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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어느 나라 주한대사관에서 일하던 때의 일이다. 동료들과 점심 후 커피 타임, 이 나라의 부족한 천연자원 이야기가 나왔다. 누군가 산이 많은 데 비해 터무니없이 빈약한 광물 자원을 탄식했다. 누군가는 천연자원 부자 나라들을 부러워했다.

그때 한 외교관이 하하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대한민국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금광이 있을걸요. 머리 좋고 적응력 뛰어나고 겸손한 여성 자원이요." 그저 듣기 좋으라는 외교적 언사였을까? 여러 나라를 드나들며 현지 인력들과 오래 일해 왔던 그다. 대한민국 여성들의 업무 집중력과 효율을 비교 평가하는 객관성을 나름 갖췄다고 전제했다.

"두고 보세요. 대한민국 여성 교육 통계 지표를 주목해 보면 알게 되는 건데요. 딸들을 대학에 보내는 부모들의 교육 투자가 20년 후쯤에 판도를 완전히 바꿀 겁니다. 은퇴한 뒤에도 저는 이 나라를 지켜볼 거예요. 아주 익사이팅한 변화를 기대하고요."

20여 년이 지난 올해 봄, 나는 눈이 번쩍 떠졌다. '개딸(개혁의 딸)' 현상,' 20대와 30대 여성들이 최초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정치 현장의 한 가운데로. 한때 정치 무관심층으로 분류됐던 그들, 이제는 자발적으로 모이고 목소리를 낸다. 노래하고 춤추며 명랑하게 행진한다. 그리고 함께 기도한다.

처참한 패배 충격에 심장 골절로 널브러져 있던 나를 포함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개딸'들 덕분에 다시 벌떡 일어났을까? 그녀들이 몰고 온 희망 덕분이다. 개딸들은 낙관적이다. 건강한 목소리와 유머, 선명한 메시지로 우리를 다시 웃게 한다.

개딸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중심으로 교신하고 오프라인 모임이 조직된다는 것 외에 나는 그녀들을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유튜브로 생중계되는 개딸들의 코스프레 행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보도를 가득 메운 채 풍선과 손팻말을 흔들며 걷는 그녀들, 에너지 넘치는 장면 속 신바람이 가득해서다.

이미 화석화된 여의도 정치집단의 기득권 카르텔을 개딸들이 어떻게 깨부숴낼까? 그녀들의 각성과 연대가 어떻게 정치세력화되며 우리를 바꿀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녹슨 기계가 돼버린 정치권력은 뒤늦게 할리우드 액션식 혁신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개딸들은 눈속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개딸들의 행동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는다. 그녀들을 뒷받침하는 단체, 조직들이 속속 모여들어 팔을 걷어붙인다. 개딸 정치행동의 방향성과 콘텐츠를 정교하게 구축하는 작업도 진행 중이라고들 한다. 함께 가는 '냥아들'과 '개삼촌,' '개이모'들의 존재도 은근 든든하다.

'개딸 현상'은 팬덤으로 시작됐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여의도 정치 혁신운동을 넘어 정치문화 주체의 세대교체를 이끌어낼 조짐이다. 정치적으로 과소대표 되어 온 성별, 연령집단들과 직업군, 그리고 다문화 이주민들을 포함해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회복에 진심인 정치세력으로 말이다.

개딸과 냥아들의 각성이 기초의회 입법 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로도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크고 작은 지방자치 단위의 행정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시민 권리 회복에도 앞장서주면 좋겠다.

개딸들은 우리에게 촉구한다. 정치경제권력, 언론과 검찰의 부패 동맹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미래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맞다. 몰상식과 불합리가 상식과 합리의 탈을 쓴 채 행세하는 현실을 바꾸려면 '존버'만으론 안 된다. 연대와 행동이 답이다.

또 한 가지, 그녀들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연결돼 있다는, 자칫 잊기 쉬운 사실을. 그 자각 위에 우리는 지금 들불처럼 번지는 세대 간 혐오, 남녀갈등을 넘어서는 지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한낱 구호에 그쳐버린 '사람이 먼저다'가 진정한 가치혁명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써클 댄스 장면이 떠오른다. 개딸들의 강강술래다. 언제 어디든 탁 트인 광장이 좋겠다. 커다란 원을 그리면서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 후렴구를 소리 높여 합창하며 힘차게 뛰는 K-딸들의 신바람 춤판! 지축을 흔들 초강력 에너지가 분출될 것 같다. 아직 서툴고 갈 길이 멀지만 그 붉은 마음들은 나라를 바꾸고 아시아를 바꾸고 지구의 미래를 만들어낼 나비의 몸짓이다.
 
2022년 정치무대에 등장한 개딸과 냥아들의 발랄한 참여 활동을 신바람 연대로 표현했다.
 2022년 정치무대에 등장한 개딸과 냥아들의 발랄한 참여 활동을 신바람 연대로 표현했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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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태그:#개딸, #냥아들, #개이모 개삼촌, #K-딸, #가치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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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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