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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운영하는 타카하시 미치코(가명, 88세)는 현재 고령으로 인해 폐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 교토의 100년 고서점 "대학당 서점" 책방을 운영하는 타카하시 미치코(가명, 88세)는 현재 고령으로 인해 폐업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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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 시내에 있는 헌책방 '대학당 서점'이 문을 연 지도 어느덧 100년이 넘어간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과 패전, 전후복구와 고도경제성장의 격동기를 거쳤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수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은 변함없이 책방의 서재를 찾았다. 대학당 서점은 일본의 근현대사 그 자체와 함께해 왔다. 

시부모로부터 대학당 서점을 이어받은 남편마저 세상을 떠난 이래, 타카하시 미치코(가명, 88세)씨는 지금까지 홀로 책방을 꾸려왔다. 책방이 그녀에게 갖는 의미를 문자로 풀어내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다.

책방을 통해 타카하시씨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었고, 지역사회로부터 고서점의 가치를 인정받으며 긍지를 가져볼 수도 있었다. 책방은 타카하시씨의 삶에 있어 어쩌면 '전부'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런 책방을 이제 정리하고자 한다. 고령으로 인해 책방 운영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곧 폐업될지 모를 책방 안에는 그녀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나이를 먹은 오래된 책들도 구석구석에 쌓여 있다. 아시아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출판된 도서를 손님이 집어들자, 그녀는 가슴 한 켠에 묻어두고 있던 당시 전쟁에 관한 기억들을 꺼내보였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무르익었다. 80대 후반의 할머니는 어느덧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살았던 10세 소녀로 돌아가 있었다.

일본 '국민학교령'의 의미

"우리 때는 소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어요."

제국 일본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전면전에 돌입했던 1941년의 봄, 일본의 초등교육 기관인 소학교는 국민학교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이때 공포된 '국민학교령'은 일본 교육사에 있어 중대한 기점으로 평가된다. 학교의 존재의의가 지식의 습득과 인격의 도야를 목적으로 한 '교육'에서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질을 연마하는 '연성'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론 기존의 일본 학교 교육 역시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황도주의 국체론'의 틀 안에서 실시돼왔던 것이지만, 국민학교령은 그 교육이라는 용어조차 연성으로 대체했다는 점에서 당시 극단으로 치닫던 사상통제의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학생을 포함한 모든 국민이 총력전의 부속으로 취급 받게 됐음은 이제 명명백백해졌다.
  
백마 탄 쇼와 천황의 이미지는 전쟁기 내내 재생산되며 천황숭배 조성에 이용되었다.
▲ 백마를 타고서 군대를 사열하는 쇼와 천황 백마 탄 쇼와 천황의 이미지는 전쟁기 내내 재생산되며 천황숭배 조성에 이용되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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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타카하시씨는 '멋진 모자'를 쓰고서 '빛나는' 백마 위에 올라 탄 쇼와 천황의 사진을 보고 그를 위대한 존재로 느꼈다고 한다. 학교와 사회에서는 그녀에게 천황을 가리켜 '살아있는 신'이라고 가르쳤다. 타카하시씨가 마주했던 모든 환경에서 끊임없이 계속된 천황숭배 주입에는 때때로 폭력이 동반됐다.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며 신민으로서의 덕목을 훈시하는 '교육칙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몸서리를 치기까지 했다.

"'짐이 생각건대 황조황종(皇祖皇宗)이 나라를 열어 굉원(宏遠)한 덕을 세움이 심후하도다. 우리 신민이 지극한 충과 효로써 억조의 마음을 하나로 하여 대대로 그 아름다움을 이루는 바가 우리 국체의 정화인 바, 교육의 연원 또한 실로 여기에 있다.' 하고, 그 뒤로도 계속 내용이 이어지는데요.

이걸 다 외우지 못하면 '철썩철썩' 무지막지하게 따귀를 맞았어요. 몽둥이로 엉덩이를 맞기도 했는데, 정말 아파서 아연실색했어요. 어떤 때는, 운동장에서 쓰러질 정도로 뺑뺑이를 돌리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설 수도 없었죠."


