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51. 5. 28. 소년들이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전차포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1951. 5. 28. 소년들이 38선 부근 6마일 남쪽 마을에서 전차포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
ⓒ NARA/ 박도

관련사진보기


[지난 기사] "아침에 보니 집 없어지고 큰 웅덩이만"... 끔찍한 증언들

피란길에 총을 맞은 복실 이야기

나는 6.25전쟁이 일어날 때 여섯 살이었다. 당시 경북 구미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북쪽에서 밀물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피란민의 행렬과 '쿵쿵' 쏘아대는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허겁지겁 피란봇짐을 쌌다. 첫째, 둘째 고모 댁도 바로 이웃에 살았기에 함께 떠났다.

우리 가족도 다른 피란민들처럼 가재도구를 남자들은 지게에 지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낙동강을 건너고자 남쪽으로 갔다. 하지만 이미 낙동강 일대를 점령한 인민군들이 가로 막았다.

"남조선 인민들, 미제 쌕쌕이(폭격기)한테 불벼락을 만나기 전에 날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라."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낙동강을 바로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우리가 광평동 사과밭을 지날 무렵 미군 '쌕쌕이' 공습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러자 피란민들은 가재도구를 팽개친 채 과수원으로 달려갔다. 남자어른들은 사과나무에 올라 마치 매미처럼 나무둥치를 껴안았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사과나무 그루터기 사이의 콩밭에 납작 엎드려 공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1950. 9. 20. 유엔군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벌거벗긴 채 검색하고 있다.
 1950. 9. 20. 유엔군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벌거벗긴 채 검색하고 있다.
ⓒ NARA/박도

관련사진보기

 
그때 난 미군 전투기의 무서움을 전혀 모른 채 제트기의 폭격 장면을 보려고 콩밭에서 일어나다가 할머니에게 뒤통수를 쥐어 박혔다. 한 30분 정도 요란한 공습이 끝나자 여기저기 피란민 시신들이 즐비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과수원에 숨은 탓에 무사했다. 우리 가족은 소달구지와 가재도구를 다시 챙기고는 금오산 오른 편 골짜기인 선기동 윗마을인 자갈 터로 갔다. 하지만 워낙 많은 피란민들이 그 마을에 몰려 이미 빈 방들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하는 수 없이 선기동 냇가에다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열다섯 식구 가운데 아이들은 절반이었고, 내 또래가 셋이었다. 우리 조무래기들은 피란이 뭔지도 모른 채 마치 소풍을 나온 듯 낮이면 시냇가에서 피라미를 잡거나 감자를 구워 먹는 등 마냥 즐거웠다. 그러다가 비행기소리만 나면 솔개소리에 놀란 병아리처럼 잽싸게 토굴 속으로 달려가 머리를 벽에 박고 공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미 B-29 폭격기들은 폭탄을 잔뜩 싣고 와서는 마치 염소가 똥 누는 것처럼 아무데나 폭탄을 마구 쏟았다. 이른바 '융단폭격'이었다.

피란지에서 밤이 되면 늑대 울음소리에 무서워 벌벌 떨었다. 그 무렵은 늑대나 여우들이 산야에 득시글거려 어른들은 밤이 되면 아이들을 한가운데 몰아 자게 한 뒤 어른들은 불침번을 섰다. 늑대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람이었다. 밤이면 총을 든 치안대원(보안대원)들이 피란민 잠자리로 찾아와 전지불로 사람의 얼굴을 비추면서 군인이나 경찰이 숨어있는지 살폈다.

어느 날 밤 그들이 우리 가족의 피란지로 접근하자 피란길에 같이 따라나선 둘째 고모네 개(복실)가 그들을 향해 마구 짖었다. 그러자 그들은 복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복실이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어둠 속에 사라졌다. 날이 샌 뒤 언저리를 살펴보니 금오산 쪽으로 핏자국 보였다. 그 핏자국은 점차 작아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 한밤중 복실이는 다리를 절름절름 절면서 우리 가족 피란처 잠자리로 찾아왔다. 우리 가족은 반가워 낑낑거리는 복실을 번갈아 안아줬다. 복실이의 뒷다리는 총알이 스쳐간 듯 피로 엉겨 있었다. 고모는 이불호청을 찢어 복실의 뒷다리 상처를 감아주면서 말했다.

