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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의 혐오정치는 인종 및 국적, 성별정체성 및 성적지향, 장애, 거주환경, 고용형태 및 직업 등과 같은 다양한 조건에 따라 차별과 혐오를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조건에 기반한 혐오정치는 이주/난민,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홈리스 등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건강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건강은 이제 질병에 대한 치료와 통제의 범주를 벗어났으며 병리적 관점에서 의학적 개입으로만 완성될 수 없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사회구성원 개개인의 건강권이 침해받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다가오는 6월 1일 치러지는 전국지방선거에서 우리는 소수자 또는 약자가 아닌 권리의 주체로써 사회 속에서 공존하고 공생하기 위해 우리의 평등한 건강권을 주장하는 목소리를 연속기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편집자말]
혹한의 추위에 함박눈까지 내리는 2021년 1월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지하도에서 거리홈리스들이 종이 상자를 이부자리 삼아 추위를 피하고 있다.
 혹한의 추위에 함박눈까지 내리는 2021년 1월 12일 오후 서울 용산구 서울역 지하도에서 거리홈리스들이 종이 상자를 이부자리 삼아 추위를 피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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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이 아닌 곳으로 향하는 환자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처음으로 네 자릿수를 기록했던 2020년 12월에 있었던 일이다. 서울역 광장에서 한 남성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구급대원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남성은 의식을 되찾고 눈을 떴으나 여전히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환자의 상태를 살피던 구급대원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병원 연계'가 가능한지를 반복적으로 물었고, 이내 난감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환자는 들것에 실려 인근 노숙인시설로 옮겨졌다. 응급환자가 병원이 아닌 곳으로 향한 이유? "노숙인이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였다. 

혹자는 확진자 폭증기에 한두 번쯤 발생할 법한 예외적인 사건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발목 부위 절단 우려가 있는 동상 환자가 응급이송을 거부당해 수일 동안 거리에서 방치됐던 사례, 입원 치료를 받던 환자가 갑작스러운 병상 소개(疏開)조치로 인해 거리로 내몰렸던 사례, 심장 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가 진료 거부를 당한 끝에 사망에 이른 사례 등 "노숙인이 갈 수 있는 병원이 없어" 급성기 치료를 요하는 환자가 방치되는 일들이 코로나 시기 내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 물론 사정이 이렇게 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제한된 의료기관만을 이용해야 하는 차별적 조건

홈리스는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해준 병·의원만을 이용해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와 지자체가 지정한 병·의원을 이용해야만 의료지원이 가능하다.

현장의 관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행 법령과 제도가 그렇게 정하고 있다. '의료급여법'은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한 법률(아래 노숙인복지법)'에 따른 '노숙인 등'을 의료급여 수급권자 유형 가운데 하나로 포함한다. 하지만 다른 수급권자들과는 달리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된 의료기관에서만 의료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된 의료기관 자체가 매우 적다는 데 있다. 전국 7만여 곳에 이르는 1차·2차 의료급여기관 중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된 곳은 2021년 기준 289곳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보건소(213개소)를 제외한 병·의원급 의료기관은 76곳뿐이다.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된 의료기관이 이렇게 적은 이유가 무엇일까. '노숙인복지법'은 정부와 지자체가 국공립병원, 보건소, 민간의료기관을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료시설 지정 전 미리 해당 의료기관과 협의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체 의료기관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민간의료기관은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전국에서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된 의료기관이 가장 많은 서울시만 하더라도, 병원급 이상 노숙인진료시설 10곳 중 민간병원은 2021년 신규지정된 목동병원 단 한 곳에 불과하다.

즉, 홈리스가 이용할 수 있는 병원은 사실상 일부 국공립병원 외엔 거의 없는 셈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팬데믹 이후 대다수 국공립병원들이 감염병 전담병원으로 전환하면서 ▲비(非)코로나 환자 진료 중단 ▲신환환자 진료 중단 ▲일반병상 소개 ▲응급실 폐쇄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노숙인이 갈 수 있는 병원"이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서울시내 병원급 이상 노숙인진료시설 현황(2022. 1). 10곳 가운데 9곳이 감염병전담병원으로, 당시 제한 없이 응급실 이용이 가능했던 병원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서울시내 병원급 이상 노숙인진료시설 현황(2022. 1). 10곳 가운데 9곳이 감염병전담병원으로, 당시 제한 없이 응급실 이용이 가능했던 병원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 홈리스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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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팬데믹 이전에도 홈리스에게 병원은 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특히 거리노숙을 하는 경우엔 더더욱 그랬다. 갈 수 있는 병원들이 생활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은 데다, 매번 노숙인복지시설을 거쳐 자격증명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2차 의료기관의 특성상 수납·접수 절차가 까다롭고 진료 대기시간이 긴 것도 홈리스의 의료접근권을 낮추는 데 한몫했다. '동네 병원'이었다면 고작 수 분 남짓 걸릴 간단한 검사조차 수 시간씩 기다렸다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런 조건 속에 만성질환 관리가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홈리스에게 병원은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때만 가는 곳 또는 갑자기 쓰러졌을 때 눈을 뜨는 곳일 뿐이었다. 정부가 말하는 "지역사회 기반 보건의료 체계"에서 홈리스는 단 한 번도 고려된 적이 없었다.