학교에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천황숭배 주입뿐만이 아니었다. '귀축미영(미국과 영국을 귀신과 짐승에 비유한 프로파간다 문구)'과 같은 적대적 슬로건이 범람했다. 교과서의 지문들은 전쟁과 군대를 예찬하는 내용으로 하나둘 채워졌다. 하늘과 비행기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노래들도 널리 불렸다. 그 노래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남자 어린이들이 몇 년 뒤 소년비행병 모집에 지원하게 되기를 기대하는 군 당국에 학교가 '협조'한 결과였다(관련기사: '가미카제'의 최후를 본 96세 일본 노인의 증언).

징용된 아버지, 해군에서 세상 떠난 친척오빠

그러나 아직은 어린이들에게 있어 전쟁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 타카하시씨 역시 제국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기 이전에는 전쟁을 현실로 체감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일상으로 전쟁이 파고 들어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타카하시씨의 아버지가 노동자로 '징용'돼 전쟁터로 보내지게 됐다. 어린 타카하시씨는 징용이란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멀리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인지했을 뿐이다. 다행히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어디로 보내져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가족들에게 평생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들 중 전쟁에 동원된 것은 아버지뿐만이 아니었다. 타카하시씨의 친척 오빠는 해군에 들어갔다가 전사했지만, 유족들에게는 제대로 된 전사통지서조차 닿지 않았다. 울화가 치민 유족들은 그가 입대한 구레(呉)까지 찾아가 봤지만 결국 죽은 자식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낼 수 없었다.
  
천황을 정점으로 일본 국민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묶는 이른바 '국체사상'은 어린 학생들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동원했다.
▲ 출격 직전 가미카제 특공대원의 식사수발에 동원된 여학생 천황을 정점으로 일본 국민 전체를 운명공동체로 묶는 이른바 "국체사상"은 어린 학생들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쟁에 동원했다.
ⓒ wiki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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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로 점철된 전쟁의 시대에는 여성들과 어린이들 역시 국민으로서의 제몫을 요구받았다. 타카하시씨의 친척 언니는 남성 인력의 공백을 채울 '정신대'로 '근로동원'됐다. 그녀 역시 '출전장병 전송' 때는 일장기를 흔들며 군가를 불렀고, 나라를 위해 싸우는 군인 아저씨들을 위해 위문편지를 썼다. 선생님의 지목을 받고 근처 군 부대를 방문해 작은 위문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그녀의 고사리 손에 죽창이 쥐어졌다. 날카롭게 깎인 죽창을 들고 학교 운동장에 선 타카하시씨와 친구들은 구령에 맞춰 '찔러' 동작을 익혀야 했다. 10살 남짓의 어린 소녀조차도 장차 다가올 본토결전의 예비 전투원으로 전제되기에 이른 것이다.

죽음을 앞둔 장병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노래를 불러주는 소녀의 모습, 공을 차며 뛰노는 대신 오와 열을 맞추고서 죽창 찌르기 훈련에 매진하는 어린이들. 그것은 '일억의 국민이 쓰러져도 마지막까지 항전하겠다'는 전쟁 지도부의 결의가 학교 현장에까지 반영된 결과였다(관련기사: "일억 국민 쓰러져도..." 일본 군인이 지키고자 했던 것). 타카하시씨와 그 친구들은 자신들이 죽창을 쥐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조차 깨닫지 못한 채, 어른들이 시동을 건 파멸의 폭주 기관차에 몸을 맡겨야만 한다.

전세는 죽창 따위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부 지역을 제외한 일본 본토 전역이 연합군의 공습으로 화염에 휩싸였다. 당시 타카하시씨가 거주하던 미에 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80대 후반의 타카하시씨는 지금도 소이탄이 비처럼 쏟아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타오르던 그때의 참극을 기억한다. "우크라이나의 도시들이 폭격으로 무너지는 뉴스 영상들을 보며, 가슴 속에 묻어뒀던 그때의 트라우마가 되살아났다"고 그녀는 말한다.
 
