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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3월의 어느날. 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내계마을 사람들은 피난 짐을 싸느라 정신이 없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옷과 솥단지, 그릇 몇 개가 전부였다. 60여 호가 사는 내계마을은 산악지대에 있어 소개령(疏開令) 대상이었다.

이득술 집에서도 아내 경명의(당시 55세)가 수저, 젓가락, 그릇을 챙기느라 바빴다. 그녀가 4남매를 앞세우고 농산리로 피난을 나서려는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무근이 아버지, 어디 계시오?" 잠시 후 이득술(당시 58세)이 나타나 말했다. "먼저 내려가게. 나는 삼베랑 이것저것 더 챙겨서 내일 내려갈게." "그라면 그라이소."

다음 날 이득술은 자신이 농사지은 삼베(8필)와 족보 15권을 지게에 지고 집을 나섰다. 삼베 한 필이 20m이었으니 총 160m에 달하는 양이었다. 지게에 산처럼 높게 쌓아 올린 삼베를 이고 이득술은 땀을 뻘뻘 흘리며 면소재지가 있는 북상면 갈계리로 내려왔다. 바로 그때, 북상지서 순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득술씨, 잠시 지서에 갑시다" "와요?" "가면 알아." 

지서에서 장철주(가명)는 이득술을 취조했다. "삼베 어디서 났어?" "지가 농사진 기라예." "거짓말 마." 기가 막혔다. "당신, 서철수(가명)네 삼베 훔쳐 왔지?" "그기 뭔 말이라요!" 기가 막혀 하는 이득술에게 방망이가 돌아왔다. "말로 하니까 안 되겠네"라며 고문이 시작됐다. 1951년 3월 16일 꽃샘추위가 매섭던 날, 고문을 가한 지 두 시간 만에 이득술 몸이 축 쳐졌다. 고문치사였다.

어떻게 이런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을까? 사실은 이득술 아랫집에 사는 서철수 모친이 이웃집 삼베에 욕심이 나 북상지서에 모함을 한 것이다. 북상지서는 이를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이득술에게 고문한 것이다. 전쟁통 산간마을 사람들이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다.  

산간마을 사람에게 붙은 '빨갱이' 의혹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일대의 군 토벌작전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시작됐다. 여순사건 이후 지리산으로 들어간 14연대 반군과 입산자(빨치산)들을 첫 토벌 대상이었다. 1948년 10월 30일에 설치된 호남방면전투사령부를 비롯하여 1차, 2차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 등 1950년 3월 15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명칭이 변경되는 토벌사령부의 지휘를 받은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단행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여순사건부터 한국전쟁까지 야산대 활동을 한 이들을 '구빨치'라 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후퇴기부터 활동한 이들을 '신빨치'라 불렀다. 군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펴는 데 큰 걸림돌이 있었는데 바로 산간마을 주민의 협조였다. 사실 야산대 활동이 장기화되면서 산간 주민들도 빨치산에 협조하기 어려워졌다. 군·경의 매서운 협박이 있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들도 먹을 게 없어 빨치산에게 줄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치산은 산간마을 주민에게 식량을 얻지 못하면 큰 마을에 가서 보급투쟁을 하는 수밖에 없었기에 절박했다. 

군·경 입장에서는 산간마을 주민과 빨치산의 접촉을 원천 차단하는 게 급선무였다. 이에 군·경은 산간마을에 소개령을 내리고, 집도 불태워 버렸다.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이 제주 4.3사건 때부터 시작되어 한국전쟁 때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9·28수복으로 전선이 북상하자 정부는 영·호남의 후방 치안확보를 위해 1950년과 1951년에 각각 11사단과 8사단, 백야전 전투사령부 등을 투입하여 토벌작전에 나섰다.

그 일환으로 제11사단 9연대는 1951년 3월 15일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내계마을 주민에 소개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득술이 삼베와 족보를 챙기느라 하루 늦게 내려왔고, 북상지서는 그에게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 것이다. 설사 상황이 그렇더라도 이득술을 제대로 조사했다면 죽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거창유족회 활동 계속하는 이무근
 
증언자 이무근(이득술의 아들)
 증언자 이무근(이득술의 아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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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득술이 죽은 후 이무근(85세, 경남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월성초등학교 5학년에 불과했다. 비록 어렸지만 4남매의 장남이라 엄마를 도와 농사를 지어야 했다. 다행히 초등학교 졸업장은 딸 수 있었다. 운 좋게 졸업장을 딴 그는 거창읍 대성중학교에 동갑내기들보다 4년 늦게 입학했다. 풀 베고, 소 여물 먹이는 것은 기본이고, 괭이질을 비롯해, 농사에 전념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성중학교에 이어 내친김에 거창상고까지 다녔다. 이무근이 어려운 조건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었던 데에는 월성리 선배 서상환의 도움이 컸다.

