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tvN <우리들의 블루스>의 한 장면. ⓒ tvN

 
허무하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그토록 당차고 스마트한 영주가 돌연 모성애의 화신이 되다니 말이다. 게다 독하게 임신중단을 밀어붙이던 영주가 출산하기로 돌변하면서 어이없는 캐릭터 붕괴에까지 이르렀다. 드라마는 고등학생 영주가 출산 후 어린 엄마가 되어 꿈을 포기하고 갖은 간난신고 끝에 숭고한 모성을 실현하는 것이 이 시대 젊은 여성의 서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일까.
 
영주는 안전한 임신중단을 선택할 권리가 없었다
 
딱 2번 성관계를 가졌다는 영주(노윤서 분)와 현(배현성 분)은 피임에 실패했다. 설마설마했지만 임신 진단 키트에 새겨진 선명한 빨간색 두 줄은 명백하게 영주의 임신을 알리고 있다. 임신에 공여한 것은 두 사람이지만 다급해진 것은 영주만이다. 임신한 것도, 임신을 감당해야 하는 것도, 그리고 이후 출산과 양육을 도맡아야 하는 것도, 엄마가 되어야 하는 영주의 몫이기 때문이다.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똘똘한 영주라 할지라도 모성의 굴레를 벗어나기란 난망하다. 이것이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하는 여자의 가혹한 운명이다.
 
영주의 지독한 운명은 엄마가 되기도 전부터 신산하게 펼쳐진다.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 영주는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인 극단적 심리적 위기에 처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감, 손만 뻗으면 열고 나갈 수 있는 출구가 코앞에서 쾅 하고 닫히는 막막함은, 임신 공여자인 현이 아무리 영주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절대 공감할 수 없는 당사자만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또한 임신중단이 비범죄화되었다고 해서, 여자 그것도 고등학교 여학생의 임신중단을 사회가 환대한다는 뜻이 결코 아님을, 영주는 처절히 실감한다.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았음에도, 안전한 임신 중단을 위한 어떤 후속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은, 임신 중단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여전히 냉혹함을 방증하고 있지 않은가.
 
피임과 임신에 대해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보기조차 힘든 교육 현장에 임신과 출산을 의논하고 계획할 창구가 있을 리 없다. 바로 이러한 척박한 현실이 영주가 임신 앞에서 세상에 벌거벗겨진 채 홀로 던져진 양 고독과 절망을 느껴야 하는 이유다. 청소년에게도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있다지만, 이를 뒷받침할 조치는 전무하다. 영주가 낙인 없이 임신과 출산 혹은 임신중단 등을 상의하고 진료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학교 내 혹은 지역 내 구축되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꾸역꾸역 치미는 입덧을 숨겨가며, 부푸는 배를 복대로 조여 감춰가며, 홀로 느꼈을 공포와 외로움의 시간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여기서 꿈을 접을 수 없는 영주는 임신중단 합법화를 피켓 든 시위자처럼 가슴에 새기고 당당해지려 한다. 하지만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다. 임신중단을 위해 찾아간 산부인과 전문의는 적절한 조언이나 의료적 조치 대신, "그러게 피임을 잘하지 그랬어"라며 비아냥대고, 고작 긴급 상담전화번호를 던져주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저출산을 떠들어대며 온 나라가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정상가족이 아닌 미혼모가 될지 모를 여학생의 임신은 환영하지 않는다고 누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냉대를 보며, 영주 나이 때의 딸이 있고, 이제야 완경으로 임신에 대한 걱정을 놓은 나는, 영주의 임신중단을 무의식적으로 바라고 있던 것 같다. 그토록 반짝반짝 빛나는 18살 영주의 청춘이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영주 뱃속의 존재보다 영주가 해낼 인생을 더욱 응원하고 있었다. 더 나아갈 수 있고 더 날아갈 수 있길 바랐다. 영주는 그럴 수 있었다. 그렇기에 출산을 제안하는 현에게 영주가, "내 몸이야 내가 결정해"라고 독하게 선언할 때, 그 선언이 실행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영주가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는 똑똑한 여학생이 아니라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날라리'였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실수로 벌어진 임신에 제 인생을 고박하는 상실을 목도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영주의 말대로 영주의 몸은 영주의 것이고, 그 몸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영주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영주에겐 꿈이 있다. 서울 의대로 진학해 지긋지긋한 비린내가 진동하는 제주를 뜨고 싶다. 육지 사람들에겐 청량하고 탁 트인 바다가 있는 선망의 섬 제주가, 제주인 영주에겐 "맨날 봐도 똑같은 바다"가 있는 "촌구석"일 뿐이다. 자신을 속박하는 제주에서, 딸만을 바라보고 희생하고 사는 아버지에게서, 홀아버지 딸이니 효도하며 똑바로 살라고 감시하는 이웃의 폭력적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주는 심기일전해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며 분투했다. 이제 날아오를 일만 남은 영주가, 비록 비행 중 갖은 역경에 처하더라도, 그 하늘에 닿아보지도 못하고 날개 죽지를 주저앉혀야 한단 말인가.
 
