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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 11코스, 모슬포-무릉 곶자왈 사이 17킬로미터를 걷는다. 이 구간은 거의 묘지 투어다. 개인 묘지, 문중 묘지, 공동묘지와 마을 묘지까지, 끝없이 많은 무덤들 사이로 난 길을 걷는다.

제주 무덤의 비주얼은 강렬하다. 동그란 무덤을 사각형으로 둘러싼 검은색 돌무더기 담장 덕분일 것이다. 개인 무덤들은 감자밭이나 메밀밭 가운데 불쑥 놓여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생 땀 흘렸던 바로 그 감자밭에 그들을 묻은 후손들은 또 그 밭에서 땀 흘려 일한다. 그리고 아기들은 일하는 부모 옆에서 자란다.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는 제주 무덤
 
화산석 돌맹이로 사각형 담을 두른 제주 스타일 무덤들은 화산섬 제주의 자연사 스토리텔링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길을 걷는 이들이 죽음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좋은 시간을 갖게 도와주고요.
▲ 제주 무덤  화산석 돌맹이로 사각형 담을 두른 제주 스타일 무덤들은 화산섬 제주의 자연사 스토리텔링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입니다. 길을 걷는 이들이 죽음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는 좋은 시간을 갖게 도와주고요.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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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인들은 갈수록 죽음을 포장한다.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처럼 천장이 높은 실내 봉안당도 생겼다지. 이 서재 스타일 봉안 시설은 유골함 외에 유품을 넣는 가죽 책 모양의 고급 유품함도 제공한단다. 타깃은 대한민국 상위 5퍼센트. 살아생전 어떻게 살았건 간에 고품격 공간에 봉안된다면 그 생애는 품위 있게 마감된다는 '착시'를 전제로 한 것일까.

제주 무덤은 섬의 소문난 비바람에 거침없이 노출돼 있다. 죽은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 겪었던 폭풍우를 여전히 말없이 겪어낸다. 누구에게든 쓴맛, 단맛 제대로 맛본 한세상이었을 것이다. 울고 웃고, 때고 몸부림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낸 생애를 대과 없이 끝마친 후련함으로 그들은 여기 누워있을까?

죽음이 삶과 가깝게, 그것도 아주 가깝게 함께 있음을 늘 목격하고 실감하는 방식, 바로 제주 무덤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당근밭이나 감자밭에 묻은 후손들도 잘 알고 있으리라. 언젠간 그들 또한 검은 돌담 무덤 하나로 남으리라는 것을. 먼저 떠난 이들은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을까? 궁금하다. "사랑하는 아그들아, 천천히 재밌게 잘 살다 오렴." 살아있는 이들을 축복하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가 새들의 지저귐과 어우러지는 묘지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문중 묘지나 공동 묘지, 그리고 마을 묘지에 묻힌 이들은 서로 심심치 않을 것 같다. 나보다 잘 나가는 이들을 시샘하고, 사소한 일로 부딪치던 친척들이나 이웃들끼리, 무대를 옮겨서도 정답게 티격태격하지 않을까. 절로 웃음이 난다.

무덤 사잇길을 걷는 우리들에게도 죽은 이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있을 것 같다. 사는 게 아프고 고통스러워 느닷없이 비행기를 타고 육지에서 날아온 우리들이다. "인생에 별 의미가 있는 게 아니야. 넌 특별한 존재도 아니고 말이지. 특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롭고 괴롭잖아. 그냥 한 포기 풀꽃 같이 가볍게 살아봐." 먼저 살았던 선배들의 메시지가 들리는 듯하다.

갑자기 배가 고파진다. 신평 곶자왈 '비밀의 숲'으로 들어가려면 든든히 먹어둬야 한다. 일행을 따라 신평의 외딴 식당에서 돼지수육정식을 먹는다. 과연 제주 돼지고기, 맛있다! 물집 생긴 왼발까지 다시 힘이 솟는다. 함께 걷고 함께 밥 먹는 친구들이 새삼 고맙고 사랑스럽다.

곶자왈 원시림 속 모기 녀석의 따끔한 한방 공격을 받는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하이쿠가 있다. "얼마나 운이 좋은가. 올해도 모기에 물리다니." 고바야시 잇사 (1763-1827), 일본 에도시대 하이쿠 천재의 한 줄이다. 혼자 실실 웃는다.

몸은 낡아가도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되는 요즘

내 삶은 특별히 파란만장하진 않았다. 한국전쟁 후 태어나, 이보다 더 다이내믹할 수 없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살아 온 베이비부머 1인이니 오히려 행운에 가깝다.

앞으로 내게 남은 날 수를 세는 지혜는 없다. 그렇더라도 어떻게 남은 날들을 살아갈지 궁리할 수는 있다. 잘 살아낸 하루하루가 행복한 잠으로 이어지듯이, 하루하루 잘 걷다보면 마침내 해피 엔딩에 이르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금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욕심껏 연연하면서, 게으르게, 멋대로 살아봐야겠다.

너무 훌륭하지 않기. 후회나 자아 성찰 같은 것도 너무 많이 하지 않기. 왜냐고? 이미 지나간 것은 전생의 일이니까. 어느 누구도 지나간 일들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너무 자신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내가 저지른 잘못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오늘 낑낑대면서 17킬로를 걸어준 두 다리가 있어서 행복하다. 내가 직립 보행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내 무릎 관절이랑 발목 인대는 조금 부실하다. 거기에다 노안이 겹친 고도 근시와 비염까지, 하루하루 낡아가는 몸의 한계 덕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되는 요즈음이다.

새 봄에 돋아난 풀잎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색깔은 연두라고 생각한다든지.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갈수록 사랑스런 소음으로 들린다든지. 만날 때 마다 내가 밥을 사도 하나도 안 아까운 친구들이 있어서 마구 신이 난다든지. 장맛비를 보며 괜히 끓여 마시는 커피 맛에 좋아 죽는다든지. 정말이지 세상은 시시한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이 모든 것이 나이듦의 선물일 것이다. 고은 시인이 노래한 대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딱 그런 느낌이다. 앞으로의 날들,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몸은 계속 낡아가고 병들어 빌빌 대며 불쌍해지겠지.

그럴 때 제주의 검은 돌담 무덤을 떠올릴 것 같다. 지상의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부터 해방된 죽음을 많이 만난 오늘, 참 좋은 하루다.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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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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