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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지 작가
 이수지 작가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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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릴 적 자신의 그림이 '뽑히는' 일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게 그림을 그리는 동기였다. 그런데 화실에서 '진짜 화가'를 만난 뒤 예술 자체가 주는 짜릿함을 깨달았다. 더이상 그림이 '뽑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마음가짐을 가지자 그에게 세계적인 상이 왔다.  

이수지 작가는 지난 3월 21일 한국인 최초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아래 안데르센상)'을 수상했다. 안데르센상은 특정 작품이 아니라 평생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기에 수상자는 대단한 명예를 누린다. 안데르센상은 공로상의 성격을 띤다.

40대의 젊은 작가가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것은 이례적이다. 역대 수상자로는 <말괄량이 삐삐> 저자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저자 볼프 에를브루흐, <돼지책> 저자 앤서니 브라운, <에밀과 탐정들> 저자 에리히 캐스트너 등이 있다.

이수지 작가는 <여름이 온다> <물이 되는 꿈> <그림자놀이> 등 그동안 30권의 책을 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글 없는 그림책이다. 지난 5월 23일 광장동 카페에서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뽑히든 말든 상관없다"는 마음

- 그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는 누구나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잖아요. 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거죠. 내가 진짜 그림을 잘 그리나 보다 하고요. 어른들에게 칭찬 받는 게 신나서 그림을 열심히 그렸어요. 그러다보니 제 그림이 학교에서 자주 뽑혔어요."

그런 그가 화실에서 예술이 주는 감동을 느꼈다. 그 감동은 사람들의 칭찬에서 비롯된 즐거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이러한 자전적 이야기를 그는 그림책 <나의 명원 화실>(2008년, 비룡소)에 담았다.
 
<나의 명원 화실> 2008년도 작.
 <나의 명원 화실> 2008년도 작.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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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명원 화실> 후반부에 '이제는 내 그림이 뽑히든 말든 상관없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안데르센상 수상 이후에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나요?
"예, 저는 여태껏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을 뿐이에요. 이 상을 받으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너무 큰 상이니까 기대도 안 했어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면 될 거 같아요. 이 상엔 뽑히는지에 개의치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이수지 작가는 서울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그는 동아리 '아리랑'에서 활동했다. 동아리 사람들을 만난 뒤 그는 대중예술을 하리라고 다짐했다.

- 왜 그림책을 그리기로 결심했나요?
"예술이 멀게 느껴지는 게 싫었어요. 동아리 친구들이 미대생인 저를 신기한 생명체 보듯이 보더라고요. 공대 다니는 친구가 너 같은 사람 난생처음 본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시골에서 자란 순박한 청년들한텐 한평생 예술을 접할 일이 없었던 거죠. 그때 깨달았어요.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아니면 스스로를 예술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는 걸요.

저한텐 예술이 일상이니까 그 전에는 몰랐던 거죠. 동아리에서 다양한 학과의 친구들을 만나고 많은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예술을 하기로 마음 먹었어요. 예술을 위한 예술, 소수를 위한 예술 말고요. 그래서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그걸 비싸게 파는 일은 끌리지 않더라고요. 다른 걸 하고 싶었어요."

진로에 대한 고민을 이어가던 중 그는 학교 책장에서 우연히 아티스트북 <말콤 X>를 접했다. "책을 매체로 하는 예술 장르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이거다 싶었죠. 책은 누구든지 손 뻗으면 만질 수 있는 물건이잖아요." 그는 대학 졸업 후 영국 캠버웰예술대학에서 북아트 석사 과정을 밟았다.

- 영국에서 그림을 배우는 건 다르던가요?
"영국 대학원은 학생들을 내버려둡니다. 교수님이 학생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아요. 학생을 동료로 여기죠. 교수님의 역할은 학생에게 필요한 레퍼런스를 찾아주는 정도예요. 저한텐 그게 잘 맞았어요. 영국에서 예술은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죠. 예술은 편안한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요."

영국에서 보고 들은 것이 지금까지도 창작의 주요 원천이라고 그는 전했다. 그는 대학원 시절 첫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출간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그는 '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그 당시 제가 하던 모든 고민을 담았어요. 독자는 과연 책을 보기만 하는 사람일까? 독자가 책장을 넘기지 않으면 책의 진행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것들이요. 무엇보다 두드러진 건 일루젼과 리얼리티에 관한 고민이에요.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과 그 너머에 있는 환상이 책의 말미에서 결국 섞이도록 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메시지는 그의 이후 작품들에서 이어진다. <파도야 놀자> <그림자 놀이> <거울 속으로>로 이어지는 '경계 3부작'은 종이책의 가운데 제본선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로 삼는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그 경계는 허물어진다. 이 작가만의 실험적인 창작 기법이다.

