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지난 2016년 9월 1일 레인보우합창단과 함께 유엔본부 공연을 펼치는 한국다문화센터의 김성회 대표.
 지난 2016년 9월 1일 레인보우합창단과 함께 유엔본부 공연을 펼치는 한국다문화센터의 김성회 대표.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윤석열 대통령 취임부터 연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김성회 대통령비서실 종교다문화비서관이 결국 자진사퇴했다. 그러나 김 전 비서관이 사퇴했다고 해서 그가 남긴 논란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은 더욱 그렇다.

그는 지난 1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조선조에 절반에 달하는 40~50%의 인구가 노비였고 그중 노비 2세를 낳을 수 있는 여성 노비가 더 선호됐다"며 "여성 노비는 외거를 하더라도 양반 주인이 수청을 요구하면 함께 밤을 보내야 하는 처지였다는 것은 역사학계에서는 일반화된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그 전날(11일) KBS가 자신이 인터넷매체 <제3의길>에 '조선시대 절반의 여성이 성노리개였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것을 문제 삼은 것에 대한 항변 차원이었다. 김 전 비서관은 "도대체 왜 대한민국의 지식인과 언론은 자기만의 도덕적 편견에 사로잡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학계 논문 등에서 조명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김 전 비서관의 주장이 역사왜곡임을 보여준다. 

조선 인구 절반이 노비? '17세기말 전체 인구 대비 20% 수준'이 학계 정설
  
조선왕조를 광의의 노예제 사회로 보는 이영훈 전 교수조차도  2007년 쓴 <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에서는 "어쨌든 노비 인구가 17세기 말을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조선왕조를 광의의 노예제 사회로 보는 이영훈 전 교수조차도 2007년 쓴 <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에서는 "어쨌든 노비 인구가 17세기 말을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 일조각

관련사진보기

 
먼저 조선시대 당시 '40~50%의 인구가 노비였다'는 김 전 비서관의 주장부터 살펴보자.

성종 때인 1484년,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공노비 총 45만 명 중 10만 명이 도망 중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 이전인 1467년엔 공노비와 사노비를 합쳐 도망 중인 자가 100만 명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다. 당대 학자 성현은 저서 <용재총화>에서 "우리나라 인구는 절반이 노비다. 그러므로 이름난 고을이나 큰 읍이라 해도 군졸의 수가 아주 적다"라고 기술했다. 

이번엔 호적을 살펴보자. 17세기 초 경상도 호적들의 전체 인구 대비 노비 인구는 적으면 42%, 많으면 64%까지 달하기도 했다. 군역 부과대상인 양인 신분의 인구가 호적에서 많이 누락된 것을 감안해 사학계는 15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전체 인구 중 30~40% 정도가 노비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비 인구의 비중은 확연하게 줄어든다. 호적을 처음 연구자료로 사용한 일제강점기 때 학자 시카타 히로시가 대구부의 호적을 조사한 결과, 노비 인구의 비중은 1690년 43.1%에서 약 100년 후인 1789년엔 15.9%로 감소한다. 19세기에는 더욱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1825년 진해현 호적에서 노비 인구는 겨우 2%에 불과했다. 1867년 울산부 호적에서 노비 인구의 비중은 14.4%였다.

호적 자료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후대에 알려준다. 조선왕조가 광의의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조차도 2007년 쓴 <한국사 연구에서 노비제가 던지는 몇 가지 문제>라는 논문에서 "어쨌든 노비 인구가 17세기 말을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라고 서술했다.

이 전 교수뿐만이 아니라 임학순 인하대 사학과 교수 역시 논문 <조선시대 노비제의 추이와 노비의 존재 양태>에서 "노비 인구의 점유율이 17세기 후반까지는 30~50%를 보이다가 18세기에 들어와서 20~40%로 다소 낮아지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20% 이하의 수준으로 급격히 낮아지고 있었다"라고 기술했다.

이렇듯 학계의 정설은 조선의 노비 인구는 17세기 말 정점을 찍은 뒤 18세기, 19세기를 거쳐 급격히 낮아졌다는 것이다.

여성 노비는 '성노리개'? 양인과 혼인 빈번했고 가계도도 있었다
 
김의환 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의 논문, <진천 평산 신씨 노비 가족의 존재양상>에는 자그마치 4세대의 노비 가계도를 소개한다. 여성 노비가 '성노리개'였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김의환 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의 논문, <진천 평산 신씨 노비 가족의 존재양상>에는 자그마치 4세대의 노비 가계도를 소개한다. 여성 노비가 "성노리개"였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다.
ⓒ 한국고문서학회

관련사진보기

 
또 '여성 노비는 외거를 하더라도 양반의 지시에 따라 동침을 해야 하는 이른바 성노리개였다'는 김성회 전 비서관의 주장을 따져보자.

조선시대 노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들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고, 재산을 자식에게 상속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도 존재했다.

특히 조선시대엔 평민인 양인과 노비인 천민이 혼인하는 '양천교혼'이 빈번했다. 15세기 후반 안동 권씨 집안과 16세기 후반 양동 손씨 집안의 노비 중 30%가 양인과 결혼한 이들이었다. 17세기 초 울산에서는 양천교혼율이 50%에 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노비가 정말로 '성노리개'나 다름 없는 신분이었다면 양인과의 빈번한 결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노비 역시 '가계도'가 존재했다. 김의환 충북대 교양교육본부 교수의 논문 <진천 평산 신씨 노비 가족의 존재양상>엔 자그마치 4세대에 이르는 노비의 가계도 나온다.

가계도에는 90세의 노비 허농개가 양인 여성 엇덕과 결혼해 딸 인옥을 낳고, 인옥은 노비 난복과 결혼해 아들 일상과 선이, 딸 일개와 일춘을 낳았다. 장녀 일개는 12살 난 아들 무술과 6살 난 딸 진례를 낳았다는 기록이 적혀 있다. 정말로 여성 노비가 양반의 '성노리개'였다면 이런 가계도가 가능했을까.

특히 김지수 조지워싱턴대 역사학과 교수의 책 <정의의 감정들>에서는 18세기, 19세기로 추정되는 시기에 여성 노비 말숙이 죽은 남편의 토지를 빼앗은 남편의 친족을 관아에 고소해 남편의 땅을 되찾는 사례가 소개되기도 했다. 국가의 법 체계를 이용해 재산권을 행사한 여성 노비도 엄연히 존재했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 진짜 '불편한 진실'은...

김성회 전 비서관은 문제가 된 <제3의길> 기고 말미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구의 4~50%가 노비이고, 놀고 먹는 양반을 제외하면 겨우 20% 남짓의 사람들에 의해 지탱하던 조선사회. 그런 사회에서 누가 국방력을 담당하고, 근대화를 이룩할 힘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거기서 무슨 미래를 기대할 수가 있었겠는가? 국뽕에 취해서, 다른 나라에게 삿대질하기 이전에 우리 역사의 꼬라지를 제대로 알고 분노하더라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 김 전 비서관의 주장은 '국뽕'을 경계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오히려 조선왕조를 폄하하기 위해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것과 같다. 

그는 12일 페이스북의 쓴 글 말미에서도 "
두려운 것은 사회적·도덕적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 언론들의 손가락질이 아니라, 안락함을 위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려는 나의 비겁함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김 전 비서관의 비겁함은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거짓을 어떻게든 '불편한 진실'로 둔갑시키는 데 있다.

동성애 혐오부터 일본군 '위안부' 폄하, 이제는 역사 왜곡에 이르기까지 거짓을 진실로 왜곡하려는 작태다.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