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으앙~"

총소리에 아기 울음소리가 묻혔다. 이어지는 수백 발 총성에 아기는 혼절했다. 30분이나 지났을까. 경남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야산에는 백 명 가까운 흰옷 입은 이들이 눈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사방으로 흘러내린 피는 붉다 못해 눈이 시릴 지경이었다.

총소리가 잦아들고 군인들이 사라지자 다시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아귀지옥에서 살아난 아기 김운출의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갓 돌을 넘긴 아기 김운출은 엄마 등에 업혀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났다. 이외에도 김운섭(9세), 김미순(2세), 김경순(4세)이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살육이 벌어진 청연마을 바로 옆 마을인 내동마을에서 끌려왔다.

집단학살에도 살아남은 다섯 아이들

아이들은 엄마의 등과 품, 치마 속에 있어서 총알을 피할 수 있었다. 사실 총알을 피했다기보다 죽은 사람들이 인간방패 역할을 했다는 게 정확하다. 엎어지고 쓰러진 사람 속에 끼인 아이들 일부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폭설이 내린 다음 날인 1951년 2월 9일 청연·내동마을 주민은 아기와 어린이 5명을 제외한 84명이 숨졌다. 

음력 정월 초하루가 3일 지난 이 날이 마을 두곳의 초상날이 되었다. 한겨울이라 시신이 썩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신은 총탄으로 벌집이 돼 알아볼 수가 없었다. 또 한 집안이 몰살된 경우에는 시신을 수습할 사람이 없었다. 집안에 어른이 없는 경우 같은 마을 집안사람이 대신 수습하기도 했다. 

어린 정용수(당시 10세) 앞에 청연마을 정범용이 용수 엄마의 시신을 가져다 놓았다. 용수는 "엄마가 아냐!"라고 외쳤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용수 엄마가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정용수 엄마의 시신은 수습해 묘지를 썼지만 숨진 청연마을 아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로부터 아이들이 죽으면 묘지를 쓰지 않았다. 7명 어린이의 시신은 얼음이 버석거리는 땅을 파 떼무덤(합동묘)을 써야 했다.

"탄약 져날라!" 군인의 지시에 정두옥(당시 15세.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은 묵묵히 지게를 졌다.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을 토벌하는 작전에 동원된 것이다. 특히 거창군 신원면은 지리산 중산간마을에다 '빨갱이 마을'로 호가 났기에 군인의 명령을 거부하면 어찌 될지 몰랐다. 11사단 군인들은 신원면 일대 청년들을 모아 탄약을 나르게 했다. 

청년들이 부역을 한 다음 날 군인들이 청연마을에 들이닥쳤다. "한 명도 빠지지 말고 전부 모엿!" 마을 건너편 묏등에 주민 100여 명이 운집했다. "집안에 경찰이 있는 사람은 일어나!" 한 명이 일어나자 멀찍이 있던 이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이쪽으로 와."

다음은 군인 가족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제 지리산에 갔다 온 사람, 일어나" 이번에는 십여 명의 청년이 일어났다. 군인 심부름에 동원된 이들이었다. 나머지 50~60명의 주민은 인근 야산으로 끌려갔고 잠시 후 총탄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다.

인근의 내동마을은 사정이 좀 달랐다. 군인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피해 내동 주민들은 폭설이 내린 1951년 2월 8일 산으로 피신했고 주인이 없는 마을에 군인들이 진을 쳤다. 제11사단 제9연대 3대대 군인들은 소까지 잡아 포식을 했다. 다음날인 2월 9일 군인들은 거창읍 방향으로 행군을 했다.

그 와중에 군인들은 청연마을로 들어가는 내동주민을 목격하고는 뒤따라가 총질을 해댔다. 아기와 아이 5명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임을 당했다. 대체 왜 군인들은 84명의 주민들을 죽였을까? 전날 지리산의 빨치산은 신원지서를 습격했다. 이에 제11사단 제9연대장 오익경의 지시를 받은 3대대장 한동석은 다음날인 2월 9일 청연마을에서 주민을 집단학살했다. 84명 대부분은 노인과 여성,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빨치산이 아니었다. 근접사격이었기에 오인사격 가능성도 없었다.

