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권력다툼, 복수, 모험은 창작물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특히 '막장'이라고 불리우는 키워드는 사람들의 이목을 잘 끄는 매력이 있다. 자극적인 내용이 흥미롭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모습이라 쉽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막장 이야기는 시대를 관통하여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인기를 끌었다. 기원전 431년에 집필되어 현재까지 끊임없이 재창작되며 그리스-로마신화 버전 <부부의 세계>라는 이야기를 듣는 작품이 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여자가 권력이 인생의 전부인 남자를 만났을 때, 비극적인 막장드라마의 소재로 이보다 더 적합한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6월 13일 방송된 tvN스토리 <책 읽어주는 나의 서재>에서는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를 주제로 서양고전학자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강연에 나섰다.
 
에우리피데스는 고대 그리스 3대 비극작가로 불리우며 '메데이아'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리스 로마 신화 최대의 악녀로 꼽히는 메데이아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을 작품으로 옮긴 것이다. 이른바 현대 막장 드라마의 원조라고 불릴만한 메데이아의 이야기는 배신을 당한 여자의 처절하고 끔찍한 복수극으로 요약된다.
 
당시 비극경연대회에 메데이아를 출품했던 에우리피데스는 당시에는 3명 중 3위에 그쳤다. 에우포리온, 소포클레스 등 당시 경쟁자들의 면면이 쟁쟁하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당대인들의 시각에서 보기에도 지나치게 잔혹한 이야기에 거부감을 느껴서가 아니었을까.
 
모든 불행의 시작은 이아손과 메데이아의 잘못된 만남에서 비롯됐다. 이아손은 본래 이올코스(현 그리스 아테네 볼로스 지역)의 왕자였다. 이아손의 아버지 아이손이 의붓형제 펠리아스에게 왕위를 빼앗기며 이아손은 위기에 처한다.
 
아이손은 아들이 펠리아스의 표적이 될 것을 우려하여 반인반마 켄타우로스족의 현자인 케이론에게 이아손을 맡겼다. 이아손은 "내가 빼앗간 자리를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이올코스이 왕이 될 사람은 너다"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자신의 운명이자 신이 맡긴 사명으로 여기며 자랐다. 이아손에게 아버지로부터 주입받은 '권력을 찾아야 한다는 욕망'은, 곧 이아손의 전부가 되어버렸다.
 
이아손은 왕위를 되찾으러 이올코스로 돌아오는 길에 인간 노파로 변신했던 여신 헤라를 우연히 만나 도와준 일로 그녀의 마음을 얻게된다. 제우스의 아내이자 권력의 여신 헤라는 이아손의 수호신이 된다.

이아손은 펠리아스를 만나 왕위 반환과 아버지의 석방을 요구한다. 펠리아스는 그 조건으로 수호성물인 콜키스의 황금양털을 가져오라는 과제를 제시한다. 이 황금양털의 정체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사금이 많아 물에 양털을 씻으면 사금이 붙어 황색으로 변한 것이 유래일 것이란 설이 유력하다.
 
이올코스에서 콜키스까지는 흑해를 끼고 2천킬로미터가 넘는 먼 항로에, 무시무시한 용이 황금양털을 지키고 있는 관문을 넘어야 했다. 펠리아스는 이아손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속셈이었지만 이아손을 이를 알고도 제안을 수락한다. 이아손은 아르고호라는 거대한 배에 헤라클레스, 오르페우스, 아스클레피오스 등의 그리스의 여러 영웅들을 모아 원정대를 결성한다.
 
이아손의 원정대는 갖은 역경과 고난을 딛고 마침내 오늘날의 조지아의 항구도시 바투미 지역에 해당하는 콜키스에 도착한다. 콜키스의 왕인 아이에테스는 바로 메데이아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이에테스는 황금양털을 내 줄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온갖 불가능한 미션들을 요구하며 이아손을 절망하게 했다.
 
이아손의 수호신 헤라는 한 가지 꾀를 낸다. 사랑의 신 에로스를 통하여 사랑의 화살을 메데이아에게 쏘아서 이아손과 사랑에 빠지게 한 것. 이아손에게 흠뻑 빠진 메데이아는 황금양털을 구하는 것을 돕는 조건으로 자신을 아내로 맞이할 것을 신에게 맹세하라고 제안한다. 절망에 빠져있던 이아손에게 메데이아는 유일한 구원의 손길이나 마찬가지였고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황금양털을 얻는 데 성공했고 그녀를 데리고 함께 귀국길에 오른다. 분노한 아이에테스는 군사를 이끌고 추격에 나섰는데, 사랑에 눈이 먼 메데이아는 만약을 대비하여 데려온 남동생을 살해하고 시체를 토막내어 한 부분씩 바다에 뿌리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충격을 받은 아이에테스는 시신을 수습하기 위하여 추격을 중단한다. 메데이아는 이제 이아손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괴물로 변해 있었다.
 
