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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1975년 4월 8일 오전 대법정에서 개정된 민청학련 인혁당 관련사건 피고들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상고심 선고공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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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3일 열린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긴급조치 4호 및 국가보안법위반,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했다. 그리고 7월 20일 국방장관 서종철의 명의로 무기징역으로 감형한다고 발표했다.

수갑도 풀지 않은 채로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심판관 중에는 현직 판사도 앉아 있었건만 이같은 위법을 보고도 아무말도 안했다. 군법회의니까 판결의 공정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소송절차의 적법성만이라도 따져나가자는 결심을 한 변호인석에서 "법대로 수갑을 풀고 신문해 달라"는 쪽지를 법무사에게 전했다. 재판장도 수긍을 안 할 수 없었는지 신문 도중에 피고인들의 수갑을 풀게 하였다.

김지하 씨는 직업을 말할 때에 '시인'이란 말에 의도적으로 악센트를 두는 것 같았다. 장황하고 긴 공소장을 읽어가던 검찰관은 초반에 이미 힘이 팡긴듯 목소리가 축 처지더니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계속 씻어 올리다가 목이 탄다며 겸연쩍게 웃고는 물을 청했다. (주석 2)
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1974년 5월 27일 당국이 발표한 민청학련사건 명단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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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는 불의한 권력의 부당한 재판을 수용하지 않았다. 8월 11일 제출한 <항소이유서>에서 유신헌법의 원천무효를 주장했다. 긴 내용 중에 ①번과 ⑦번을 소개한다. 

① 본 피고인은 현 공화당 정권의 독재와 실정과 외세 의존적 경제정책 및 그 집중적 표현인 소위 유신체제, 유신헌법에 반대, 그것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유신헌법에 의해 발포된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에 근거하여 구성된 비상보통군법회의 자체에 반대합니다. 따라서 비상보통군법회의의 판결과 비상보통군법회의의 재판에 응하는 것도 역시 이에 불복 반대하기 위한 것임은 당연한 논리입니다.

⑦ 본 피고인과 학생들, 민주인사들은 전혀 무죄입니다. 즉 무죄 석방하기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재판부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본 사건을 심리한다면, 유죄는 본 피고인이 아니라, 인권을 유린한 측, 적법절차를 위반한 측, 조작을 행한 측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김지하는 국제적 인물이 되고 있었다. <오적> 필화사건에 이어 일본에서 소개된 일련의 담시로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들 사이에 그를 돕는 모임이 구성되었다. 프랑스ㆍ미국의 저명인사들도 지원에 나섰다. 

사형 구형이 있었던 7월 10일을 전후해서 일본을 중심으로 김지하를 돕기 위한 국제적인 움직임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하다. 일본에서는 이전의 '김지하 구원국제위원회'를 확대 발전시켜 '김지하를 돕기 위한 모임'을 발족시켜 16일에는 교포작가 (김석범, 이희성, 김시종)와 일본 작가 진계신언(眞繼伸彦)ㆍ남방의도(南放義道)들이 동경의 수끼야바시 공원에서 1차로 단식에 들어가는 한편 세계에 그의 구원을 호소하기 시작하다.

그리고 27일에는 쓰루미 슌스게ㆍ김달수 등이 2차로 단식에 들어가다. 이때부터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식인들인 프랑스의 사르트르와 보봐르, 미국의 하워드 진과 노엄 촘스키 등이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호소문에 서명하고 개별 국가별로 구원활동에 들어가다. 7월 29일, 일본 팬클럽의 대표 백정호사(白井浩司)가 서울에서 "김지하의 체포는 문학활동이 이유가 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발언을 해서 물의를 일으키다. (주석 3)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1974년 4월 25일자 <동아일보>
ⓒ 동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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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무한권력 욕망이 '민청학련사건'을 조작하고 유망한 청년들에게 용공의 올가미를 씌웠다. 오로지 국민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켜 유신체제를 유지하고자 해서였다. 

그런데 '민청학련'이라는 단체는 실재한 일도 없었고, 단지 학생들이 발표한 〈민중ㆍ민족ㆍ민주선언〉이란 유인물에 편의상 붙인 명칭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서 정부전복을 노린 불순 학생조직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연행된 젊은이들은 중정에서 억지 자백을 강요받은 끝에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그런 참혹한 사실이 군법회의 법정에서 폭로되기도 하였다. (주석 4)

김지하는 군법회의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한 때의 심경을 이렇게 밝혔다.

사형이 구형되었다. 나도 웃었다. 김병곤이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첫 마디가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영광입니다"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죽음을 이겼고, 죽음을 스스로 선택함으로써 우리들, 이 집단의 영생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들이 집단의 사슬에 묶인 가슴 속에서 비로소 타오르기 시작하는 참된 삶의 저 휘황한 불꽃을 감격에 차서 바라보고 있었다. 역사적인 순간이었다.(<고행 - 1974>에서)


주석
2> 한승헌, <긴급조치와 긴급인권>, <유신체제와 민주화운동>, 11쪽, 춘추사, 1984.
3> <작가세계>, 36쪽. 
4> 한승헌,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167쪽, 한겨레출판, 2009.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인 김지하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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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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