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7.02 12:18최종 업데이트 22.07.02 12:18
  • 본문듣기

1949년 4월 13일 자 <조선일보> 기사 '죽을 죄 지었소' ⓒ 조선일보

 
정부수립 이듬해 친일파 문명기 공판에서는 역사문제도 거론됐다. 1949년 4월 13일자 <조선일보> 기사 '죽을 죄 지었소'에 따르면,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특별재판부가 주재한 이 소송에서는 한국 고대사 문제도 많이 언급됐다.

위 기사는 "조선의 박혁거세는 일본의 신무왕의 백부라는 엉뚜당뚜한 종조론을 제창하던 ○○ 협력자라는 기소문의 낭독에 이어 재판장의 사실심문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신문들의 용례를 고려하면, 식별이 안 돼서 ○○으로 표기한 두 칸에는 '부일' 같은 글자가 들어갔으리라 생각된다. '문명기는 한국 고대사를 얼토당토않게 왜곡한 친일파'라는 검사의 선언과 함께 반민특위 공판이 시작됐던 것이다.

박혁거세의 조카, 단군의 고모가 일본인?

조선 시장이 일본에 개방된 지 2년 뒤인 1878년에 출생한 문명기는 저서 <소지일격(所志一檄)>에서 일본인들이 초대 일왕(천황)으로 생각하는 진무(神武)를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조카라고 주장했다. 또 일본 왕실의 조상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는 고조선 시조 단군왕검의 고모라고도 주장했다.

문명기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기업인이었다. 그런 그가 책에 그런 내용을 담았으니, 무슨 근거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만도 했다. 그래서 재판장이 어디서 나온 이야기냐며 근거를 물어봤다. 이에 대한 문명기의 반응을 위 기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변명할 재료가 없습니다. 그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며 연겁어 피고 문명기는 재판장에게 머리만 꾸벅꾸벅대고 있다)."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죽을죄를 지었다고 했지만, 유무죄 판단이나 형량 산정에 영향을 줄 만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했다. 5월 9일 제3회 공판을 보도한 10일자 <경향신문> 2면 하단은 "전회에 이어 간단한 심문이었었는데 여전히 사실을 전부 부인하였다"고 보도했다. 이 재판의 결과에 관해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이렇게 정리한다.
 
"같은 해 10월 반민특위 특별재판부의 활동이 중지되면서 일반 법원으로 넘겨졌다. 6·25 전쟁이 일어나 재판이 흐지부지되면서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1993년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김경일 덕성여대 교수의 '문명기: 애국옹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는 "국방기 100대 기부를 결의하고 우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세대묘에 참배하여 이를 서약한 다음 조선으로 돌아와 강연 행각에 나섰다"고 설명한다. ⓒ 자료사진

 
문명기의 친일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자극적 발언으로 일제 지배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변명할 재료'도 없이 단군과 박혁거세를 일본 왕실과 연결시킨 것도 그렇고, 군용기 100대를 기부하겠노라고 통 크게 공약한 것도 그렇다.

1993년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김경일 덕성여대 교수의 '문명기: 애국옹 칭호 받은 친일 광신도'는 "국방기 100대 기부를 결의하고 우선 일본으로 건너가서 이세대묘에 참배하여 이를 서약한 다음 조선으로 돌아와 강연 행각에 나섰다"고 설명한다. 통 큰 기부를 공약한 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받드는 이세신궁을 참배하는 방법으로 관심을 집중시킨 그는 한국 곳곳을 다니며 '1군(郡) 1대' 헌납운동을 벌였다.


그는 군(郡) 단위뿐 아니라 가구 단위도 괴롭게 만들었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상징물을 담은 가미다나(神棚)를 집집마다 방 안 높은 곳에 비치해놓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자는 가미다나 가가비치(家家備置)운동을 식민당국과의 협조 하에 전개했다. 이로 인해 대부분의 한국인들을 성가시게 만들었으니 친일의 스케일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환갑에 "나는 27세" 주장한 '친일 광신도'

그는 일본인들이 쉽게 예상하기 힘든 의외의 방법으로도 자신의 친일을 증명했다. 우리 나이로 환갑이던 1937년에 그는 자신이 27세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1910년은 자신이 다시 태어난 연도라는 이유였다. 또 일본어에 대한 애착도 강렬하게 보여줬다. "만일 자식들이 조선말을 하면 '이 못된 비국민아!'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기절할 정도로 난타"했다고 <친일파 99인>은 전한다.

그는 집안도 일본식으로 꾸미고 가족들의 예법과 행동도 일본식으로 통일했다. 일본에 갈 일이 있으면, 일본식 정장을 입고 나막신인 게다를 끌면서 도쿄를 왕래했다고 한다.

