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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힘든 한 주였다. 지난 4월, 삼일 연속 야근을 하고 그 하루 전엔 지방 출장까지 다녀왔다. 그 덕에 당일 행사는 잘 치렀지만 몸 상태는 영 아니었다. 대충 정리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는데 온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극도의 피로감이 밀려들면서 절로 눈이 감겼다. 약간의 오한이 들었다. 열은 없는 것 같았고 얼마 전 2차 접종까지 마친 상태라 설마 그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는 여전히 마른기침을 하신다. 일주일 전부터 저러셨는데, 괜찮다는 말만 반복하신다. 어머니는 부스터 샷까지 맞으셨다. 외출도 하지 않으신다. 코로나일 리는 없었다. 어머니는 양약을 싫어하시는 데다 가습기도 꺼리신다. 그저 생강차 자주 끓여드리고 머리맡의 젖은 수건 제때 갈아드리며 차도를 지켜보는 수밖엔 없었다.

키트는 '두 줄'... 양성이었다

밥맛도 없고 해서 생강차 한 잔 마시고 씻고 그냥 누웠다. 검은 천장이 빙빙 돌았다. 오한이 심해지는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불을 뒤집어쓰면 식은땀이 흘렀다. 안 되겠다 싶어 물약 한 병과 감기약 두 알을 먹었다. 몇 년 전에도 이렇게 아팠던 적이 있었다. 그때 그 두 가지 약의 효과를 톡톡히 봤었다. 그 이후론 코만 간지러워도 먹었고 약효는 언제나 직방이었다.

독한 약이어선지 금세 잠이 들었는데, 깊이 들지는 않았다. 선잠에 악몽까지 꾸었다. 갈증도 심해 수시로 깨야 했다. 새벽녘까지 예닐곱 번은 그랬다. 그때부터 조금 불안했지만 아닐 거라 애써 부인하며 그렇게 주말을 보내보기로 했다. 한 이틀 그렇게 독한 약 먹으며 이불 뒤집어쓰고 땀 쫙 빼고 월요일 아침이면 벌떡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건 내 생각이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꼼짝 않고 누워 수시로 약을 털어 넣었는데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일요일 오후부터는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비슷한 마른기침이었다. 처음엔 두어 번씩 하더니 간혹 발악하듯 수십 번을 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기침을 해대서인지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지 기운도 없었다. 시야마저 흐릿해졌다.

월요일이 되어 억지로 출근은 했는데,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 약국에서 진단키트를 사 와 코로나 테스트를 해 봤다. 긴장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는데 '혹시'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역시'였다. 빨간 줄 하나와 회색빛 한 줄이 선명했다. 처음엔 그 색깔 때문에 아닌 줄 알았지만 그게 그거였다. 분명한 양성이었다.
 
위의 키트가 어머니, 아래가 내 것이다. 내 결과 한 줄은 옅은 회색이어서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도 양성이랬다.
▲ 모자, 동반 양성 반응  위의 키트가 어머니, 아래가 내 것이다. 내 결과 한 줄은 옅은 회색이어서 아닌 줄 알았는데 그것도 양성이랬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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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받아든 순간에야 큰일 났다 싶었다. 반나절 어머니 보살펴주시는 보호사 아주머니께 급히 전화를 드렸다.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어머니 테스트를 부탁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정말 간절히 그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아주머니는 어머니도 양성이노라고 전해주셨다. 무릎이 푹 꺾였다. 못난 아들 때문에 병약하고 연로한 어머니까지 위험에 처하신 거였다.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당신은 의외로 담담, 아니 의연하셨다. 어쩌겠냐며, 이 또한 극복해 내야 하지 않겠냐고 오히려 걱정하는 아들을 위로하셨다. 나는 모텔에라도 들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둘 다 양성인 걸 뭘 그러느냐며 그냥 같이 이겨내자고 하셨다. 하긴 보호사도 못 올 테니 나라도 함께 있는 게 옳았다. 독한 약을 한 아름 사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때까지도 어머니가 기침 외에는 다른 증상은 일절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다 3차 접종 덕이라고 했다. 3차 접종자 중엔 감염이 됐는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까지 있다고 들었다. 서둘러 예방접종을 해 드린 건 정말 잘한 일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가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각자의 방에 본부를 꾸렸다. 독하디독한 약 한 보따리씩을 무기 삼아 그 지독한 병균과의 일전에 돌입했다. 우리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도록 동선을 최소화했다. 집안에서도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끼고 빨래나 설거지는 뜨거운 물로 각자 해결했다. 물론 식기류는 철저히 구별해 따로 섰다. 어머니는 더 악화되지도 호전되지도 않으셨는데, 나는 점점 더 나빠졌다.
 
