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6.03 21:17최종 업데이트 22.06.03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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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웬만한 커피 애호가들은 최상의 맛과 향을 지닌 커피를 찾아다닌다. 이에 맞추어 웬만한 카페는 최고급 수준의 커피를 상징하는 스페셜티커피를 취급하고 있으며 인스턴트커피를 메뉴에 올리는 카페는 없다. 그런데 실제 세계 여러 대륙에서 생산되는 커피생두의 50퍼센트 이상이 인스턴트커피 제조에 사용된다.

인스턴트커피 소비 비율이 가장 낮은 나라는 이탈리아다. 1퍼센트 미만이며, 미국이나 프랑스도 10퍼센트 미만이다. 포르투갈, 스페인, 인도 등에서는 인스턴트커피를 뜨거운 물이 아니라 뜨거운 우유에 타서 마시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인스턴트커피 소비 비율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인스턴트커피 소비의 천국은 영국

우리나라는 잘 알려진 대로 커피믹스(coffee-mix)라는 이름의 인스턴트커피 종주국이다. 1976년 동서식품이 커피, 설탕, 그리고 커피화이트너(크리머)를 섞어서 1회 분씩 포장하여 뜨거운 물만 부으면 마실 수 있는 제품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였다. 맥심이라는 이름으로 출시하였다. 카페와 스페셜티커피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커피믹스 소비 덕분에 우리나라는 인스턴트커피의 소비 비중이 높은 나라에 속한다.
 

동서식품의 맥심 커피믹스 ⓒ 동서식품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인스턴트커피 소비의 천국은 영국이다. 영국의 경우 인스턴트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이 75% 이상이다. 최고급 차와 최고급 커피를 즐겨야만 할 것 같은 영국 이미지에 맞지 않지만 사실이다. 영국이 200년 이상 지켜오던 차 문화에서 인스턴트커피 문화로 바뀐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터에서 제공되는 인스턴트커피의 맛과 편리함이 전쟁 후에도 영국인들의 커피 문화를 사로잡은 것이다. 스파게티 소스의 풍미를 높이기 위해 인스턴트커피 가루를 섞는 유일한 나라도 영국이다.

인스턴트커피의 최초 발명은 20세기 초였지만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고, 그 계기를 만든 것은 브라질이었다. 세계 대공황으로 커피 값이 추락하고, 브라질의 커피 재고는 쌓여갔다. 커피를 철도용 연료로 사용하고, 커피에서 알코올, 기름, 가스를 추출하였으며, 커피로 와인도 만들고 향수도 제조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커피 수출이 확대되거나 커피 가격이 안정되지는 않았다.


대공황이 초래한 세계적 소비 감소는 세계 커피 공급량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자국 재정의 70퍼센트 이상을 커피 판매 수익으로 충당하던 브라질에게는 위기였다. 정부가 나서서 커피나무를 새로 심는 것을 금지하고, 창고마다 쌓여 있는 커피 생두를 강제로 소각하는 것으로도 커피 가격을 안정시키기 어려웠다.

브라질의 대형 은행들은 새로운 커피 제품의 개발이 이 위기를 극복시켜 주리라는 기대를 갖고 믿을 만한 기업을 찾아 나섰다. 브라질과 커피전쟁을 치르고 있는 미국, 미국과 경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던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유럽 기업들은 믿을 수 없었다. 결국 찾은 것은 스위스의 식품회사 네슬레였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열린 빈회의에서 영구 중립을 인정받으며 연방국가로 재탄생한 스위스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중립을 유지하였고 훗날 제2차 세계대전에서도 중립을 유지하여 자국민을 보호하는데 성공하였다. 스위스가 선택한 이런 중립 노선이 네슬레에 대한 브라질의 신뢰를 낳았다.

네스카페의 등장

네슬레는 커피와는 무관한 기업이었다. 1866년에 창립된 식품회사로서 연유, 초콜릿, 이유식 등을 생산하는 기업이었다. 커피와는 무관한 식품회사 네슬레가 새로운 커피 제품의 개발 의뢰를 받은 것은 기업 이미지보다는 국가이미지의 덕을 본 것이 분명하였다. 국가 이미지가 기업과 상품의 경쟁력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무려 7년간의 개발 노력 끝에 화학자 맥스 모겐탈러(Max Morgenthaler) 박사가 이끄는 네슬레 연구팀은 '네스카페'(Nescafé)라는 이름의 신제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커피액을 뜨거운 용기 안에서 분사시킴으로써 수분을 증발하고 커피 방울이 급속히 분말로 바뀌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물에 녹는 분말형 커피였다. 상품명 '네스카페'는 '네슬레의 커피'라는 단순한 의미였다.
 

