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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류지의 금당과 오층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 호류지의 오층탑을 보기 위해 길게 늘어선 일본 학생들 호류지의 금당과 오층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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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종종 마음이 심란할 때면 지역에 위치한 오래된 절들을 찾는다. 불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옛 고찰들을 즐겨 찾는 이유는, 그곳의 건축물들과 불상들이 내뿜는 장엄한 역사를 느끼며 혼탁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잦은 외침으로 인해 고대의 사찰들이 거의 모두 불타버린 한반도와 달리, 일본의 옛 수도 나라(奈良)와 교토(京都) 등지에는 그 당시에 지어진 여러 절들이 여전히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로 꼽히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올라간 나라(奈良)의 호류지(法隆寺)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607년 창건된 호류지는 670년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된 이래 1400여 년의 세월을 버티며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 오래된 세월만큼이나, 호류지에는 수많은 국보와 중요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그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찬찬히 살펴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나는, 이윽고 어느 커다란 불상 앞에 우뚝 멈춰서게 되었다.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2m가 훌쩍 넘게 호리호리하게 뻗어 선 불상은,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으로부터 초탈한 듯한 평온한 표정으로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그 몽환적인 자태에 마음이 뺏겨서,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나를 매료시킨 불상의 이름은 놀랍게도 '백제관음'이었다. 기록이 부실한 탓에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1698년에 쓰여진 '호류지제당불량기'에 '백제에서 건너온 천축(인도)제 불상'이라고 언급된 것이 근대에 이르러 그대로 '백제관음'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백제관음의 유래는 확실히 규명되지 못했지만, 호류지가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품고 있는 절임은 분명하다. 비슷한 시기에 창건된 아스카데라나 시텐노지와 마찬가지로, 호류지의 창건에도 백제를 필두로 한반도에서 건너온 승려와 기술자들이 함께 했다.

602년에 일본으로 도래하여 불교 전래와 천문학 정립에 힘썼던 백제 승려 관륵(観勒)의 목조상이 호류지에 안치되어 있는 것은, 호류지와 한반도의 인연을 단적으로 드러낸다(관련 기사: 백제 승려 목조상 유심히 본 일본 학생의 한마디). 관륵의 목조상은, 평소에는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비불로서 소중하게 다루어져 왔다.

한일 교류, 호류지가 갖는 의미
  
아스카 시대(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관음상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호류지의 백제관음상 아스카 시대(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관음상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호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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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한 편견 아래 갇혀버린 한일 간의 상호이해, 그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문화가 어우러져 빚어진 호류지가 오늘날에 갖는 의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수식어를 넘어선다고 생각한다. 호류지로 인해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히로토 아키라(101)씨는, 호류지 방문을 계기로 새로운 세상을 향해 눈을 뜨게 된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한다.

얼마 전 101세 생일을 맞이한 히로토씨는, 호류지를 처음 방문했던 그 날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광기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던 1943년 말, 당시 대학생이던 히로토씨는 이른바 '학도출진'이라는 이름으로 징병대상이 된다(관련 기사: 패전 후 돌아온 일본군 학도병이 어머니께 겨우 한 말).

과장과 허위로 점철된 선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은 여러 정황상 분명해 보였다. "꿈에 나오신 아버지께 '죽어서 돌아오라' 격려 받으니"라는, 오늘 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섬뜩한 문구가 전시가요로 불려지던 시절. 히로토씨는 자신이 출전하게 되면 살아서 일본에 돌아올 수 없으리라 직감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떠나기 전, 히로토씨는 그 유명한 호류지의 정취를 두 눈에 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학도출진을 앞두고 어렵사리 호류지를 찾은 그는, 당시에 품고 있던 생과 사의 고뇌를 아득히 뛰어넘는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번뇌망상을 뛰어넘어 이상적인 정토세계에 이르게 된 부처와 보살들의 모습을 조각과 벽화의 형태로 접하며, 히로토씨는 마치 스스로가 천국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전쟁에 동원되어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은 변하지 않았지만, 호류지에서 머물렀던 그 찰나의 순간은 평생을 관통하는 감동으로 남았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엄습하던 전장에서도, 패전 조국의 폐허 위에서도, 고도경제성장기의 질주 속에서 견뎌야만 했던 스트레스와 소외감 속에서도, 호류지의 감동은 등대가 되어 그의 삶을 비추어주었다.  
  
히로토 씨는 이른바 '학도출진' 직전 호류지를 방문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 호류지의 백제관음상 사진을 감상하는 히로토 아키라(101)씨 히로토 씨는 이른바 "학도출진" 직전 호류지를 방문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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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이후, 히로토씨는 호류지의 감동을 거슬러 올라가며 불교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관련 유물들의 내력을 따라가다 보니, 발길은 어느새 한국에 닿게 되었다. 1994년 서울과 경주를 방문한 그는, 삼국시대의 불상들을 마주하며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삼국시대에 만들어졌다는 한반도 불상들이, 호류지를 비롯한 일본의 고대 고찰들에 남아 있는 불상들과 너무나도 흡사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던 것이다.

유사한 불상의 양식은,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자랑스러운 일본의 문화가, 전쟁 당시 목숨을 버려서라도 지켜야 할 존재로 설정되었던 일본이라는 나라가, 아주 먼 옛날 열도의 선주민들과 바다 건너의 도래인들이 상호작용하며 함께 빚어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때의 충격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히로토씨는 고대 한일관계가 형제와 같았다고 믿는다. 불상의 양식을 통해 옛 한일관계사를 바라보는 그의 고찰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히로토씨의 발길은 중국과 인도로도 향했다. 그리스 문화는 인도에서 간다라 불상을 빚어냈고, 그 불상 문화가 중국까지 전래되었으며, 그 물길이 한반도를 타고 일본까지 닿게 된 것임을 피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인도, 인도에서 중국, 중국에서 한반도,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어진 그 거대한 흐름을 돌아보며, 인류의 문화와 가치가 결국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임을 히로토씨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는 이유 
  
인도의 불교는 중국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 인도에서 일본까지 불교가 전래된 과정(나라국립박물관) 인도의 불교는 중국과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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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위대한 인류의 역사가 무색하게, 일방의 문화를 무시하는 폭력적인 식민통치가 이루어지고, 급기야는 국수주의에 입각한 전쟁으로 수많은 인명이 처참하게 산화하고 말았다. 도대체 그 자신은 무엇을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것이며, 전사한 동기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잃었던 것인지, 또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을 근절하지 못하고 있는 인류는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인지 히로토씨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101세가 된 히로토씨는 여전히 1994년 방한 때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한국을 그리워한다. 그는 한일관계가 고대와 같이 회복될 날을 꿈꾸며, 한국이 잘 되기를 축복한다.

"한국의 옛 불상들을 볼 때마다 느낍니다. 한국은 위대한 전통과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라고요. 그렇죠? 저는 언젠가는 남북한이 민주적으로 다시 통일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일관계 개선, 더 나아가 세계평화의 씨앗을, 고대인들의 우애가 빚어낸 보물들은 여전히 품고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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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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