법·제도 개정을 통해 소수의 병원만 이용하도록 강제하는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부는 "(건강보험) 재정건전성 악화" "중복투약 등 염려" "의료쇼핑 우려" 등의 변명으로 일관하며 이 차별적인 제도를 지키는 데 앞장서 왔다.

서울시를 비롯한 지자체 역시 홈리스의 평등권 및 건강권 침해에 동참해 왔다. 정부는 의료급여 수급자가 될 수 없는 '노숙인 등'을 지자체가 별도 예산을 편성해 보호하라고 정해놓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자체의 의료지원을 받을 때도 홈리스는 '노숙인진료시설'로 지정된 병원만을 가야 했다. 결국 팬데믹 시기 전면화한 '홈리스 의료공백' 사태의 주범은 차별적인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며 또한 실행해 왔던 정부와 지자체였던 셈이다.

인권위의 권고도 아랑곳 않는 '차별의 카르텔'

올해 1월, 국가인권위원회는 "제한된 의료기관만을 이용해야 하는 차별적 조건"이 코로나19 재난상황에서 "노숙인의 건강권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정부에 관련법 개정을 통해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를 전향적으로 폐지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정부는 '전향적인 폐지' 대신 '한시적인 완화'을 택하며 제도적 차별을 이어가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지난 3월 복지부는 '노숙인진료시설 지정 등에 관한 고시'를 제정·시행하면서 ▲고시 발령 후 1년 동안 ▲감염병 주의 단계 이상의 경보가 발령 시에 한해 ▲요양병원을 제외한 1·2차 의료급여기관을 노숙인진료시설로 한시적으로 확대 지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평등권과 의료접근권을 침해하는 제도의 폐지가 아닌, 감염병 시기에 국한된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개선책을 내놓은 것이다.

대체 이렇게까지 권리 침해로 점철된 제도를 옹호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지난 4월, 청와대 방역기획관이 주재하는 어느 회의에서 만난 보건복지부 관계자에게 왜 인권위 권고를 이행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의협의 반대가 심했다"고 답했다. 물론 대한의사협회는 복지부의 고시 제정안을 두고 "민간 의료기관의 자율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노숙인의 의료쇼핑 및 다른 이용자들의 민원 등 의도치 않은 부작용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입장을 내비친 바 있다는 점에서 "의협의 반대가 심했다"는 복지부 관계자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의협의 반대 때문에 차별과 건강권 침해 현실을 지양할 수 없다는 그의 말에는 어쩐지 옹색하고 '구린' 구석이 있다. 애초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를 도입한 주체는 '의협'이 아닌 '복지부'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당시, 복지부는 "의료이용 관리의 어려움"이라는 순전히 행정의 관점에서 차별을 제도화했다. '진료 거부'를 돌려 말하는 의협의 얼토당토않은 말들이 그럴싸하게 들리도록 판을 만든 주체가 바로 복지부인 것이다. 

건강권 침해하는 차별의 장막, 이제는 걷어내야

몇 해 전, 용산역에서 만난 한 홈리스 당사자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동부병원(서울시립동부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왔는데 차비가 없어서, 그렇다고 무임승차를 하기는 너무 쪽팔려서 용산역까지 그냥 걸어왔다"고. 그가 걸었던 거리는 약 10km이다. 걸어서 2시간 50분이 걸리는 거리. 지하도 두 번과 횡단보도 서른 다섯 번, 계단 두 번을 건너야 한다. 

의료이용 관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정책대상의 의료 이용을 최소화하고, 다른 사회집단과는 달리 제도 이용에 차등을 두고, 그리하여 작은 병 키워 큰 병을 얻게 만들고 감염병 시기엔 아무런 진료도 받지 못하게 하는 말도 안 되는 제도가 우리 사회에 10년이나 빌붙어 있다.

물론 진료시설 지정제도의 폐지가 곧바로 건강권의 완전한 실현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보호자가 없고 간병인을 쓸 수 없는 홈리스를 위한 간호간병통합서비스의 확대, 의료기관 동행지원 등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하지만 노숙인진료시설 지정제도라는 이름의 차별의 장막을 걷어내지 않는 한, 어떠한 정책적 노력도 효과를 보기 어렵다. 다른 한편, 지자체의 역할 역시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팬데믹과 함께 만성질환 관리의 중요성이 높아진 현재, 의료급여 수급자가 될 수 없는 홈리스가 지역 내 모든 의료기관에 항시 접근할 수 있도록 창구를 열고, 치료 후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주거지원을 비롯한 연성의 사회복지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연계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모쪼록 이번 지방선거를 계기로 홈리스 앞에 놓인 '차별의 장막'이 걷어지기를, 그리고 지방정부가 인권침해의 동조자가 아닌 인권보장의 주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부디.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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