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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변호사 양반. 당신 생각엔 6.25가 다 끝난 것 같지? 우리 휴전이야 휴전... 전쟁 잠깐 쉬는 거라고.. 근데 말이야 사람들은 전쟁이 다 끝날 건 줄 알아. 그거 왜 그런 줄 알아? 나 같은 사람 때문에 그래. 나 같은 사람들이 목숨 걸고 빨갱이 잡아주니까 당신 같은 놈들이 뜨신 밥 처먹고 발 뻗고 주무시는 거야. 알겠어?"

2013년 영화 <변호인> 속 고문 경감 차동영(곽도원 분)이 침 튀기며 열변을 토했던 대사다. 영화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젊은 시절 역할을 맡은 배우 송강호와 임시완 등의 명연기로 진한 감동을 주었지만, 필자에게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차동영의 저 무서운 논리다.

아직도 차동영 경감의 서슬 퍼런 눈동자가 기억나는 이유는,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동안 필자의 이성으로는, 어떻게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고문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고, 총칼로 임산부와 어린이를 무참히 죽일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본인의 헌신 덕분에 자유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킬 수 있었다고 맹신한다면 차동영 같은 사람도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필자는 다시 한번 그릇된 신념이 가져온 엄청난 재앙의 현장을 간접적으로 목격했다. 과학 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논픽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통해서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성취 뒤에 숨겨진 진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지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지
ⓒ 곰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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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매우 영리하게 쓰인, 한 편의 대국민 사기 폭로극이다. 일단 궁금증을 유발하는 흥미로운 제목으로 떡밥을 던지는데 덥석 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책을 펼치면, 독자들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어류 분류학자이자 과학자의 비범한 삶을 목격한다.
 
조던은 수년, 수십 년에 걸쳐 지치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당대 인류에게 알려진 어류 중 5분의 1이 모두 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의 업적을 단 한 문장으로 인용했지만, 그런 성과를 내기 위해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는 말 그대로 숭고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특히 그가 평생을 수집한 수많은 표본이 화재로 파괴되고, 뒤이어 발생한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유리단지에 보관한 1000여 종의 물고기들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장면에서는 마치 필자에게 닥친 일인 듯 아찔했다. 
 
당신 삶의 30년이 한순간에 수포로 돌아간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무엇이든 당신이 매일 하는 일, 무엇이든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일, 그것이 아무 의미 없다고 암시하는 모든 신호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중요한 것이기를 희망하면서 당신이 매일같이 의지를 모아 시도하는 모든 일들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 일에서 당신이 이뤄낸 모든 진척이 당신의 발치에서 뭉개지고 내장이 튀어나온 채 널브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고 상상해보라.
 
하지만 타고난 낙천성에 긍정적 착각과 오만을 과하게 복용한 그는, 다른 말로 표현해서 그릿(grit,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끝까지 해내는 힘)의 순수한 결정체 그 자체였던 그는 "나는 바라는 목표를 향해 끈질기게 일하고 그런 다음 결과를 차분히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졌다. 나아가 나는 일단 일어난 불운에 대해서는 절대 마음 졸이지 않았다"라고 말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캠퍼스에 널부러진 물고기의 표본을 움켜쥐며 어떻게 해서든 다시 살려내려 했던 그의 결연한 모습을 보면서 독자들은 생각한다. 자연의 숨어있는 질서를 파헤치고 과학적 체계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첫 번째 부인의 죽음과 사랑하는 아이의 너무 빠른 죽음이 주는 개인적인 슬픔마저도 그의 '가장 높은 수준의 선교 활동'을 막을 순 없었다. 

이 불굴의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여기에서 독자가 전혀 생각하지 못할 반전이 시작된다. 지나친 낙천성은 시야를 좁게 만드는 것인지 데이비드는 <변호인>의 차동영처럼 '자기 생각만이 옳은' 과학자가 되어버렸다. 차동영이 빨갱이 처단에 사명감을 느끼듯, 데이비드는 '어떤 것'을 처단하기로 작정한다. 그 어떤 것을 말하는 순간, 이 책을 읽는 재미의 90%가 사라질 수도 있으니 직접 읽어보길 바랄 뿐이다.

한편, 이 책의 또 다른 한 축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동경할 수밖에 없었던 이 책의 작가인 룰루 밀러의 이야기다. '모든 존재는 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과학자 아버지 때문에 일찌감치 자신의 존재를 광대한 우주에 버려진 먼지 정도로만 인식했던 작가에게, 데이비드가 젊은 시절에 과학자로서 보여준 '생명에 대한 어떤 장엄한 시각'은 커다란 자극이었다. 그녀는 데이비드가 묵묵히 걸어왔던 인생을 붙잡고 파기 시작하면, 본인에게 없었던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본 독자들은 모두 안다. 데이비드를 동경해서 이 글을 쓴 작가가 결국 그를 몰락시키는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어쩌면 룰루는 그의 동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이 책을 썼을지도 모른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은이), 정지인 (옮긴이), 곰출판(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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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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