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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는 기획 '내가 몰랐던 OOO 세계'에 대한 글을 싣습니다.[편집자말]
주말은 당연히 온 가족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 암묵적인 규칙이 얼마 전 열두 살 딸에 의해 깨졌다. "우리 날씨도 좋은데 주말에 뭐 할까? 근처 식물원 갈까?" 하고 물으니 아이는 "나 약속 있는데..."라는 한마디를 날린다.

세 식구가 함께해야 안정적이고 재미있는 삼각형 구도인데 아이가 없으면 바람 빠진 단순한 선분 구도가 된다. 벌써 이런 시기가 왔다는 게 아쉽기만 하다.

아이는 친구들과 만나면 스티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카페에서 아이스티를 마시며 수다를 떨기도 한다. '요즘 애들 다르네, 달라' 하고 규정할라치면, 또 놀이터에서 잡기 놀이를 하며 내 어릴 적 같이 놀기도 한다.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사춘기에 들어섰다.
 
 아이는 나에게 테니스 대신 보컬 레슨을 받고 싶다고 했다.
  아이는 나에게 테니스 대신 보컬 레슨을 받고 싶다고 했다.
ⓒ envato el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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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3개월간 나와 테니스 레슨을 받다가 그만두었다. 알고 보니 아이는 코치님께 엄마랑 해서 테니스가 재미없다고, 만약 친구랑 했다면 재미있었을 거라고 말했다고 했다. 난 딸을 친구 같은 딸이라고 생각했는데 딸에게 나는 친구 같은 엄마가 아니었나 보다. 아이는 나에게 테니스 대신 보컬 레슨을 받고 싶다고 했다.

의외였다. 아이가 노래하는 걸 좋아하긴 하지만 특출나게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보컬학원? 그건 정말 재능이 있을 때나 배우는 거야. 진짜 세상 좋아졌다. 우리 때는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 꿀꺽 삼킨다.

정말 배우고 싶냐고 물으니 격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안타깝게도 집 근처에 유명하다는(아이 말에 의하면) 실용 음악학원이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괜찮은 곳 같아 상담 예약을 하고 아이와 함께 방문했다. 학원 실장님은 아이에게 물었다.

"넌 무슨 음악을 좋아하니?"
"오아시스요."


"뭐? 네가 밴드 오아시스를 안다고? 음악 취향이 나랑 맞는데? 오아시스의 무슨 노래를 좋아해?"

두 사람이 쿵작쿵작 신이 났다. 오아시스? 들어본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가 점점 넓어진다.

보컬 테스트를 하기 위해 녹음실로 갔다. 녹음실에서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니 신기하기 그지 없다. 아이는 오아시스의 샴페인 슈퍼노바(Champagne Supernova)와 빌리 아일리시의 배드 가이(bad guy)를 불렀다.

아이가 이런 음악을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다. 비록 음이 뚝뚝 떨어지지만 그래도 마이크에서 울리는 열두 살 아이의 목소리가 좋아 핸드폰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혼자 생각했다. 팝송을 좋아하니까 영어도 잘했으면 좋겠다, 하고. 실장님은 아이의 노래를 좋게 포장해 말씀하신다.

"영어 발음을 들어보니 듣는 귀가 좋은 것 같아요. 음이 좀 떨어지긴 하는데 그건 스스로도 알고 있을 거예요. 듣는 귀가 좋으니까요. 처음 녹음실에서 노래하는 건데 그거에 비하면 아주 잘하는 겁니다."

아이는 몇 곡을 더 부르고 녹음실에서 나왔고 실장님은 호흡과 발성만 배워도 많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어차피 세 달은 보낼 생각이었다. 세 달을 한꺼번에 결제해야 할인이 된다.

실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아이에게 우리 집 형편에는 딱 세 달만 가능하니 그동안 강사님이 말씀하신 걸 다 흡수해서 네 것으로 만들라고 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궁금했던 걸 물었다.

"너 아까 녹음실에서 녹음할 때 음이 좀 떨어지던데 알았어?"
"아니, 몰랐는데? 그랬어?"


듣는 귀가 있다길래 살짝 기대했는데… 딱 세 달만이다. 만약 열정이 있다면 그 뒤엔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생각해보니 나도 오학년 때 친구 집에서 외국 가수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놀았었다. 토미 페이지를 보며 잘생겼다고 소리를 지르고 신해철 1집 '안녕'의 영어 랩을 한글로 받아적어 부르기도 했다. 그랬다고 내가 영어를 잘하지는 않았으니 뒤늦게 아까 내가 한 기대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나 깨닫고 헛웃음이 나왔다.

집에 와서 난 저녁 준비를 하고 아이는 방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그림을 그렸다. 한참을 방에 있던 아이가 거실로 나와 나에게 물었다.

"엄마 선우정아 알아?"
"어머, 네가 선우정아를 어떻게 알아?"
"유튜브 알고리즘이 선우정아 노래를 추천해줘서 들었지. '구애'란 노래 좋더라."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아이도 알게 되다니. 너무 신나서 아이가 좋다는 '구애'를 틀었다.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는 이렇게 저렇게 넓어지다가 아이가 모르는 나의 세계와 만나기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모르는 아이의 세계가 넓어지는 게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

'아이야, 너의 세계를 이렇게 저렇게 확장하면서 이 세상을 즐기렴. 그러다가 내 세계와도 만나면 그때 지금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자.'

나는 나대로 내 세계에 갇혀 있지 않기 위해, 내 세계의 확장을 위해 계속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음악을 들어야겠다.

태그:##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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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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