 사회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지만, 21세기 한국사회에는 이와 같은 세상이 이미 와있지 않나 합니다. 요즘 휴대전화, 특히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거의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이 움직입니다. 편하고 좋습니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과학기술의 발달에는 명암이 있습니다.

저는 '모든 이는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다'는 한국사회의 잘못된 통념으로 그동안 차별을 받아 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에게는 휴대전화가 유용한 역할을 하기에 저는 불편을 감수하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다 2021년 8월, 코로나 예방접종 사전예약을 하며 차별을 크게 인식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가 없어 본인 인증이 필요한 인터넷으로 예약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인터넷 예약을 할 수 없는 경우 전화상담소(콜센터)에 연락하면 된다고 하여 어느 유선전화로 서울 상담소에 연락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휴대전화 번호를 요구했습니다. 본인 것이 아니어도 좋으니, 가족이나 지인 번호라도 알려주라고 했습니다. 원칙적으로 휴대전화가 없으면 예약을 할 수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예약은 했지만, 저는 휴대전화가 없어 받아왔던 차별을 더는 참기 힘들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냈습니다(관련 기사 : 휴대전화 없으면 사람도 아닙니까?). 상담원 개인에게 문제를 제기했다기보다, 그렇게 상담할 수밖에 없게 만든 과정 자체에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분도 예약을 해주고 싶으셨겠지만, 휴대전화 번호를 계속 요구해야 하는 상황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습니까.

2022년 5월, 인권위는 "휴대전화가 없는 경우 지인이나, 가족, 수용된 기관 등의 번호를 넣거나 또는 임의의 번호를 넣는 등의 방식으로" 예약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저의 진정을 기각했습니다(관련 기사 : 휴대전화가 없어도, 사람입니다).

21세기 한국의 새로운 소수자
 
국가인권위원회도 누리집(홈페이지) 진정 신청 과정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필수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누리집(홈페이지) 진정 신청 과정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필수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 국가인권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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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권위가 휴대전화를 강요하는 사회구조 및 이에 따른 차별을 '포괄적'으로 검토해주길 요청드렸습니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21년 방송매체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휴대전화(스마트폰 포함) 보유율은 99%로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휴대전화 사용은 전자파, 시력 저하, 중독 현상에 따른 건강 문제를 포함, 비용, 불법사찰 문제 등 조심스럽게 논의되어야 할 사안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회적 취약계층 가운데 일부는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국사회는 '모든 국민은 휴대전화를 쓸 수 있고, 써야 한다'는 그릇된 생각을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분위기입니다. 심지어 인권위마저 누리집(홈페이지) 진정 신청 과정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필수로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휴대전화 없는 이는 '21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소수자'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소수자의 권리와 환경도 존중돼야 합니다.

인권위는 결정문에서 제 사건을 "차별행위에 이른 것으로 보기 어려워 기각"한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국가인권위원회법 제2조 3항은 "평등권 침해의 차별행위" 사례로 "재화∙용역 … 공급이나 이용과 관련하여 특정한 사람을 우대∙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저는 휴대전화가 없어 인터넷으로 예약을 못 했고, 누리집 안내에 따라 상담소에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휴대전화 번호가 요구되었는데, 이는 휴대전화 없는 사람을 "배제∙구별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위는 "지인이나, 가족"의 번호를 넣을 수도 있다고 했으나, 이는 지인이나 가족이 없을 수 있는 경우를 간과하는 동시에, 전자우편 등의 다른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무시한 행정편의주의적 발상이라고 봅니다. 또한 "임의의 번호를 넣는 등의 방식"도 있다고 했지만, 이는 오히려 휴대전화 번호가 꼭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서, 휴대전화를 필수로 요구하도록 설계된 예약 과정의 모순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지 않은 이 사건의 처분은 부당합니다.

휴대전화 없는 사람도,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규정에 따라 인권위의 기각 결정에 행정심판을 청구합니다. 아울러 행정심판법 제35조에 따라 위의 사항을 보다 면밀히 논의하기 위해 인권위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자료 제출을 요청합니다. 특히 저는 관련 부처에서 휴대전화 비보유자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이 논의된 적이 있는지, 혹시 없었다면 앞으로라도 할 계획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쪼록 인권위 행정심판위원회가 휴대전화 없는 사람은 '소수자'라는 관점에서 이 사안을 적극 검토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이 문제를 '과학기술의 명암'이라는 큰 그림과 연결시켜 고민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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