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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북핵의 근본원인으로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을 꼽는다. 남북분단은 2차 대전후 미국과 소련의 국제 질서 재편과정에서 비롯됐다. 한국전쟁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계기였으며 미소 냉전의 서막이었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대소 봉쇄정책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문서 NSC-68을 최종 통과시켰으며 국방예산을 네 배로 늘렸다. 이처럼 한국 전쟁은 현재 국제질서를 만들어낸 원인이었다. 때문에 한국전쟁을 "너무나 정치적인" 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국제질서의 편성과정을 추적하다보면 이는 191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에릭 홉스봄이 규정한 '제국의 시대(1875년~1914년)'에 미국은 남북전쟁 등 국가 정립에 여념이 없어 해외 식민지 개척에 뒤쳐져 있었다. 결국, 뒤늦게 뛰어든 제국주의 대열 속에 그들이 찾은 해법은 일종의 자유주의 무역 규범이라 할 수 있는 '문호개방'(1899년 발표)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열강들은 이를 승인했지만 일본만 반대했다. 또한, 미국은 1909년 남만주 철도에 대해 일본에게 공동사업 제안을 했으나 거절당하고 유럽 열강도 외면하는 굴욕을 겪었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부터 미국의 대일본 불신감이 커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처럼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통사적 접근과 지정학적 관점을 견지하지 않으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규명하기 어렵다. 나아가 남북분단과 북핵의 원인을 제대로 찾기 어렵다. 따라서, 1910년대 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일본의 관계, 전후 질서 수립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살펴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 - 기자 말 


북핵의 간접 원인, 일본의 폭주와 태평양전쟁
     
일각에선 북핵의 근본 원인으로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꼽는다. 사진은 대구시 달성군 용계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옆에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
 일각에선 북핵의 근본 원인으로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을 꼽는다. 사진은 대구시 달성군 용계리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 옆에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어머니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상.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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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중국에 대한 21개 요구로) 미국의 대일본 불신감이 결정적으로 악화됐으며, 이는 일본 외교사상 최대의 실책이다." - 고바야시 타츠오

한국과 북한은 분단형 결손의 불완전한 주권국가로 출발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미소 대립과 미국의 대일본 역코스 정책 등이 이어지면서 남과 북은 근대적 통일국가 형성의 기회를 놓치며 전쟁을 치르고 분단과 냉전이 고착화 됐다. 북핵의 근본 원인으로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이 꼽히는 이유다.

그러나 지정학적 관점에 따르면 남북 분단의 시초는 1910년대 미일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역사학자 월터 라페버는 그의 책 <충돌>에서 20세기 동아시아의 운명은, 1910년대 미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과 협력을 시작으로 결정됐다고 주장한다. 당시 유럽 열강은 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동아시아에 관심을 가질 형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서 가장 융성한 시기를 누리는 계기가 됐다.

미국은 일본과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며 중국과 시베리아 일대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의 동점정책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을 차지해야 한다"(시어도어 루즈벨트, 1900년 8월)라며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미국과 일본은 러일 전쟁후 가쓰라-테프트 밀약을 체결해, 필리핀의 미국 지배와 한반도의 일본 지배를 상호 인정한다. 이어 미국은 1908년 11월 루트-다카히라 협정을 맺어 일본의 조선 지배권과 만주에서 일본의 영향권을 인정해 줬다. 대신 이미 반식민지로 전락한 중국에 대한 공동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결국 1905년~1910년 미일의 협력으로, 한국의 운명은 일찌감치 결정됐던 셈이다.

협력하던 미국-일본이 틀어진 이유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 모습(자료사진).
  미국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 모습(자료사진).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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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미국과 일본은 1910년대를 거치며 갈등관계로 전환됐다. 일본은 만주를 지배하며 명실상부한 대륙국가로 정립하려는 목표 속에 본격적인 제국주의 세력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의 문호개방원칙과 충돌하며 훗날 태평양전쟁의 씨앗이 됐다.

제국주의 국가로서 일본의 자신감은 폭주(暴走)로 바뀌기 시작했다. 1915년 1월 일본은 영일 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의 조차지(租借地, leased territory)인 중국 산둥반도의 자오저우 만을 함락했다. 일본은 중국에게 국토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을 식민지화하려는 '21개 요구조항'을 제출했다. 굴욕적인 요구조건을 받아 들일 수 없던 중국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윌슨 대통령은 주베이징 대사로부터 이를 자세히 보고 받은 뒤 "우리는 중국을 방어해야 하며 일본의 요구가 타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며 미국의 문호개방 정책에 위반하는 어떠한 조약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뒤, 이를 일본에 통보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미일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은 미일 관계 악화가 심화되는 계기였다. 1918년 미국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약 6만 명의 체코 군단 구출을 위해 일본에게 공동파병 제안한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무시한 채 북만주와 시베리아 일대에 7만2000명의 대규모 병력을 파병했다. 일본이 시베리아 점령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이에 대해 대노하며 "일본에 대한 재정적 또는 물자적 원조를 중지할 것"을 명령하고 일본 정부에게 엄중 항의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 측은 그후 1921년 5월, 시베리아 점령에 의한 일본의 어떠한 요구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경고문을 보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과 일본은 산둥반도를 놓고 '충돌'했다. 산둥반도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안'이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부결되자 윌슨의 반감은 더욱 커졌으며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이 촉발되고 5.4 운동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팽창주의 야욕은 미국의 중국 주권옹호와 시장개방 정책과 부딪히게 됐고 두 국가는 서로를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폭주는 1931년 만주점령에 이어 1937년 중국 본토 침략(중일전쟁)으로 극에 달했다. 미국은 1920년대 대공황을 겪으며 일본의 폭주를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오히려 1930년대에 접어들며 대일본 유화정책으로 일관하며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바라보는 구경꾼에 불과했다.