한국전쟁 당시 집 나이 17세였던 서상환은 소년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이후 토벌대에 붙잡힌 그는 전향해 예전의 동지를 잡는 역할을 했다. 이른바 '사찰유격대원'이었다. '보아라 부대'로도 불린 사찰유격대는 빨치산 출신으로만 구성됐다. 그들은 옛 동지들을 잡는 데 열정적이었는데 소극적이거나 어설프게 행동하면 군·경 토벌대에게 찍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찰유격대원들은 경험을 토대로 빨치산의 이동 루트, 은신처, 매복지점, 공격 예상 지점 등을 파악해 토벌작전에 협력했다. 

나중에는 정식 경찰이 된 이들도 있었는데 소년 빨치산 출신 서상환도 거창경찰서장의 눈에 들었다. 서상환은 후배들 진학에 도움을 주었는데 경찰서와 학교에 부탁해 월성리 출신은 사친회비 1600원을 1200원으로 깎아주게 했다. 이무근도 그 혜택을 받았다. 경찰에게 아버지를 잃은 이무근이 경찰의 도움으로 학업을 마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이무근이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빨갱이로 몰려죽은 아버지 때문에 매번 신원조회에 발목을 잡혔다. 결국 잡화점에 취직해 소주 박스를 배달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 군대에 다녀온 후인 1970년 거창군 공무원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북상면 출신 7명이 응시했으나 혼자 합격했다. 이무근은 북상면사무소와 위천면사무소에서 총 30년간 근무하고 정년퇴직했다.

2022년 현재 85세인 그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거창유족회'에서 온갖 실무를 도맡고 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된 후에도 그는 유족회 일을 계속하고 있다. 1기 때 신청하지 못한 이들을 찾아내 '진실규명 신청서' 작성을 도와주고 관련 자료를 같이 찾아준다. 그런 그가 이점숙(77세)씨를 소개했다. 이씨는 6.25 때 친정아버지가 지방 좌익에게 학살당했다.

친정아버지와 시아주버니의 죽음

"이제 가면 언제 오나 / 오실 날을 알려 주오." 꽃상여에 올라탄 요령잡이의 구슬픈 선소리에 "어-노 어-노 어나리 넘자 어-노" 상두꾼들의 후렴구가 이어졌다. 수십 장의 만장과 상주들이 그 뒤를 이었다. 거창군 가조면이 만들어진 이래 최초의 면민장(面民葬)이 치러졌다. 1950년 12월 초였다.

이 면민장의 주인공은 가조면 수원리 상수원리마을의 이창영(당시 28세)이었다. 그는 빨치산에 학살당했는데 이를 슬피여긴 사람들이 면민장을 치른 것이다. 면사무소에 근무하던 이창영은 1950년 12월 25일 빨치산에게 연행되어 오도산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는 평소 경찰이 산간마을 주민의 집뒤짐을 할 때 "이 집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라며 나서주었다. 그런 연유로 면민들이 자발적으로 만장을 들고 장례에 참여했다.

이점숙은 아버지 이창영을 5세에 잃고 힘들게 살아왔다. 결혼 후 보니 시댁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친정아버지와는 정반대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의 피해자였다. 피해자는 다름 아닌 시아주버니 채기홍이었다. 그나마 같이 끌려갔다 살아 돌아온 이가 "(거창보도연맹원들이) 금병재에서 죽었어요"라고 해 채기홍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상황 때문에 가매장만 했을 뿐 선산에는 모시지 못했다. 금쪽같은 장남 채기홍을 잃은 어머니 심선희는 정신줄을 놓았고, 아버지 채시동은 술로 세월을 달랬다.

친정과 시댁에서 공히 전쟁 피해자가 있는 것은 비단 이점숙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한반도에 살았던 장삼이사들이 대부분이 그랬다. 누구에 의한 죽음이든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아픔을 위로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증언자 이점숙(이창영의 딸)
 증언자 이점숙(이창영의 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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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거창군, #국민보도연맹, #한국전쟁, #빨치산, #견벽청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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