문명기의 일본사랑은 41세 되던 해의 3·1 운동 때도 인상적으로 증명됐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기마 헌병이 되어 시위대 진압에 나섰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엽총으로 무장하고 단신으로 말을 몰아 시위 참여자를 위협하는 망동을 저질렀다"고 알려준다.

그의 적극성은 일본인들의 관심을 끄는 방식에서도 나타났다. 1949년 4월 25일 제2회 공판 때 재판장이 그에게 일제 치하에서 도의원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을 물었다. 그는 "내가 자동차 업을 할 적에 일인에게 고기 나브랭이를 보내서 환심을 샀으며"라고 대답했다.

'고기 나브랭이(나부랭이)' 같은 것을 선물해 일본인들의 환심을 사는 방식은 그의 젊은 시절에도 나타났다. 이것이 그의 사회적 지위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출생한 뒤 아버지와 함께 전국을 유랑하다가 경북 영덕군에 정착한 그는 20대 때 행상 일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소규모 생선 판매업으로 생활을 이어갔다. 그랬던 그가 그 뒤 제지업·수산업·자동차업·금광업 등을 통해 경북 제1의 부호로 성장했다. 이런 변화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도 일제 침략 초기에 먹을 것을 선물한 일이었다.

<친일파 99인>은 "당시 막 진출하기 시작한 일제 경찰과 친해질 수 있는 방도를 찾다가 영덕경찰서장의 집 앞에 자신이 팔던 커다란 방어를 매달아두고 이를 인연으로 경찰서장을 사귀었다"고 말한다. 이 일은 그를 '상인'에서 '기업가'로 변신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선물을 앞세우는 이런 방식이 일제 도의원이 될 때도 활용됐던 것이다.

방어를 선물하는 것으로 시작된 그의 친일은 나중에는 군함을 바치고 비행기를 바치고 금광을 바치는 등의 양상으로 스케일이 커져갔다. 생선 한 마리를 바치며 시작된 친일이 1943년에는 헌함 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아낌없이 퍼주는 모습에 식민 지배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지금의 국회의원 비슷한 중추원 참의직에도 임명하고 표창장도 주고 은배도 주고, 애국옹이라는 칭호도 하사했다.

식민지 민중들은 그의 이름 석 자를 빗대어 야만기(野蠻琦)라고 조소했지만, 일제는 스스로를 1910년생으로 주장하는 문명기를 옹(翁)으로 치켜세우며 훌륭한 식민지 백성의 모델로 선전했다. 그가 27세로 주장한 해에 발행된 1937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 2면 우상단에는 "조선의 애국옹 문명기씨"라는 표현이 나온다.
 

1937년 9월 19일 자 <동아일보> 기사 '경북호 헌납수속완료' ⓒ 동아일보

  
친일로 거액 축적... 처벌도 재산 반납도 없이 장수

그런데 그는 그냥 퍼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엄연히 사업가였다. 방어를 선물한 일이 계기가 되어 사회적 지위가 바뀐 데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의 친일은 공짜가 아닌 유료였다.

일례로, 가미다나 가기비치운동도 일종의 사업 아이템이었다. 친일문제 전문가인 역사학자 임종국의 1968년 8월 17일자 <동아일보> 5면 칼럼에 그 이야기가 거론됐다. 친일 문인들에 관한 이 칼럼에서 임종국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리고 문단인은 아니지만, 약빠른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서 친일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가미다나라면 왜놈들의 신을 모신 신주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팔면 돈벌이가 꽤 괜찮을 것 같았던 것이다. 총독에게 진언하니 국체명징(國體明徵)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대폭 찬성, 이리하여 집집마다 오백만 개의 가미다나를 만들어 팔았으니 개당 1원을 남겼대도 무려 오백만원을 벌었다는 얘기가 된다."
 
일제는 천손의 후예인 일왕의 통치가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을 이룬다고 선전했다. 문명기는 식민 당국에 접근해 그 같은 국체를 명징하게 하는 방법으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는 가미다나를 집집마다 비치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런 가미다나를 5백만 개 정도 팔았으니 적어도 500만원은 벌었으리라는 게 임종국의 추정이다.

문명기는 1934년에 금광 1개를 미쓰코시 재벌에 12만원을 받고 양도한 뒤 그중 10만원을 비행기 제작을 위한 국방헌금으로 사용했다. 이를 감안하면 일제강점기의 500만원이 얼마나 거액인지 짐작할 수 있다. 퍼주는 척하면서 큰 이문을 남겼으니, 상술의 관점에서 친일에 접근한 측면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친일을 통해 그런 거액을 축적하고 1968년에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대한민국은 그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다. 그의 재산 역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이 위원회가 국가귀속 대상으로 지정한 문명기의 재산은 경북 영덕군 강구면 화전리 1필지의 공시지가 669만 9천 원짜리 부동산에 불과하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