브라질 커피 ⓒ pixabay

 
네스카페의 출시에도 불구하고 다음 해에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네슬레의 기업 이익은 크게 감소하였고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 군대에서의 인스턴트커피 소비의 확대에 따라 네슬레의 수익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전쟁 종료 이후에는 세계인들이 네스카페의 편리함과 맛에 빠져들기 시작하였고, 네슬레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네스카페를 통한 네슬레의 성장은 전쟁이 많은 나라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피해를 주지만, 어떤 나라나 기업 혹은 사람들에게는 기회를 열어주기도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6.25 전쟁으로 일본이 전쟁 특수를 누렸던 역사나, 베트남 전쟁으로 우리나라가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역사도 그런 현상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커피 세계에 가져온 영향은 '네스카페'에 그치지 않았다. '네스카페'의 재료로 로부스타종 커피가 인기를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동안 커피인들로부터 저급한 커피라는 비난과 함께 외면 받아 오던 로부스타종 커피가 분말화 과정을 거치면서 쓴맛이 사라진 것이 배경이었다. 로부스타종 커피의 소비는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확대되었고, 이 품종을 주로 재배하던 많은 중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경제 회생의 길이 열렸다. 한동안 그 이익이 생산농민들이 아니라 독재자들에게 돌아간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인스턴트커피의 개발을 의뢰하였던 것은 브라질이었다. 그러나 그 이익은 개발을 맡았던 스위스 기업, 그리고 인스턴트커피의 재료를 생산하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돌아갔다. 물론 이탈리아를 비롯한 남부 유럽 국가에서 새롭게 등장한 에스프레소 커피의 재료로 로부스타종 커피가 소비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데 기여하였다. 이런 변화를 지켜본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로부스타종 커피의 재배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인스턴트커피 ⓒ 픽사베이

 
인스턴트커피 전성시대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시작된 인스턴트커피와 로부스타종 커피의 성장은 500년 동안 유지되어 오던 커피의 이미지를 바꾸었다. 지역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를 넘어 세계 대부분의 지역과 국가에서, 그리고 일부 상류층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커피를 소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인스턴트커피 '네스카페'의 등장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커피 문화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끼친 두 가지 요소는 단연 '네스카페'로 시작된 인스턴트커피 기술의 발달과 로부스타종 커피 재배의 확대였다. 서로 연결된 이 두 가지 현상으로 인해 커피는 20세기 후반에 지구촌 모든 사람이 즐기는 소비재가 될 수 있었다. 커피를 생산하고 가공하기 위해 땀을 흘리지만 커피를 마시지는 못하던 커피 생산국의 노동자들도 조심스럽게 즐기기 시작한 음료가 되었다.

커피의 역사를 '제1의 물결', '제2의 물결', 그리고 '제3의 물결'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21세기 초반 커피전문가 티모시 캐슬(Timothy Castle)과 트리시 로드겝(Trish Rothgeb)이었다.

제1의 물결은 소비자들이 커피 원료의 생산지나 음료의 형태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시는 시대로서 식료품점에서 싼 가격에 표준화된 인스턴트커피 구입이 가능했던 2차 세계대전 이후 시대였다. 음식점에서 무료 후식으로 커피가 제공되던 인스턴트커피의 전성시대를 말한다. 커피의 질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이윤 창출에만 몰두하는 거대 상업 자본이 만든 상품 커피(commodity coffee)가 시장을 지배했다.

이 시기에 미국인들이 마시는 커피 맛은 획일화되었고, 사용하는 커피가루는 브라질산으로 통일되었으며, 소비자의 선택은 맛이나 향이 아니라 오직 광고에 의해 좌우되었다. 미국식 실용주의와 편의주의가 커피를 덮침으로써 커피의 품위와 격이 지속적으로 떨어진 것이다.

한 세대 이상 지속된 인스턴트커피 전성시대에 미국인들 중에는 심지어 커피가 과일처럼 농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았다. 미국인들은 가정에서 커피를 내리는 번거로움을 견디기 싫어했다. 펜더그라스트의 표현대로 미국 소비자들은 편리함을 위해 기꺼이 커피의 품질을 양보하였다. 미국 커피의 영향이 컸던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푸른역사)
Mark Pendergrast(2010), Uncommon Grounds: The History of Coffee and How it Transformed our World, New York: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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