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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운섭씨를 만난 곳은 인천 영종도의 한 공사장이었다. 주소지는 용인이지만, 대형 공사현장을 따라다니며 일을 하기 때문에 집에서 지내는 날보다 공사장 인부 숙소에서 지내는 경우가 더 많아서다. 주로 주말에 집을 다녀온다는 그는 공사가 끝나는 내년까지 영종도에서 지내야 한다고 했다.

심운섭씨가 공사장을 떠돌며 일하게 된 계기는 납북사건이다. 심씨는 1972년 납북귀환 후 속초경찰서에서 조사받고 구치소에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석방 후 계속 배를 탔지만 오래 못가 결국 뱃일을 그만두었다. 배를 탈 때마다 납북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결국 고향을 떠났고, 친구의 소개로 조경 일을 시작했다. 그 후 한 평생 공사장을 떠돌게 되었다.

심운섭씨를 만난 공사장 근처엔 마땅히 이야기 할 만 한 곳이 없었다. 심씨는 함바식당(건설 현장에 마련되어 있는 '현장식당') 앞 작은 테이블에서 인터뷰를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다. 야외 인터뷰를 하기에는 조금 쌀쌀한 3월이었지만,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한적한 구석이라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근처로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씨는 인터뷰에 앞서 식당에서 믹스커피 두 잔을 얻어와 마시라고 전했다. 커피를 건네는 그의 손은 하루의 노동을 끝낸 거칠고 검은 손이었다. 노동을 마친 후라 피곤할 만도 한데 인터뷰 하는 동안 그의 목소리에서는 전혀 피곤함을 느끼지 못했다.
 
심운섭씨와 인터뷰한 영종도의 한 공사 현장식당. 남의 눈을 피해 이야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여전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
 심운섭씨와 인터뷰한 영종도의 한 공사 현장식당. 남의 눈을 피해 이야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는 여전히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고 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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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해 줄 터이니 따라오라'

강원도 삼척 근덕(고향)에서 태어난 심운섭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속초 청호동으로 이사 왔다. 속초에서 살던 중 중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뒤 형과 형수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이전처럼 마냥 학교를 다니기에는 눈치가 보였다고 한다. 결국 중학교를 중퇴하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15살 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했다. 처음 선원생활을 할 때는 당일 조업 나갔다가 돌아오는 '당일바리'로 다녔다. 주로 탔던 배는 8톤짜리 목선(동력선)이었는데, 한 배를 고정적으로 탄 것이 아니라 이 배 저 배 옮겨 다니며 일하는 일명 '가고쟁이'로 일을 했다고 한다.

승해호를 탄 건 언제부터였냐고 묻자, 1971년 북에 납치되던 그 해 승해호를 처음 탔다고 말했다. 군 입영통지서를 받은 상태에서 입대 전에 돈을 조금 모아둘 생각으로 탄 것이었다.

그 즈음 심씨는 이미 승선 경력이 2~3년차 되는 경력 선원이었다. 승해호 선주나 (전라도 선원 몇몇을 제외한) 선원들이 모두 같은 동네 사람들(김성학, 김춘삼 등 모두 동네 후배들)이었기 때문에, '승해호' 선원들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승해호를 타고) 오징어바리를 나가면 울릉도 앞에서 조업을 하고 새벽 무렵 돌아왔거든요. (북한에) 납치되던 날도 조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날 안개가 뿌옇게 끼고 가랑비가 내려서 날씨가 좋지는 못했어요. 한 새벽쯤 되었을까. 잠에서 깨어나 좁은 선실이 답답해서 갑판으로 나왔죠. 그런데 우리 배 앞에 큰 함대가 서 있더라고요. 배에선 '안내해 줄 터이니 따라오라'는 마이크 소리가 들렸는데 말투가 남한사람 말투예요. 나도 선원들도 당연히 그 배가 남한의 함대라고 생각했지 북한 배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어요. 만약에 북한 말투였으면 우리가 왜 따라가겠어요. 마침 안개 때문에 방향 찾기도 힘들었는데 우리 함대가 따라오라고 하니 반가워서 그대로 따라갔죠."

