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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의 소설 <여름의 끝>에는 라스모이라는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에서 한 계절 비밀스레 피어났다 사그라드는 사건이 담겨 있다. 특별한 일이란 누군가의 죽음 정도인 조용한 마을에 금지된 사랑의 조짐이 퍼진다. 그 사랑 또한 격렬하게 타오르는 열망이 아닌 우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잔잔한 애정을 닮았다. 하지만 여름이라는 뜨거운 계절이 남기는 그을음처럼 누군가의 가슴엔 지워지지 않을 얼룩을 남긴다.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지은이), 민은영(옮긴이)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지은이), 민은영(옮긴이)
ⓒ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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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아내와 아이를 죽게 만든 농부 딜러핸은 사건이 일어난 6월이면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나 괴로워한다.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자란 엘리는 딜러핸의 집에 가정부로 왔다 그와 결혼하여 살지만, 나이 많고 과묵한 남편과 마을에서 떨어진 농장에서의 단조로운 삶이 그녀를 외롭게 한다. 그러다 이웃 마을에서 사진을 찍으러 온 젊은 남자 플로리언을 만나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플로리언은 엘리의 고요한 성품과 외로운 삶에 연민을 갖지만 마음 속에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사랑의 대상을 품고 있다.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변화를 유일하게 알아챈 코널티 양은 엘리를 걱정한다. 젊은 시절 유부남을 사랑했다 실연당해 낙태 수술을 하면서 엄격한 어머니의 냉담과 수모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그녀는 엘리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본다.
 
하지만 그녀는 플로리언을 보았다. 그가 이야기를 듣는 모습, 그러다 손을 내미는 모습, 오펀 렌이 작별 인사를 뜻하는 악수를 공손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플로리언 킬데리를 사랑하는 거다, 그녀는 소리 없이 말했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벗어나 캐슬드러먼드 로드로 들어설 때 엘리는 다시 한번 그렇게 말했다. - 160쪽

윌리엄 트레버는 누군가의 마음에 어떤 감정이 움트고 자라면서 서서히 번지며 자리 잡는 풍경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섬세하게 그려낸다. 미세한 번짐으로 주변과 경계 없이 섞이어 스며드는 색, 하지만 한 번 칠하면 지울 수 없고 다른 색으로 덮는다 해도 흔적이 남는 수채 물감의 치명적 특성을 각인시키며.

소설 속 주인공들이 한 계절을 통과하며 겪는 감정의 변화를 작가는 능란한 수채화가처럼 잠잠하게 채색해간다. 각자가 지닌 과거의 기억이 얽혀 들면서 어딘가는 더욱 짙어지고 어딘가는 희미하게 빛을 낸다. 그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이 우리의 마음으로도 그 색이 젖어 들어온다.

우리는 소설 속 누군가에 기대어 자기 내면의 비밀스러운 감정과 상처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다 주변의 누군가의 마음도 더듬어볼 것이고. 미워하거나 원망했던 누군가를, 혹은 비난하거나 선을 그었던 누군가를.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그게 전부가 아닐 수 있겠구나, 그나 그녀가 악의를 가지고 그런 건 아니었구나.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났지만 사실 누구의 탓도 아닌 거라고.

내게 있는 상처와 비밀처럼 그(그녀)에게도 그만한 상처와 비밀이 있고,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서로를 연민하는 것 밖에 없지 않을까. 윌리엄 트레버는 이런 문장으로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는다. "일어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었고, 일어날 일은 어쨌든 일어날 터였다."(274쪽) 그건 이렇게도 들린다. 자신을 괴롭힐 일도 아니고, 타인을 미워할 일도 아니었다고.
 
그는 자신이 마당에서 트랙터를 함부로 몰았던 때 세인트존 사람이 돌아와 있었다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런 말이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사람들이 제 나름의 결론을 내린대도 그걸 나무랄 수는 없다. 오펀 렌을 나무랄 수는 없다. - 272쪽
이제는 너무 늦었다. 엘리가 깨달은 또 하나의 서늘한 진실은 그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사실을 말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이 겪어서는 안 되는 그런 고통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것이었다. -  273쪽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과거의 사건이 드리운 그늘을 비밀처럼 품고 살아간다. 그 비밀이 그들 자신을 고독하게 하지만 자신의 고독이 타인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한다. 내 아픔에 합당한 치료를 요구하기보단 내가 아프기에 당신의 아픔도 짐작할 수 있다고 그들의 태도는 보여준다.

플로리언은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나고 엘리는 남겨진다. 엘리는 자신의 상실감에 잠기다가도 남편 딜러핸의 고통의 깊이를 가늠하고 자신의 것은 뒤로 넘기기로 한다. 코널티 양은 멀리서 플로리언과 엘리의 이별을 지켜보고 안도한다. 떠나길 바랐지만 남겨진 자신처럼 엘리 또한 남겨졌지만, 엘리를 통해 무언가 위로를 받는다. 누구도 비난할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공평하고 따스한 시선이 그들 사이로 스며든다.

각자가 지닌 상처로 고독하고 어떤 아픔은 영영 지울 수 없을 테지만 누구를 비난하거나 탓하는 대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연민하는 인물을 그려내는 윌리엄 트레버. 그런 시선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저마다의 비밀을 간직한 삶은 고독하겠지만 서로를 연민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괜찮을 것 같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들을 서로에게 행하며 실수하고 실패하겠지만 그의 소설에선 누구도 악인이 되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며 쓸쓸하게 돌아서는 그들을 공감하고 연민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말없는 용서와 포옹으로 우리를 위로한다.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너는 안다, 그는 생각에 잠긴다. 허술한 기억이 무엇을 간직하게 할지 너는 안다. - 291쪽

여름은 끝났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말은 서서히 잦아들고 언젠간 잊힐 것이다. 누군가에겐 고통과 아픔이라는 이름으로 비밀을 새길 것이다. 그런데도 서로를 향한 연민으로 삶은 이어질 것이다. 상처라는 물감에 연민이 번지고 농담이 깊어지면서. 거기서 배어 나오는 쓸쓸함이 아름다움을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아일랜드 출신의 윌리엄 트레버(1928~2016)는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잇는 단편 소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1964년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소설집 15권에 달하는 수백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뉴요커>는 그에 대해 "영어로 단편소설을 쓰는,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격찬했고, 줌파 라히리는 "트레버의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을 수 있겠다"라고 존경을 표하는 등 수많은 영미권 작가들로부터 애정 어린 찬사를 받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은이), 민은영 (옮긴이), 한겨레출판(2016)


태그:#여름의끝, #연민으로이어지는삶, #비밀한상처를지닌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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