이아손은 황금양털을 갖고 이올코스로 귀환했지만 펠리아스는 약속을 깨고 왕위를 돌려주는 것을 거부하고 이아손을 핍박한다. 이에 다시 메데이아가 나서서 펠리아스의 딸들을 부추겨 마법의 약으로 아버지를 젊게 만들어주겠다고 속여서 아버지를 살해하게 만든다. 그리고 왕이 되고 싶었던 이아손은 그런 메데이아의 행동을 방관했다.

하지만 이아손은 끝내 왕이 되지 못했다. 권력욕에 지배된 이아손, 그런 이아손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소유욕에 지배된 메데이아는 이올코스인들의 반감을 사서 결국 추방당하고 만다.

메데이아와 이아손은 고향을 떠나 코린토스에서 정착하여 두 아이를 낳고 살았다. 그런데 코린토스의 왕 크레온은 유부남인 이아손을 자신의 딸 글라우케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아 왕국의 후계자로 만들려고 한다.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거절해야 하지만 크레온에 제안에 솔깃한 이아손은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메데이아는 당연히 크게 분노하며 "불의한 일을 저지르면서 말은 번지르르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 큰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며 남편의 배신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권력을 차지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이아손은 자신의 선택이 가족을 위해서도 불가피했다고 변명했다. 메데이아의 능력을 잘 알고 있던 크레온왕은 행어 자신의 딸에 보복이 미칠까 두려워 메데이아와 두 아이를 추방하려고 했다.

곤경에 몰린 메데이아는 자신은 떠날 것이며 심지어 아이들을 공주에게 부탁하고 선물을 전하기도 했다. 엄마로서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고 남편에 대한 복수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는 정작 메데이아의 잔인한 복수를 위한 서막에 불과했다.
 
메데이아가 공주에게 선물한 화관에는 마법의 약이 발라져 있었다. 공주는 독에 중독되었고 머리는 유혈과 불길에 휩싸이며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딸을 구하려던 크레온 왕도 공주의 손을 잡자 같이 불길에 휩싸이며 최후를 맞이했다. 공주가 마지막으로 몸을 던졌다는 샘은, 코린토스의 아폴로 신전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화의 영향을 받아 글라우케 샘으로 불린다.

메데이아의 마지막 복수 대상은 놀랍게도 이아손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였다. 메데이아는 자신의 배로 낳은 두 아이를 살해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복수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배신자는 이아손인데 왜 죄없는 아이들을 희생시킨 것일까. 이아손을 죽이면 그의 고통은 끝이 나지만,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고 이아손만 남으면 평생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권력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아온 이아손에게 두 아이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보루이기도 했다. 메데이아가 두 아이를 죽인 것은 이아손이 팽생 집착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을 철저히 짓밟아서 이아손의 존재 이유 자체를 제거한 셈이다.
 
또한 아이들을 잃은 것은 메데이아에게도 고통이었지만 오로지 완전한 복수를 위하여 악행을 저지른 것. 이는 사랑에 눈이 멀어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하고 동생까지 죽였던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형벌이기도 했다.
 
메데이아의 할아버지인 태양의 신은 그녀가 이아손에게 잡히기 전, 메데이이와 두 아이의 시신을 수레에 싣고 하늘로 데려갔다. 이아손은 아이들의 시신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외쳤지만 메데이아는 끝내 거절했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실의에 빠진 이아손 역시 얼마가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그런데 메데이아가 아들을 죽였다는 내용은 사실 에우리피데스가 창작한 내용으로 원래의 신화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자식을 죽여서까지 남편에서 복수한다는 충격적인 설정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을 통하여 유명해지면서 막장스토리의 원형으로 자리잡았고, 고대를 넘어 오늘날 현대에까지 다양한 작품에서 변주되기에 이르렀다.

메데이아의 복수극은 현대적으로 요약하면 남편의 불륜으로 삶이 어긋난 부부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라는 명대사로 회자되며 국내에서 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부부의 세계>역시 메데이아 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원작자가 직접 언급한 바 있다.
 
메데이아는 아이들을 왜 죽였냐고 묻는 이아손에게 "당신에게 고통을 주려고"라고 답한다. <부부의 세계>에서도 지선우(김희애)가 바람난 남편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마치 아들을 죽인 것처럼 암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지선우는 "난 널 고통스럽게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수 있어. 평생 자식 잃은 고통 속에서 사는 기분이 어때?"라고 조롱하는 대사는 영락없이 메데이아의 데자뷔다. 
 
그런데 메데이아와 <부부의 세계>의 공통점은 자극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걸작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끔찍한 막장드라마가 과연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자격이 있는가.

우리는 각자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진정한 사랑과 행복한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이아손과 메데이아는 과연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일까. 인간의 엇갈린 선택과 욕망이 얼마나 큰 나비효과를 불러올 수 있는지, 메데이야와 이아손의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변주되며 우리에게 큰 여운을 남기는 이유다.
책읽어주는서재 메데이아 부부의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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