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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오전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특별사면된 고 정동년 5·18 기념재단 이사장에 대한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31일 오전 광주 동구 5·18 민주광장에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특별사면된 고 정동년 5·18 기념재단 이사장에 대한 영결식이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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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9일 타계한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정도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민주화 투사였다. 정동년 이사장은 어떤 활동을 했으며 무엇 때문에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그리고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당시 전남대 복학생이던 청년 정동년을 왜 그토록 잔인하게 탄압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위해서는 5.18민주화운동을 대표하는 정동년 이사장의 역사적 활동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이는 또한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31일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5.18 관련 김대중 구술 자료와 정동년 구술 자료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두환 신군부의 만행을 증언한 김대중과 정동년

정동년이 극심한 고초를 겪게 된 것은 1980년 4월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방문한 것과 관련 있다. 당시 정동년은 동교동을 방문해 김옥두 비서를 만났다. 그때 김대중은 복권이 되어 대중강연을 다니는 등 정치활동을 본격화하고 있었다. 정동년은 김대중에게 대중강연을 요청하기 위하여 김옥두 비서와 논의했다. 정동년은 당시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 김대중씨가 정치 활동을 재개를 했잖아요. 연금이 풀려서 그래서 이제 강연을 다니시는데 각 대학마다 돌아가 다니면서 강의를 하셨어요. (중략) 총학생회가 김대중 선생님 모시고 강연을 한 번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각 대학에서 김대중씨가 돌아다니니까 우리도 전남대에 당연히 요청을 해야 된다. 그런데 이제 박관현이가 나한테 이제 그 부탁을 한거야, 선배님이 가셔서 교섭을 좀 해주십시오. (중략)

김대중씨 만나지도 않았어요. 그냥 먼 발치로 이렇게 면담하고 있는 모습만 보고 그냥 가는데 김옥두씨가 기왕 왔으니까 방명록에다가 인적 사항을 좀 기재를 해달라고 그래서 뭐 당시 전남대학교 4학년 이름 이렇게 쓰고 간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볼펜도 주고 그러더만 그거는 받아 들고 나는 그냥 와버린 거예요 (중략) 그게 화근이 돼가지고 5.18 주모자까지 된 거죠." - 2010년 7월 10일 구술 내용 중에서


이 증언을 보면 1980년 4월 정동년이 동교동 김대중 자택을 방문해서 강연 요청을 하게 된 것은 후배인 박관현(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 1982년 10월 40여 일간의 단식으로 타계)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박관현 열사가 정동년 이사장의 동교동 방문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증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때 정동년은 김대중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불과 한 달여 뒤에 5.17쿠데타가 발생해 김대중의 광주방문은 이뤄지지도 못했다. 그런데 정동년은 그때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것이 빌미가 되어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하는 핵심 인사로 조작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은 처음에는 내가 알기로는 광주사건에 대한 나를 주모자로 몰려고 그랬는데 워낙 근거가 없으니까 선동죄로 몬 거여. 그런데 그걸 하는데 정동년이란 광주 학생을 잡아다가 조사를 하는데. 정동년이란 사람은 나는 보지도 못하고 이름도 듣지 못 한 사람이거든? 그런데 정동년이한테 우리 집 가서 나한테 돈 받았지 하고 묻게 된거여.

그러니까 아니까 하니까 그렇게 고문을 해가지고 수없는 고문을 당해가지고 할 수 없이 나중에 정동년이가 마음대로 하라고. 그래서 그러니까 정동년이가 우리 집 와서 뭐 그러니까 안방의 침대는 여기 있었지? 그러면 예! 김대중이는 여기 앉았지?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뭐 돈을 현금으로 싸서 주고 그렇게 해서 가져왔지? 그런 식으로 했단 말이야. 그래서 정동년이가 할 수 없으니까 나중에는 예 예 해서 그렇게 해갖고." - 2007년 2월 13일 구술 내용 중에서


정동년 이사장이 그와 같은 고난을 받게 된 이유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전두환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인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이 전국적인 소요사태을 일으켜서 폭력혁명을 통해 집권을 하려고 했다는 이유로(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기본 성격) 5.17쿠데타를 했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이 목숨을 건 항쟁을 전개하자 전두환 신군부는 당황했다. 광주시민을 무참하게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는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광주시민들의 저항을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연결시켜서 김대중의 선동에 의해서 발생한 내란행위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시나리오를 구성하다 보니 김대중의 사주를 받아서 내란행위를 주도한 인물이 필요했다. 이때 김대중 자택 방명록에 이름을 남긴 정동년이 전두환 신군부의 안테나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 신군부는 김대중의 사주를 받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이 5.18의 발단이 된 전남대 시위를 배후 조종해서 80년 5월 광주의 참극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조작했다.

