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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을 끓이려고 단호박을 주문했는데, 표주박같이 생긴 반질반질한 호박이 배달왔다. '땅콩호박'이라고 한다. 반을 갈라보니 샛노란 호박이 맞다. 속은 부드럽고 달아서 호박죽을 끓여먹으니 맛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호박죽을 끓이기 전 호박을 갈라 손질을 하는데, 납작한 씨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표주박같이 생긴 반질반질한 호박이 배달왔다. '땅콩호박'이라고 한다.
 표주박같이 생긴 반질반질한 호박이 배달왔다. "땅콩호박"이라고 한다.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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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집사의 여러 가지 단계가 있는데, 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키우기 까다로운 화초들에 애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희귀하거나 고급스러운 식물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또 하나, '씨앗 발아족'이 있다. 과일이나 채소 속 씨앗을 보면 흙에 심거나 물에 불려 싹이 트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 부류에 속한다.

심장이 말랑말랑해지는 순간

예쁜 꽃화분도 가끔 사오고, 초록초록한 실내용 식물이나 잎이 근사한 나무들에게 매료되기도 하지만 식물을 키우며 내가 제일 즐거워하는 순간은 씨앗을 심었는데 쏘옥, 새싹이 돋아나는 일이다. 과일이나 야채 속의 씨앗이라는 게, 보통 먹고나서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의 일부가 되는 신세가 아닌가. 그런 아이들을 흙 속에 심어두고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초록색 생명을 쏘옥 내미는 것을 보면 정말 심장이 말랑말랑해진다.
 
호박새싹
 호박새싹
ⓒ 이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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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발아족'이 달달한 호박 속의 씨들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씨들이 하수구에 흘려들어갈까 염려하면서 조심스레 모아두고, 며칠 축축하게 적신 키친타올 위에 씨앗들을 재웠다.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 싹은 안 나는 건가... 생각을 하다 사무실 베란다의 흙 속에 씨앗들을 묻고 덮어두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 여기 있어요'라며 초록색 싹이 솟아나왔다. 보드랍고 고운 초록색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신기하고 기특한데, 하나 둘, 씨앗을 심은 자리마다 앞다투어 싹이 올라왔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안 될 것 같아 '땅콩 호박 키우기'로 폭풍검색을 했다. 잎이 다섯 장 정도 나면 옮겨심고, 키가 자라면 5-6cm 마디마다 옆으로 나는 가지는 잘라주어 영양소가 한 곳으로 모이게 해주면 잘 자란다고 한다.

그다음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정을 시키면 열매가 열린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때까지 내가 키울 수 있을까?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트에서 사온 호박속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나 생명력을 뽐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아름다운 일이라는 점이다.
 
호박 새싹
 호박 새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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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잎
 호박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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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씨를 심어 키우면서 옆 화분에는 토마토 씨앗을 심었고 바질, 루꼴라, 무순 등의 씨앗을 사왔다. 바질은 금세 쑥쑥 자라고 루꼴라는 싹이 더디게 올라온다. 토마토는 한 차례 길게 자라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시들었다. 다시 씨앗을 심어 새로 나오는 싹이 건강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바질
 바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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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이 발아되어 나올 때의 새싹 모양이 다 다른 것도 텃밭을 재배하며 느끼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잎이 하나씩 나오는 것도 있고, 꼭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나오는 아이도 있다. 바질의 새싹은 오동통한 물방울 모양인데 무순의 싹은 귀여운 하트모양이다. 토마토는 단단하게 선 줄기가 올라오고, 루꼴라는 바닥부터 잎사귀가 솟는다.

다들 각자가 원하는 일조량이 있고 물의 양이 다르다. 키우면서 잎을 떼어주거나 가지를 잘라내야 하는 것도 있고 일단 튼튼하고 길게 자라기를 기다려주어야 하는 것도 있다. 싹이 난 뒤에는 얼마나 자랄지, 꽃은 언제 피는지, 언제쯤 수확할 수 있을지를 찾아보는 재미도 소소한 즐거움이다.

사무실 베란다에 땅콩호박씨를 심은 게 몇 주 전인데, 그 이후로 초록색 잎들의 안부를 확인하며 지내는 일상이 생활의 큰 기쁨이 되었다. 생각해보니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에서, 컴퓨터와 핸드폰의 화면 속 세상에 길들여진 삶에서, 사람에게 치이고, 오가는 말에 다치고, 감정이 상처입는 일이 다반사인 날들 속에서 씨앗을 뚫고 나온 커다란 생명의 기운들을 보는 건 너무나 기운나는 일이었다.

조심스레 설레는 일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선택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는 사람들의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평생 자신의 정원에서 식물을 가꾸고 정원 일의 즐거움을 찬미했던 작가 헤르만 헤세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의 일상은 근면과 노고로 가득 차 있으니 성급함이 없고 걱정 따위도 없는 생활이다. 그런 생활의 밑바탕에는 경건함이 있다. 대지, 물, 공기, 사계의 신성함에 대해 믿음이 있고 식물과 동물들이 지닌 생명의 힘에 대한 믿음이 있다. "-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헤세, 웅진지식하우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평생을 산 대문호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했다. 소박한 정원을 가꾸며 식물을 관찰하고 자연의 신비를 느끼며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그만의 철학과 사상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그저 씨앗일 뿐인데, 흙 속에서 건강한 초록색 싹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 경건해진다. 어떻게하면 잘 자랄 수 있을까, 어떻게하면 다치지 않고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클 수 있을까를, 그 작은 잎을 보며 궁리를 한다. 그리고 매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고 조용히 들뜨고 조심스레 설레는 일이다. 생명에 마음을 기울이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초록색 잎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나또한 '초록을 닮은 사람',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간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writeurmind


시민기자 그룹 '워킹맘의 부캐'는 일과 육아에서 한 발 떨어져 나를 돌보는 엄마들의 부캐(부캐릭터) 이야기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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