당시 미국의 루즈벨트 정부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관련한 중립 법안을 제정하는 등 대일본 유화정책을 이어갔다. 심지어 1937년 10월 개최된 브뤼셀 회의에서 미국은 영국·프랑스 등이 제안한 대일본 무력행사 제안을 거부하며, 사실상 일본의 침략행위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당시 미국의 대일본 유화정책은 석유와 철강 등 전략물자의 대일 공급이 독점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폭주와 이를 눈감은 듯한 미국의 태도는, 끝내 '난징대학살(1937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학살)'이라는 미증유의 전쟁 범죄로까지 이어졌다. 또한, 당시까지 미국은 중국 내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유지한 채 일본과 보조를 맞추며 중국을 공동관리하고 있었다. 이는 중국의 대미 불신감이 커진 원인이기도 하다.

진주만 공습 발발... 전면적 대일본 공세의 시작
 
일본군국주의는 아시아·태평양 침공을 감행했다. 사진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USS 애리조나호가 격침되는 모습(자료사진)
 일본군국주의는 아시아·태평양 침공을 감행했다. 사진은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으로 USS 애리조나호가 격침되는 모습(자료사진)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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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미국의 대일본 금수조치(모든 부문의 경제교류 중단)가 단행되며 상황은 급변했다. 일본은 전략물자 부족을 타개하기 위해 동남아시아 점령에 나섰다. 그후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던 미군은 일본의 대공세에 밀려 퇴각하는 수모를 겪었다.

개전 초기, 일본에게 밀리던 미군은 이듬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기를 잡고 본격적인 일본 본토 포위 및 침공계획을 준비한다. 하지만, 유럽에서의 참전과 일본의 격렬한 저항은 미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1943년 1월 미국과 영국은 독일 항복 뒤 전면적인 대일본 공세를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주목할 것은, 1945년 2월 맥아더가 워싱턴 참모그룹에게 소련을 대일본 전쟁에 끌어 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그는 소련이 만주와 중국, 한반도에서 일본과 싸우는 틈을 타 미국은 일본 본토를 상륙해 전쟁을 조기에 끝내고 피해를 최소화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동시에 소련의 만주와 한반도 점령 등은 막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은 일본만 점령하면 된다고 밝혔다. 일본을 대소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군사전략적 접근이 깔린 셈이다.

맥아더의 의견을 들은 워싱턴 통합전쟁계획위원회는 <태평양전략>(J.C.S. 924/15) 보고서를 통해 일본 규슈를 침공하는 '올림픽 작전'과 간토평야를 침공하는 '코로넷 작전'을 입안했다. 통합참모본부는 이 작전을 승인하고 맥아더 등 미군 사령관에게 그 실행을 명령했다. 당시 작전은 1단계(1945년 11월 목표)와 2단계(1946년 3월 목표)로 나눠 각각 76만 명, 102만 명의 대규모 군사를 투입할 예정이었다. 일본 또한 전국토 옥쇄작전을 준비하며 거센 저항에 들어갔다. 미국으로서는 작전에 성공하더라도 엄청난 인력 손실을 피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에 앞서 통합전쟁계획위원회는 1944년 11월 <소련의 대일참전>이란 보고서를 펴냈다. 보고서에서는 소련이 전후 정치적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도 참전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탈린도 얄타회담을 앞둔 12월 해리먼 미국대사에게 러일전쟁 이전처럼 다롄과 뤼순의 조차, 만주 철도 운영권, 사할린 반환 등을 요구하며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참전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앞서 10월에는 "북부 조선의 모든 항구는 소련군에 의해 점령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애당초 북한 지역을 점령할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 참전에 따른 '정치적 조건'에 관한 비밀협정이 체결됐다. 이로써 태평양전쟁의 종식을 위한 정치적 조건이 갖춰지면서 미국은 한반도 북쪽의 소련 진주를 기정사실화하고, 일본 본토 점령계획과 전후 질서 수립계획을 입안하게 된다.

마침내 남북 분단의 비극이 본격화된 셈이다. 

[관련 기사]
[북핵과 한반도 평화①] 북한의 이례적인 선택... 한반도 평화·공존 해법은? http://omn.kr/1yk4a

덧붙이는 글 | 사)돌바내는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바라보며 미래를 내다본다"라는 모토로 출발한 진보정치의 플랫폼으로 정책생산과 입법활동, 정치활동을 하는 국회등록 사단법인이다. 이에 한국사회의 정치·사회적 내셔날 어젠다(국정과제) 형성에 일조하고자 매월 격주 정책칼럼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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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재단 기획위원으로 재직 중이며, 경기도의회 외교안보포럼 회장과 한신대학교 초빙교수직을 역임했다. 현재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한반도의 외교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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