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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숲에서 치유와 생명의 시를 읽다
▲ 차옥혜 시집 <호밀의 노래> 표지  치유의 숲에서 치유와 생명의 시를 읽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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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숲에 자주 간다. 숲에 자주 가는 이유는 병 치료를 위해 다니는 병원이 숲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가는 길에 숲에 들리곤 했는데 지금은 숲이 먼저고 병원은 다음이다. 숲에 갈 때는 배낭에 시집을 한 권씩 넣어간다. 기왕이면 치유의 효과가 있는 숲처럼 읽어서 영혼이 맑아지고 건강해지는 시집이 좋다.

지난 5월 말 출간된 차옥혜 시인의 열네 번째 시집 <호밀의 노래>(현대시학기획시인선) 1부는 '가을 호밀새싹', '겨울 호밀', '봄 호밀' 순으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시인이 심은 호밀은 봄날의 파종이 아니라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 심은 늦은 농사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파종한 씨앗은 이듬해 봄을 맞이하기까지 '눈 감옥'의 혹독한 겨울을 지나야 한다.

"발, 손, 입이 없어
길을 스스로 정할 수 없는
우리는 캄캄한 포대 속에서
빵이 될까 새 생명이 될까
얼마나 두려움에 떨며 가슴 졸였나"
- '가을 호밀 새싹' 부분


호밀에게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 겨울이 닥치자 '소슬바람 지나/찬바람 높바람 휘몰아쳐/뿌리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더니/폭설이 온몸 덮친다'. 호밀은 '벌써 죽어야 하는가/가을에 겨우 태어났는데' 하고 탄식한다. 하지만 '눈 감옥 여기저기/있는 듯 없는 듯'했던 호밀은 '미세한 푸른 핏줄로 서로서로 깨워/온기 나누며' 주어진 생명을 잘 지켜내고 이윽고 만유 소생의 봄을 맞는다.

"가을에 눈떠 멋모르고 우쭐대다
폭설에 덮여 얼음에 갇혀 죽음과 싸우며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 자만이 느끼는
환희의 깊이와 높이를
봄날에 싹터 꽃샘추위에 벌벌 떠는 새순이
매화, 산수유, 수선화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 '봄 호밀' 부분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호밀의 생애사다. 차옥혜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가을밭에 모처럼 호밀을 심었다. 호밀이 뿜어내는 강렬한 푸른 생명력은 내게 희망과 꿈을 꾸게 한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호밀의 노래'는 이미 호밀만의 노래가 아닌 것이다. 시인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코로나19에 기후 재앙까지 겹쳐 곳곳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무하는 노래다.

'흙에 대한 예의' 말하는 '팔순 농부 할머니'

시인의 주의 깊고 성실한 관찰은 사월 초의 호밀, 이삭 맺은 호밀을 거쳐 풋거름에 이르는 호밀로 그 생장의 단계를 따라 이동한다. '풋거름이 된 호밀'은 시인 농부가 내년의 풍작을 바라고 호밀밭을 뒤엎어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그래도 호밀은 절망하지 않는다.  

"잘 익은 씨앗으로 영생하려던/우리 꿈은 깨져 버렸다/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삶이 어디 뜻대로만 되든가/희망의 끈으로 마음 칭칭 감아/몸은 쓰러졌어도 마음 꼿꼿이 세워/비 맞고 햇빛에 삭아 푹푹 잘 썩어 내년에 뿌려질 어떤 씨앗에든 스며들여/세세연년 세상 푸르게 하리라/뭇 생명 먹이고 살리리라"
- '풋 거름이 된 호밀' 부분


차 시인은 팔순을 눈앞에 두고 있다. 고령이다 보니 건강상태에 적신호가 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팔순 농부 할머니'는 '몸 움직일 때까지는/제 몸 아낌없이 내던져/흙에 땀을 흘려주는 것이/평생을 먹여 살려 준/흙에 대한 예의며 보답'이라고 생각한다.

"찌릿찌릿 불타는 손끝에서
마주치는 흙의 사랑이 좋아
한여름 뙤약볕에서
땀 하염없이 흩뿌리는
팔순 농부 할머니"
- '흙에 대한 예의' 부분


시집 2부와 3부에는 환경파괴로 인한 기후재난과 이와 무관하지 않는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참상과 우려의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시들이 주를 이룬다. '지구의 어머니 우주의 탄식', '카나리아가 운다', '위험한 호주의 야생 낙타', '죽은 주목 하얀 뼈의 묵시록', '코로나 19의 하소연' 등 제목만으로도 세상을 걱정하는 노 시인의 눈빛이 느껴진다. 시인의 눈에 코로나19 감염병은 "낮은 곳부터 휩쓸고 가는 감염병 홍수"다.

"공장 비행기 멈추고, 학교 호텔 등이 쉬자, 쏟아지는 실직자들//이른 새벽 며칠 째 인력시장에 나왔다 허탕 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날품팔이 가장의 발걸음//낮은 곳부터 휩쓸고 가는 감염병 홍수"
- '눈물 전염3-홍수' 전문


"같은 구치소 독방에 권력남용 뇌물죄로 수감된 한 전직 대통령은 코로나19 음성이라도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입원"
- '눈물 전염4-서울동부유치소' 부분


시집 4부와 5부에도 세상에 대한 전방위적인 관심과 자연에 대한 세심한 촉각이 빚은 시편들이 눈에 띄지만 '이제야 발바닥을 들여다보다', '하루하루가 선물이다', '가족의 빛', '등대가 그립다' 등의 자기 성찰과 가족과 고향에 대한 향수가 깃든 시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숲속에서 읽기 좋은 '치유의 노래'

김종희 문학평론가는 시집 해설에서 차 시인이 "세상살이의 온갖 곡절에 가슴 조이며, 그 여린 감성을 동원하여 온전한 향방을 제기한 것은 그가 '주는 사람'의 책임에 충실한 사례"라고 강조한다. 또한 시인의 "순정한 서정성은 연약해 보이지만 기실 가장 완강한 힘이다"라고 상찬한다.

차옥혜 시인은 전주 태생이다. 시인의 고향 "전주역 승강장엔 언제나/대학입학을 위해 처음 고향 떠나는/나를 배웅하는 젊은 어머니가 서 있다". "설렘과 두려움이 뒤척이는 마음 숨기고/의연한 척 웃고 있는 나의 등을/말없이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며/꽃샘바람에 옷고름과 치마폭을 펄럭이는/매화 같은 어머니"가.

차옥혜의 시는 "따뜻하고 섬세하며 단단한 언어로 치유의 노래를 들려준다(이경수 문학평론가)"는 평을 받고 있다. 물 흐르듯 혹은 부드러운 흙을 매만지듯 무리 없이 전개되는 자연스러운 문장들을 읽다보면 마치 숲에 들어 와 있는 기분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노 시인에게도 소녀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소년도 있었다.

"소녀적 이른 아침 다락방 창문을 열면
냇물 건너편 둑에
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던/소년
서로 멀리서 바라만 봤어도
바람과 시냇물에 실어
소리 없이 주고받던/설레는 말들
학교에 늦을까봐 곧 창문을 닫으며
꽃이 되던 나"
- '보고 싶다' 부분


차옥혜 시인은 내가 유일하게 '누님'이라고 부르는 시인이다. 코로나19 감염병이 완전히 물러가고 시인의 고향이자 나의 고향인 전주역에서 지금도 소녀 같으신 백발 노 시인을 뵐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호밀의 노래

차옥혜 (지은이), 현대시학사(2022)


태그:#차옥혜, #호밀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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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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