어머니와 난 각자의 방에 본부를 차렸다. 무기는 맞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독한 감기약들이었다.
▲ 세상의 모든 감기약 어머니와 난 각자의 방에 본부를 차렸다. 무기는 맞을지 아닐지도 모르는 독한 감기약들이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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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한나절이 지나자 가래까지 끓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보는 가래였다. 심할 땐 한주먹만큼 쏟아져 나왔다. 기침과 가래가 동시에 괴롭히니 목은 말도 못 하게 아팠다. 찢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나중엔 실제 그랬다. 가래에 빨간 피까지 묻어 나왔다. 목구멍에 상처가 나 그랬던 거였다.

'이러다 죽는구나' 생각하기도

가장 심한 증상은 식욕과 미각을 잃은 것이었다. 도통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목이 아파서가 아니라 먹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입맛을 싹 잃었다. 감기에 좋다는 콩나물국은 녹슨 못을 우려 끓인 것 같았다. 김치에선 걸레를 빤 듯한 냄새가 났다. 밥알은 말 그대로 모래알이었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고, 아예 뭘 먹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천장은 더 격렬하게 돌고 돌았다. 앓는 동안 내도록 날이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했다. 그래서인지 온통 세상이 뿌옇게 보였다. 코로나가 점령한 지구는 우울한 무채색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치 무기력했다. 그런 상황을 기록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아무것에도, 심지어 TV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겨나갔다.

그렇게 한 사나흘을 버티니 기침도 가래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기력이 조금 나는 것 같아 일어나 세수나 할 요량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거울 속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푹 꺼진 두 눈, 툭 튀어나온 광대, 핏기라곤 일도 없이 허연 비듬만 잔뜩 인 살갗, 제멋대로 자란 수염과 머리칼까지 영락없는 좀비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몸무게는 5kg이나 빠졌다.

솔직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코로나를 우습게 봤다. 어쭙잖은 음모론에 혹해 별것도 아닌 바이러스 따위를 과대포장하고 있다고, 기껏해야 독감이나 폐렴 수준 아니냐며 코웃음을 쳤다. 거대 자본의 장난질이라고도 여겼다. 하지만 직접 앓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제껏 그렇게 아파보지 못했다. 정말 이러다 죽는구나 싶은 마음이 수시로 들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잠시나마 되먹지 못한 시건방을 떨었던 스스로가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나라가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불신하고, 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어떠한 것에라도 무관심했던 어리석음이 그렇게 후회되고 모두에게 죄송스러울 수 없었다. 그저 깨끗이 낫게만 해 준다면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기도까지 했다.

그렇게 크게 앓으면서 나는 또 한번 어머니를 다시 보게 됐다. 당신은 심장 수술까지 하신 팔순 노인이다. 3차 접종 덕에 증세가 나만큼 심각해지지는 않았지만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는 내색하지 않으셨고, 못된 병 옮긴 아들 원망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살뜰히 보살피셨다. 그런 줄은 진작 알았지만 어머니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였다.

그렇게 우린 함께, 아니 지금까지 늘 그랬던 것처럼 내가 어머니에게 이끌려 내 인생 중 가장 위험스러운 고비를 넘어왔다. 어머니에 대한 새삼스런 존경심, 우리 둘만의 끈끈한 동지애는 이 치명적인 전염병이 전해준 역설적인 선물이었다. 병은 육신을 못내 괴롭혔지만, 그렇게 정신을 새롭게 해 주었다. 물론 그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찌 보면 이번의 감염은 일종의 정화(淨化)였다. 그동안 내 안에 잔뜩 쌓여있던 온갖 나쁜 기운들과 음험한 생각들을 기침, 가래와 함께 토해낸 거였다. 그만큼 내 속에 빈자리가 많이 늘었을 터, 지금부턴 그 자리에 무언가를 다시 채우며 나머지 삶을 살 것이다. 그게 무엇일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까지보다 더 나쁘지는 않으리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컸다.

태그:#코로나, #양성, #확진, #공포,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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