현과 찾은 병원에서 영주는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듣고 마음을 바꾼다. 태아의 심장박동을 들려주는 의사의 조치는 임신중단을 결심한 임신부와 고민을 함께 하고 대책을 모색하는 것보다 훨씬 인도적인 일일까. 임신중단에 초지일관이던 영주는 출산과 양육 역시 자신의 영리함과 철두철미한 성격으로 돌파할 수 있으리라 착각했겠지만, 출산과 양육은 지능과 본성 그 훨씬 너머의 영역이다. 자신을 버리는 인내와 헌신 없이는 오를 수 없는 험난한 곳에 위치한다.
 
어쩌면 다행히 영주가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자면 영주에게 아이를 같이 키워낼 '온 마을'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러한가? 영주와 임신 공여자 현에겐 '온 마을'은커녕, 조력할 엄마나 가족조차 없다. 둘 모두 아버지 한 부모 가정인데다, 둘 아버지 각각의 삶도 각박하다. 한 부모 가정으로 영주와 현을 길렀을 두 아버지 처지로선, 독박 양육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처절히 알기에, 미성년 자식의 임신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돌 맞을 일만은 아닐 수 있다. 물론 현의 아버지의 폭력적 방식과 영주의 임신을 "몸땡이 함부로 굴려" 이르게 된 징벌인 양 치부하는 인식엔 명백한 여성혐오가 깔려있지만, 미성년 자녀의 임신과 출산을 환영할 수 없는 이유를 아버지들의 몰이성으로만 닦아세울 수는 없다. 그러려면, 한국 사회의 미성년 혹은 미혼자의 임신과 출산에 대한 보조나 지원이 전무한 현실을 먼저 지적하고 개선했어야 한다.
 
영주와 현이 학생인권조례에 의거해 학교에 임신을 당당히 알리고 이를 수용 받았다고, 학교가 아이를 키워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아무리 철이 났다고 해도, 미성년인 현이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비를 벌어 가며 아이를 키우는 일 또한 결코 녹록한 삶이 아니다. 아버지들의 격한 반대가 지금은 한정적으로 둘을 견고한 동맹으로 묶어 놓겠지만, 동맹은 제반 여건에 따라 언제나 헤쳐지고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제주 할매들의 말처럼 18살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되고자 하는 도전이 지금은 기특하겠지만, 출산 후는 다르다. 출산 후에는 부모의 역할을 빈틈없이 해내야만 기특할 수 있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진자리 마른자리 돌봐야 하는 양육의 과정에, 잠 설치는 밤은 얼마일 것이며, 몸이 부서지게 고단한 날은 얼마이겠는가. 돌봄을 하찮은 일로 여기고, 공공에서 촘촘하게 살펴야 할 돌봄을 민간에 떠맡기는 것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믿는 이 나라에서, 출산 후 아기를 돌보며 맞닥뜨릴 영주의 고된 시간이 벌써부터 숨 가쁘게 다가온다. 지쳐 신음하는 영주의 한숨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나는 영주의 출산 결정을 환영할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우리들의 블루스> 임신중단 낙태죄폐지 임신중단 합법화 청소년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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