전쟁 말기 연합군에 의한 일본 본토진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항복을 거부하고 있던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일억옥쇄'를 구호로 내걸고서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까지 죽창 훈련을 실시했다.
▲ 죽창 훈련을 받는 어린 여학생들 전쟁 말기 연합군에 의한 일본 본토진공이 예상되는 가운데, 항복을 거부하고 있던 제국 일본의 전쟁지도부는 "일억옥쇄"를 구호로 내걸고서 어린이들과 여성들에게까지 죽창 훈련을 실시했다.
ⓒ 마이니치 신문사 <일억인의 쇼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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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던 세계, 뿌리채 뒤집히다

그러나 일본 전국이 폐허가 되고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전쟁지도부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당국은 격추돼 생포된 미군기 승무원들을 모아 포로수용소를 세우고 이들을 노역에 동원함으로써 제국의 위신을 세우고자 했다. 하지만 타카하시씨는 노역 중인 미군 포로들을 보고 그들이 일본인들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당국이 도모했던 그 어떤 전의고양도 느낄 수 없었다.

상황은 나날이 나빠졌다. 급기야는 히로시마와 나카사키가 적의 '신병기'에 의해 초토화됐다는 충격적인 소식까지 전해진다. 타카하시씨는 "폭탄 한 발에 도시 하나가 날아가는 상황에서, 이제는 방공호에 숨어봐야 화를 면할 수 없다는 절망과 공포가 번졌다"고 그때를 회상한다. 어떤 탈출구도 보이지 않던 그 끔찍한 상황에서, '전쟁 종결'을 발표하는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울려퍼졌다.

그녀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려서, '살아있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절대로 패전할 리 없는 신의 나라가 패전했다는 사실에, 주변의 손윗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러나 당시의 어린 그녀는 당시의 현실을 온전히 인지할 수 없었다. 패전이란 게 대관절 무엇일까. 패전 이후 학교 교육은 빠르게 바뀌었지만, 선생님들이 아이들에게 패전의 의미에 대해 설명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더 이상 공습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전쟁 너머의 일본 사회를 살아가며 조금씩, 패전이란 게 무엇인지 스스로 깨달아 가게 됐다. 일본을 접수한 미 점령군 장병들은, 귀축미영이라는 프로파간다가 무색하게 어린이들에게 초콜릿을 내밀며 신사적인 태도를 보였다.

모두가 두려워하던 헌병이 돼 기세등등하게 전쟁에 나갔던 동네 오빠는 정신이 망가진 채 완전히 폐인이 된 상태로 고향에 돌아와 정처없이 길가를 방황했다고 한다. 살아 있는 신이라던 천황은 스스로를 인간으로 칭했다. 그녀가 살아오던 세계는 뿌리부터 뒤집어졌다.
 
타카하시 씨는 스스로가 인터뷰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며 인터뷰 요청을 극구 사양하기도 했다.
▲ 인터뷰에 응하는 타카하시 미치코(가명, 88세)씨 타카하시 씨는 스스로가 인터뷰 대상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며 인터뷰 요청을 극구 사양하기도 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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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상처 너머로 삶을 이어갔다. 타카하시씨는 폐허가 됐던 일본이 고도경제성장기에 다다랐던 때의 감동을 기억한다. 체제의 폭력, 전쟁의 참혹함 너머로 맞이했던 번영의 열매는 달았다. 그러나 삶의 황혼기에 서서 그동안 이어온 100년 된 책방을 정리하려는 지금 그녀의 마음은 그저 편치만은 않다.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가운데, 세계 어딘가에서는 그녀가 겪었던 전쟁과 폭력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위태로운 시대에, 적지 않은 젊은이들은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에조차 무심한 듯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후세대에 남기고 싶은 당부는 없느냐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던 타카하시씨는 끝내 입가에 맴돌던 말을 정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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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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