심운섭씨는 선장실 옆에 앉아 한두 시간쯤 승해호가 북한 배 뒤를 따라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컴퍼스(나침반)를 보고는 승해호의 진행 방향이 북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깜짝 놀라서 내가 선장에게 '이거 틀림없이 노스코스(북쪽방향)이니 빨리 배를 돌리자'고 했어요. 선장도 그제야 놀라 얼른 배를 돌리려고 했죠. 그러자 갑자기 북한 함대에서 따발총을 쏘기 시작하더라고요.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아! 북한 함대구나, 우리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북한 군인들이 우리 승해호에 줄을 던져주더니 시동을 끄고 승해호에 줄을 묶으라고 하더라고요. 우리는 하라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죠. 방법이 있습니까. 그렇게 북한 함대에 묶여 30분가량을 끌려갔지요. 북쪽에 억류되어 있을 때 북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승해호가 월선 했기 때문에 데려왔다고 하길래 '우리가 2시간 넘게 북쪽으로 끌려왔는데 어떻게 월선이냐고 항의한 적이 있었어요."

김일성 사진을 깨다

나중에 북한 군인들로부터 승해호가 도착한 곳이 북한 고성 장전항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당시 납치되었던 배는 승해호 뿐만 아니라 고성 아야진의 승운호, 속초의 해부호, 전라도 탁성호 등이 더 있었다고 한다. 당시 끌려간 모든 선원들은 결국 1년 넘게 북한에서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한번은 이후락이 북으로 찾아와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듣고 내가 술을 마시고 방에 있던 김일성 사진을 깨버리면서 '우리를 남쪽으로 보내달라'고 난동을 피운 적이 있어요. 한마디로 술 마시고 난동을 부린 셈 이었는데 그 일로 나는 20일 보호소에 끌려가 경위서를 쓰고, 자아비판을 해야 했어요.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사진을 깨면 '사형감'이라고 겁을 주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아, 이제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었죠. 결과적으로 무사히 살아서 남한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때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엄청 겁에 질려 잠을 잘 수도 없었어요."

남한으로의 귀환이 늦어지자 초조한 나머지 벌인 행동이었다. 그 사건 후 북한 사람들은 '우리를 남한으로 돌려보내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승해호 선원들을 남한으로 보내 준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1972년 9월 7일 승해호 일행은 남한으로 귀환되었다. 선원들은 원산에서 '승해호'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와 군사분계선쯤에서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는 남한 함대에 인계되었다. 그리고 그 배를 따라 속초항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선원들 모두 갑판에 나와 서서 이 꿈같은 상황을 지켜보았었다고 한다.
 
"항구로 들어갈 때 보니 내 친구 하나가 멀찍이 보이더라고요. 사람들은 많은데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속초항에 도착하자 고성군 합동수사관들이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다가 같은 배 선원들끼리 한 버스에 태웠는데, 버스를 타는 동안에는 누구하고도 접촉하거나 말하지 못하게 했어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속초시청인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굉장히 많은 인원이 들어갈 수 있는 넓은 공간에 수용되었던 것은 분명했어요. 조사는 주로 밤에 이루어졌는데, 수사관이 호명하면 따라가 조사를 받아야 했어요. 조사실은 약 3평정도 되는 크기였는데 그런 방마다 수사관이 한두 명 있더라고요."
 
간절히 원했던 귀환이었는데

조사실에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나는 비명소리로 시끄러웠다고 한다. 심운섭씨의 담당수사관은 심씨에게 '월북했으니 간첩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심씨는 '우리는 월북한 게 아니고 끌려간 것'이라고 대답했지만 그럴수록 '바른대로 대'라며 날아오는 주먹질과 발길질만 더 심해질 뿐이었다고 한다.
 
"조사 두 번째 날인가,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집게 같은 걸 양손에 꽂고는 '군용전화기 돌리듯' 돌리는데 너무 괴로웠어요. 그게 전기고문이었습니다. 천천히 돌렸다 빨리 돌렸다 하면서 세기조절 하는 것이 최대한 고통을 주려는 것 같더라고요. 전기고문을 하면서 나에게 '월북했으니 지령 받은 게 있을 거 아니겠느냐. 지령을 대라'는 거였어요.