당시 군인에게는 "(산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적군으로 간주하고 사살하라"는 명령만이 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죽이고 집과 식량은 불태워 버리는 견벽청야 작전이었다. 지리산에 탄약을 져나른 정두옥은 당시 거창읍에 일시 거주하였기에 학살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숙모 이명이와 사촌동생 정두성은 죽임을 당했다.

인민군으로 위장해 국회의원들에게 총질

청연마을 집단학살 다음 날인 2월 10일 3대대는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내동에서 밤을 보냈다. 이어 아침 일찍 과정리 면소재지로 가 대현리·와룡리·중유리마을 가옥에 불을 질러 태우고 가축과 양식을 강탈했다. 이 마을 주민을 과정리로 몰아가던 중 날이 저물자 주민 100여 명을 탄량골 하천 계곡에서 학살했다.

다음날인 2월 11일 군인들은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마을 주민 1000여 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이게 하고 군인과 경찰·공무원 가족을 골라낸 다음 이튿날인 2월 12일 517명을 박산골로 끌고 가 총살했다. 군인들은 증거를 인멸하려 시신 위에 석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 이렇게 제11사단 제9연대 3대대는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빨치산 토벌작전' 명분 하에 거창군 신원면 주민 총 719명을 학살했다. 사망자 중 15세 이하 어린이가 359명, 60세 이상 노인 60명, 여성은 392명이었다.

통비분자를 소탕했다는 11사단 군인들의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발발 80일 만에 전시 국회에서 공론화됐는데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무소속) 덕분이었다. 제2대 국회는 국방·내무·법무장관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국회 출석을 요청하고 진상을 규명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출석하지 않았고, "거창사건이 해외에 보도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해 시정케 해달라"는 서한만을 보냈다.

이후 거창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국회조사단'이 만들어졌다. 1951년 4월 3일 현장으로 가던 조사단은 인민군이 따발총을 쏴대는 통에 지프차를 돌려야 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회의원에게 총질을 한 것은 인민군이 아니라 11사단 소속 군인들이었다. 경남계엄사령부 민사부장 김종원이 9연대 수색중대 병사 40여 명을 북한군으로 위장, 국회의원들에게 위협 사격을 한 것이다.

이후 거창 사건으로 김종원은 징역 3년을, 오익경 9연대장과 한동석 3대대장은 무기징역 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을 1년도 되지 않은 다음 해 모두 특별사면했다. 특히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다시 등용돼 1956년 치안국장(현재의 경찰청장)에 임명되기도 했다.

거창사건특별법 제정... 가해자 사과는 없었다

거창 읍내에 방을 얻어 사는 김점규(1920년생)가 오랜만에 신원면 덕산리 내동 집에 들렸다. 그런데 그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기도 전에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점규 있는가?" 친구들이 부르는 줄 알고 김점규는 방문을 밀쳤다. 그러자 빨치산 일행들이 들이닥쳐 그를 뒷결박지었다. 마을 뒷산인 가막산 큰골짜기로 끌려간 그는 건너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1949년 8월 19일이었다.

김점규는 빨치산에게 왜 죽임을 당했을까? 김점규는 신원국민학교를 최우수생으로 졸업하고 산을 매입해 나무를 잘라 철도침목을 만들어 납품하는 사업을 했다. 영남지방 철도침목 납품권을 독점적으로 소유했기에 상당한 부를 이룰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거창에서 주거하거나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김점규의 아들 김진한(1939년생. 경남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는 우익단체 활동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점규가 학살된 데에는 빨치산에게 금전적 협조를 하지 않은 것이 주된 요인으로 추측된다.

한국전쟁 발발 전 지리산 산자락에 위치한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우익인사들이 간혹 빨치산에게 학살되었다. 변정재(가명) 전 거창면장도 피해자 중 하나였다. 그런 정황속에서 김점규도 죽임을 당했다.

1987년 민주화가 성취되고 유족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6년 거창 사건 관련 특별법인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위령사업을 벌이게 되었다. 이 법률에 따라 사망자와 피해 유족을 확정하고 거창군 내에 위령시설을 설치했다.

하지만 거창사건 가해자는 제대로 된 역사적 단죄를 받지 않았다. 아니 진심 어린 사죄도 없었고, 그들의 후손마저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후손이 피해자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길 바라는 것이 헛된 일일까?
 

태그:#청연마을, #거창사건, #빨치산, #신원지서 습격사건, #견벽청야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