정동년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전두환 신군부의 의도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고문을 이기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거부해도 고문을 받게 되면 결국 허위자백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때 정동년의 선택은 자살시도였다. 어떻게 보면 당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었던 것이다. 정동년은 이렇게 증언했다.

"이 수사가 이런 식으로 더 이상 확대돼서는 안 된다 하는 생각 그래서 이 수사를 더 이상 진행시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냐, 그때는 이제 자해밖에는 없다는 얘기죠 그래서 이제 자해할 물건을 찾는 거예요. (중략) 그럼 자해를 하려면 물건이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유리 조각이 있다든지 면도날이 있어야 돼. 그런데 영창 안에 그런 거 있을 리도 없고.

아침 새벽에 돌아와서 이제 고민을 한 거예요. 어떻게 이 사태를 모면해야 될 것이냐, 결국은 이제 결론은 이제 자해하는 방법 진술 불능 상태로 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나 하는데 아침에 이제 배식 시간이 된 거예요. 식사 이제 전부 아침 식사를 전부 배식을 한 거예요.

배식을 이제 딱 받아놓고 보니까 이제 스푼을 나눠주는데 군대 스푼 군대 스푼 알아요? 그 손잡이가 넓적하잖아요. 넓적한데 그 동그란 부분이 꺾여 있더라고요 손잡이가 이제 이렇게 돼가지고 이제 스푼이 돼 있잖아요. 이렇게 여기가 여가 좀 넓어요. 여기가 이렇게 딱 끊겨 있는 거예요. 이런 손잡이 스푼이 있더라고요 이거 보니까 날카로워 아 저것밖에는 없다, 자해할 기구가.

그래서 얼른 배식하자마자 이것을 이제 받아가 찾아가지고 이제 바닥에다 이제 간 거죠. 세멘트 바닥에다 막 이제 갈아서 날을 세웠어요. 그래가지고 이제 영창 안에 전부 화장실이 딱 하나 있어요. 화장실 안으로 다른 놈들은 배식하고 밥 먹는 시간에 화장실은 누가 출입을 안 하니까 밥 먹는 시간에 이 스푼을 들고 화장실로 간 거예요.

그래가지고 처음에 이제 배를, 배를 그어봤어요. 여기 근데 이게 무디어갖고 안들어가. 여러번 긋는데도 뭐라 그냥 그 독하게 마음먹고 푹 찔려서 어떻게 했으면 모르는데 또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러니까 그냥 긋는데 피만 낭자하지 잘 안 들어가, 여기도 막 탁 끊어보고 하는데도 여기도 잘 안돼 그러면 유리 같으면 날카로우니까 착 베지잖아요. 굉장히 이게 무딘 것이라 그 힘으로 아니면 안 베진단 얘기죠.

그래서 이래갖고 이제 난장판이 되어갔고 있는데 이제 밥 먹고 있는 어떤 놈이 화장실 문을 연 거예요. 그래서 이제 아! 실패다 하고는 그대로 이제 벽에다가 머리를 박고. 이제 마지막 방법은 그것밖에 없잖아요. 시간은 없고. 그래서 이제 머리를 받고 이제 기절를 한 거죠. 그래 갖고 정신 차리고 보니 헌병대 그 앞으로 이제 나와 있더만. 그래가지고 그때 바로 이제 보안대 지하실 상무대 영창에서 보안대 지하실로 다시 간 거예요. 글로." - 2010년 7월 10일 구술 내용 중에서


이렇게 정동년의 최후의 저항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 혹독한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에 근거한 내용을 갖고 재판이 이뤄졌다. 그 결과 정동년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김대중은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란선동과 한민통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동년은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인물이었고 그 이유로 잔인한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김대중, 정동년 증언이 의미하는 역사의 진실과 그 의미
  
정동년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확대조치에 의해 예비검속되어 처음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지도 몰랐다. 그런 정동년이 혹독한 고문을 받고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란죄로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 것은 전두환 신군부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내란음모사건과 연결시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동년의 증언은 이러한 당시 상황을 잘 알려준다.

고문은 최악의 반인륜적 국가폭력이며 범죄행위이다. 고문은 인간의 신체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신도 파괴한다. 잔혹한 고문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저항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 자살시도였다. 1980년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 당시 김대중의 첫째 아들 김홍일은 고문을 통한 허위자백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살시도를 했다. 다만, 제한된 공간과 감시당하는 상황 속에서 자살하는 것도 쉽지 않았으며 김홍일의 경우 그때의 후유증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정동년의 증언은 자살시도가 고문에 맞서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었던 당시의 참혹한 상황을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이처럼 김대중과 정동년의 증언은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데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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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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