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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군 동향면 학선리마을
▲ 학선리마을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마을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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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전북 진안군 동향면 학선리 마을의 '행복한 노인학교' 견학을 다녀왔습니다. '행복한 노인학교'에서 어르신들의 자서전 쓰기 작업을 꾸준히 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비결을 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현장을 방문해 보니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르던 마을 어르신들이 어느덧 글을 깨쳐 생활 글, 자서전, 시(詩), 나아가 신문기사까지 쓰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로 엮어 만든 연극 공연도 하실 정도입니다. 어찌 이게 가능하였을까요?

학선리 마을은 서른여덟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 동네입니다.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이 마을은 젊은 사람은 다 빠져나가고 어르신들만 남아 농사를 짓는 여느 시골 마을과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귀농-귀촌인들이 주민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 사뭇 달라졌습니다. 더욱이 소문을 듣고 이 마을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가 방문하였을 때도 경남 쪽에서 왔다는 다른 한 팀이 마을을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이 쓰시던 생활용품을 모아 만든 학선리마을박물관
▲ 학선리마을박물관 어르신들이 쓰시던 생활용품을 모아 만든 학선리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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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박후임 선생님(행복한 노인학교 교감, 부녀회장)을 따라 '학선리마을박물관'부터 들렀습니다. 작은 마을에 무슨 '박물관'이냐고요? 마을회관 1층에 들어선 살뜰한 생활사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농기구, 가구, 지게, 옷, 그릇, 시계, 재봉틀, 텔레비전, 전화기, 목욕통, 요강, 일기장, 사진 등 마을 어르신들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물품들이 빼곡하였습니다.

박 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고이 간직하고 계신 옛 모습이 담긴 작은 사진들을 확대해 전시하려 했답니다. 어르신들의 인생을 기억하고 존중하자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을 어르신들이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서 자꾸 버려지는 물건들이 있음을 아쉽게 여겨 조금씩 모으다 보니 박물관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답니다. 지금은 학선리 마을 주민들의 것만 아니라 주변 마을들에서 기증받은 물품들도 함께 전시하는 중입니다.

현재 마을박물관은 명절 때 고향을 찾는 자손들에게 훌륭한 교육의 산실 노릇을 톡톡히 한답니다. 자라나는 세대는 그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사셨는지 박물관에 들러 느끼고 알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을 방문객들에게도 마을 역사와 사람들을 알려주는 소중한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굳이 거창한 국립 박물관이 아니더라도 이 같은 작은 박물관을 곳곳에 세워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한 노인학교 교실로 쓰이는 봉곡교회 교육관
▲ 봉곡교회 교육관 행복한 노인학교 교실로 쓰이는 봉곡교회 교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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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들른 곳은 현재 '행복한 노인학교'로 사용하는 봉곡교회 교육관입니다. 행복한 노인학교는 지난 2008년에 마을의 봉곡분교 공간을 활용해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 분교는 학생이 없어 폐교된 채 오래 방치돼 있다가 "마을 주민을 위해 써 달라"는 새 주인의 요청에 따라 봉곡교회가 이곳에서 '행복한 노인학교'를 열고 한글교실과 이야기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시작한 거였습니다. 하지만 화장실과 겨울철 난방 등이 불편해 지금은 교회의 교육관으로 장소를 옮긴 상태라 합니다.

박후임 선생님은 자신이 이 마을에 귀농해 '행복한 노인학교'를 열기까지 과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는 서울에서 17년 간 목회하였고 그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학선리 마을로 귀농하였답니다. 처음 삼 년 간은 농사를 배우며 지냈고 지난 2008년 출석하던 마을교회에 '노인학교'를 해보자고 제안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평생 힘든 농사만 하시는 어르신들이 행복을 느낄만한 뭔가를 해보자는 취지에서 농한기를 이용해 시작한 학교였습니다.
  