"아이고, 우리 복실아! 찾아줘서 고맙다."

그러자 복실은 꼬리를 마구 흔들고는 계속 낑낑거리면서 고모에게 안겼다.
  
1950. 7. 29. 국군병사가 뜨거운 전우애로 부상병을 업어 후송시키고 있다.
 1950. 7. 29. 국군병사가 뜨거운 전우애로 부상병을 업어 후송시키고 있다.
ⓒ NARA/ 박도

관련사진보기

 
다음은 기자가 엮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에 수록된 문인들의 6.25전쟁 당시 체험담이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때 6.25 전쟁을 겪었다. 그 당시 나는 북한에서 고3 학생으로 군문에 동원돼 경북 울진까지 내려갔다가 바로 그해 9월 26일 추석날 저녁에 북상하던 한국군과 밤새 일전을 벌였으나, 박격포 중대에 속해 있던 나는 따발총 한 발도 쏘지 못한 채, 이튿날 9월 27일에는 후퇴 길에 들어서 태백산 속을 북상해 올라오다가 양양 수리 뒷산을 통해 내려오던 중에 포로로 잡혔던 것이었다. (중략)

한바탕 전투가 끝나 신병들의 인원점검을 했을 때는 오후 4시가 지난 뒤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부상자 말고 전사자의 시신은 네 구였다.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전사자의 등에 쓰여 있는 군번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흰 페인트가 채 마르기도 전에 전투를 했으니 모두 뭉개져서 어는 시체가 대체 누구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능선 아래 골짜기에 구덩이를 파고 전사자의 시신을 묻으려고 할 때에 마침 주먹밥을 담은 탄약상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조금 전에 취사반에 배치했던 그 늙은 병사가 올라오고 있었다. 혹여나 싶어 '여보, 이 전사자 중에 당신 아는 사람 있나 보오' 하자, 늙은 신병은 대번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분대장님 제 아들입니다. 이놈 우리 집 5대 독자였는데. 아이고, 우리 집은 이제 우짜노' 하는 데, 고지 아래서는 또 한 무더기 신병들이 올라오고 있더라는 것이다." - 이호철 '한국전쟁 속의 희비극'

 
1950. 7. 대전 근교, 국군 헌병들이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혐의자들의 골짜기로 데려가 2차로 뒤통수를 사살하고 있다.
 1950. 7. 대전 근교, 국군 헌병들이 형무소에 수감 중인 좌익혐의자들의 골짜기로 데려가 2차로 뒤통수를 사살하고 있다.
ⓒ NARA / 박도

관련사진보기



"전쟁이 나기 몇 달 전으로 기억한다. 읍내 경찰서 뒷마당에 잡아다 놓았다는 '빨갱이'를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경찰서 담벼락에 매달렸다. 어른들이 말하는 빨갱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괴물인가. 그러나 우리는 그날 경찰서 뒷마당에 포승에 묶인 채 앉아 있는 대여섯 명의 남자어른들을 보았을 뿐이다. 더 맥 빠지는 일은 그 빨갱이 속에 우리 이웃집 아저씨가 끼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해(1951년) 1월은 강원도에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그야말로 민족의 대 이동이 그 눈길 위에 길게 이어졌다. 우리 가족도 부엌 바닥에 세간을 대충 묻고 피란민 대열에 끼었다. 홍천 삼마치 고개에는 그 전날 저녁 적의 선발대 공격을 받아 죽은 수십 구 시체들이 눈 속에 그대로 나뒹굴고 있는 게 보였다.

눈길 속의 피란길은 하루 이십 리 이상을 걷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방을 얻기 위해 산 밑 마을을 헤맸다. 운이 좋으면 방 하나에 수십 명이 함께 잘 수 있는 집을 찾았지만 대부분 마당에 화톳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밤을 새웠다.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배가 고팠다. 배고픔은 전쟁의 또 다른 공포였다. 겨울 피란, 1․4후퇴 당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채 남쪽을 향한 그 도도한 흐름을 이룬 피란민 대열 속에서 나는 춥고 배고파 울었다." - 전상국 '내가 겪은 6.25 전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동북아역사재단뉴스> 6월호에도 실렸습니다.


태그:#6.25전쟁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