- 창의성의 원천은 무엇인가요?
"저는 항상 재미를 좇아요.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더 재밌게 할 순 없을까?'라는 고민을 매일 합니다. 제 생각에 끊임없이 불을 지피는 거죠. 재미를 찾아내려는 끈기가 남들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네요."

부모님의 교육 방식도 영향을 미쳤다.

"어렸을 때 부모님께서 뭘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거의없어요. 심리적인 압박을 느꼈던 기억이 없습니다."

자녀에겐 필요한 건 이러한 소극적 교육이라고 그는 말했다.

"저도 저희 부모님처럼 아이를 양육하려고 애를 씁니다. 자녀를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 결국 실패한다고 생각해요.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니면 절대 열심히 하지 않으니까요. 책도 아이가 보고 싶을 때 자유롭게 볼 수 있도록 하려고 해요. 똑바로 앉아서 책 봐라 같은 말은 안 하려고 하죠."

그는 이런 생각을 그림으로 가시화했다. 바로 국제 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 한국지부(KBBY)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 도서지원 펀딩 프로젝트 포스터를 직접 그렸다.

"아이들이 여러 자세로 책을 읽는 모습을 그렸어요. 꼭 이 자세로 책을 읽으라는 건 아니에요. 아이들이 자유로움을 느끼고 어떤 것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자는 뜻이죠."
     
이수지 작가 '굉장한 독자들 Amazing Readers' 포스터
 이수지 작가 "굉장한 독자들 Amazing Readers" 포스터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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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성이 모든 것의 근원"

- 어린이에 대한 애정이 큰 것 같습니다. 어린이를 소중히 여기는 이유가 뭔가요?
"어린이성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어린이는 실물로서의 아이를 뜻하기도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마음 상태를 뜻하기도 해요. 저는 그걸 '어린이성'이라고 불러요. 어린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확 달려들고, 열정이 식으면 미련 없이 떠나잖아요. 어떤 것에 대한 그런 뜨거운 열정과 호기심 같은 것이 '어린이성'이라고 봐요. 예술가의 근저에 어린이성이 존재해요. 예술가는 어린이성 추구를 멈추지 말아야 해요. 어린이가 순간 몰입해서 신나게 놀 때의 모습을 닮고 싶어요."

- 직관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순간 가슴에 와서 박히는 깨달음은 논리적이지 않아요. 중요한 삶의 진실은 아주 단순한 형태로 드러나죠. 그런데 아이들이 하는 말에 마음에 곧바로 꽂히는 내용이 많아요. 아이가 어른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 거죠. 아이가 어떤 면에선 어른보다 낫다고 봐요."

그는 그림책이 아이의 언어를 통해 진실을 전한다고 말했다.

"그림책에는 직관적인 언어를 씁니다. 그림책은 애들이나 보는 거다라는 편견도 있지만, 사실 그림책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얘기가 담겨 있어요. 어른과 아이 모두가 그림책의 독자인 거죠." 

- 작가님에게 그림책이란 뭔가요?
"자유예요. 어떤 그림책은 읽는 데 3분밖에 걸리지 않아요. 그 짧은 시간 동안 책에 몰입했다가 빠져나올 때 어린이든 어른이든 큰 행복과 자유를 느낀다고 봐요. 저는 그림책을 보면서 이야기 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기분을 느껴요. 그림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에요. 그림 작업은 제게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인 동시에 자유를 선사하는 일이죠."

그는 무엇보다도 그림을 구상할 때 자유를 느낀다고 덧붙였다.

"안데르센상 수상 이후에 일이 너무 많아졌어요. 며칠 전에는 작업 마감 일이 갑자기 앞당겨지기도 했고요. 심적으로 힘든 와중에 작업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뜻밖에도 마음이 평화로워지더라고요. 남편은 제가 워크홀릭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어린이처럼 유연한 사람이라고 했다. 어린이에게는 편견이 없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도 없다. 이 작가는 유연함을 바탕으로 기존 그림책의 외연을 확장했다. 그림과 음악이 결합한 그만의 예술 장르를 창조하기도 했다. 이수지 그는 누구에게나 가까이 다가가되 결코 뻔하지 않은 길로 다가가는 예술가인 것이다.

나의 명원 화실

이수지 (지은이), 비룡소(2008)


태그:#이수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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