행복한 노인학교 한글교실에 대해 설명 중인 박후임 선생님
▲ 설명 중인 박후임 선생님 행복한 노인학교 한글교실에 대해 설명 중인 박후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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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초 어르신들의 문해교육을 하는 한글교실은 전북의 평생학습지도사가 와서 가르쳤다고 합니다. 박 선생님은 손이 떨리고 머리가 지근거려 한글 배우기조차 힘들어하는 연세 많은 할머니들을 모아 이야기반을 하였습니다. 이야기반에서는 귀농-귀촌한 여성들과 함께 할머니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가령 옛날에는 무엇으로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았는지, 옷은 어떻게 만들어 입었는지, 고향의 모습은 어땠고 어렸을 때는 무슨 놀이를 하셨는지 따위의 여러 주제를 묻고 그 내용을 녹취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한글교실 선생님이 자주 바뀌자 박 선생님이 한글교실 선생님을 맡아 문해교육과 자서전 작업을 하였다는군요.
  
행복한 노인학교 어르신들의 시집 <너 엇찌 그리 입뿌야>와 자서전 <인생이잔아>, <왜 나를 심을 데가 없어 여기다 심어놨나>
▲ 어르신들의 시집과 자서전 행복한 노인학교 어르신들의 시집 <너 엇찌 그리 입뿌야>와 자서전 <인생이잔아>, <왜 나를 심을 데가 없어 여기다 심어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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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선생님은 어르신들에게 처음부터 자서전을 작업을 한다고 하지 말고, 먼저 친근해진 뒤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자서전 작업이 가능할만한 분들이 보일 거라고 조언해 주셨습니다. 처음부터 자서전 작업을 해 보자고 하면 다들 안하겠다며 어려워하실 거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고향의 봄' 노래를 함께 부른 뒤 "어르신이 사시던 '고향'에서 생각나는 건 뭔지" 여쭤 보며 자연스레 어르신들의 기억을 이끌어 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억을 끄집어낸 뒤 그 내용을 아주 천천히 글로 쓰시게 하였답니다.

어르신들은 자신 속에 담고 있던 사연들을 이야기와 글로 풀어내시면서 울기도 많이 울고, 치유도 되셨답니다. 노인학교에서는 어르신들이 글을 써 오시면 반드시 다른 분들 앞에서 발표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서전 작업에 참여하신 어르신들은 얼굴이 무척 밝아지셨다고 하네요. 
 
봉곡분교에 전시 중인 행복한노인학교 어르신들의 시화 작품
▲ 행복한노인학교 어르신들의 시화 작품 봉곡분교에 전시 중인 행복한노인학교 어르신들의 시화 작품
ⓒ 정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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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노인학교가 있던 봉곡분교였습니다. 그곳에는 어르신들이 그린 그림, 동판화, 만든 도자기, 시화, 쓰신 글을 모은 공책, 쓰신 책, 사진 등이 전시돼 있었습니다. 그 중에 배덕임 어르신이 쓰신 책 한 권이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배덕임 어르신이 진안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아 펴낸 책
▲ 배덕임 어르신의 책 배덕임 어르신이 진안신문에 연재한 글을 모아 펴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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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글반 어르신들은 '은빛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생활 글을 써서 지역신문에 연재하는 중이랍니다. 배덕임 어르신은 그렇게 쓰신 글들을 책 한 권으로 묶어 내셨다고 합니다. 그는 2013년 6월 27일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나는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어서 / 조그만 더 있다가 저 세상 갈깨 / 못 다한 일이 무어야고 / 나는 지금 제일 행복해 / 못 배운 글 눈 빠지게 배우는 중인데 / 더 배우고 갈깨 / 나는 글쓰기와 시쓰기 재미 있어서 / 지금은 즐거워 행복하게 잘 지내 / 사라온 인생길 허무하게 살았는데 / 지금은 행복해 (행복한노인학교, '인생이잔아' 61쪽)

요즘 '행복한 노인학교' 학생들은 줄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어르신들이 계속 숙환으로 돌아가시기 때문입니다. 진즉 이런 학교가 생겼더라면 더 많은 분이 혜택을 누리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래도 학선리마을 어르신들은 큰 행운입니다. 이런 학교를 꿈도 꾸지 못한 채 살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전국에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행복한 노인학교'를 모델로 시골 마을마다 노인학교를 세워 어르신들에게 배움의 기쁨과 행복을 안겨 드린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싣습니다


태그:#행복한 노인학교, #전북 진안, #학선리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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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솔샘교회(solsam.zio.to) 목사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세상' 함께 꿈꾸며 이루어 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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