지령 받은 게 없으니 정말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죠.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한 나 같은 놈을 도대체 어디다 써먹는다고 무슨 지령이니 지시를 내리겠냔 말이에요. 진짜 지령 받은 것 없다고 계속 부인했어요. 그렇게 한 5, 6일 조사받고 집으로 돌아와 불구속 상태에서 검찰조사와 재판으로 넘겨져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거죠."
 
1972년 당시 속초 시청 앞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던 증인이 당시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을 이야기 하고 있다. (sbs 8시 뉴스화면 캡쳐)
 1972년 당시 속초 시청 앞에서 여인숙을 운영하던 증인이 당시 수사과정에서의 고문을 이야기 하고 있다. (sbs 8시 뉴스화면 캡쳐)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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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운섭씨는 재판이 끝나고 군에 입대했지만 현역병으로 입대하지 못하고 18개월 동안 해안초소를 지키는 방위로 근무했다고 한다. 그는 방위 생활을 하게 된 것 역시 북에 다녀온 전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방위 생활하는 동안에도 보안대에서 찾아와 '북에 언제 갔다 왔냐'며 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뒤로 '앞으로 군 생활을 조심해야 겠구나'고 생각했고, 제대할 때까지 그야말로 '찍소리 하지 않고' 말조심하며 지냈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와 1, 2년 다시 배를 탔지만 더 이상은 계속 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친구 도움으로 용인으로 올라와 조경 일을 했다.
 
"내가 용인으로 이사 온 지 한 40년 정도 됐어요. 용인경찰서에도 내 기록이 있다 보니 직장생활도 제대로 못했어요. 한번은 한국슬레이트라는 회사에 취직을 했었는데 4개월 있다가 쫓겨났어요. 한 달에 세 번씩 직장으로 찾아오고 집으로도 찾아와요. 혹시라도 북한 찬양이라도 할까봐 찾아오겠죠. 그러니 무슨 직장생활을 할 수 있겠어요. 용인경찰서에서 오라고 해서 들어가면 '저 새끼 빨갱이 새끼'라며 형사들이 그렇게 욕을 해대요. 임OO이라는 형사가 내 담당이었는데 그렇게 욕을 하더라고요."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남한으로 귀환한 지 55년이 흘렀지만, 결국 심진섭씨의 몸에는 고문후유증과 '빨갱이'라는 낙인만 남아 있다. 전기고문 당한 이후로 어깨 같은 곳이 '찌릿찌릿'하면서 아픈 것은 일상이 되었다. 심할 때는 어깨가 마비되어 힘을 주지 못하는 때도 있다고도 했다.
 
"용인이든 어디든 내 기록이 나를 계속 따라다녀요. 박정희 때도 감시가 심했지만 전두환 때는 감시가 더 심했었어요. 내가 자식이 3명인데 그 아이들한테 피해가 갈까봐 얼마나 가슴 졸이고 살았겠어요. 나는 '빽'도 없고 힘도 없어서 한 세상 그냥 다 지나갔지만 아이들은 죄가 없잖아요. 진실규명 기회가 생긴다면 꼭 내 억울함을 밝히고 싶어요."

심운섭씨는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갑게 식어버린 믹스커피를 보더니 어서 마시라고 했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차마 그 커피를 거절할 수 없어 한 모금 마셨다. 그 사이 밖은 벌써 어둑어둑해져오고 있었다.

추운데 인터뷰하느라 고생하셨다고 하자, 심운섭씨는 '자식에게 못한 이야기를 했다'면서 진실이 밝혀지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불현듯 '특별한 이야기'를 공유한 사이가 되었다는 책임감이 밀려왔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 뿐만이 아닌,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납북귀환어부들의 피해를 이해하는 '특별한 관계'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특별한 관계가 더욱 커질수록 심운섭씨와 같은 피해자들의 고통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것이라 믿는다. 더 이상 구석의 한 귀퉁이에서 남의 시선을 신경 쓰며 이야기 하는 피해자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도록 우리의 관심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다.
 
2004년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보안분실 앞에서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낱낱이 지적하자 대공분실 안에서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자료사진.
 2004년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보안분실 앞에서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국가보안법의 폐해를 낱낱이 지적하자 대공분실 안에서 한 사람이 지켜보고 있다. 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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