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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러 총!" "찔러 총!" 충북 충주군(현 충주시) 살미면 설운동 청년들은 김봉한(1923년생)의 구령에 지게 작대기를 들고 '찔러 총' 자세를 취하며 복창했다.

아침저녁으로 살얼음이 어는 1950년 2월 말, 마을에는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 마을 출신 김봉한이 국방경비대를 다닌 경험으로 대한청년단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군사훈련이라고 해야 고작 제식훈련, 총검술, 육박전 등이었다. 하지만 김봉한은 "군사력이 없는 민족은 주권이 없는 나라나 마찬가지다. 힘이 없었기에 왜놈들 밑에서 35년을 노예처럼 산 것이다"라며 훈련을 강조했다.  

국방경비대 출신이 싸리재 학살
 
국방경비대 시절의 김봉한
 국방경비대 시절의 김봉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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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병덕이 아부지..." 홍세화(1919년생)가 경찰에 연행되자 아내는 울부짖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얼마 안 된 1950년 7월 4일. 충주군 살미면 설운동의 마을주민 4명은 살미지서로 끌려갔다.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 시키라는 방침에 따라 충주경찰서도 움직였다. 지서에는 각 마을에서 붙잡혀 오거나 소집명령에 응해 자기 발로 걸어온 보도연맹원들로 북적였다. 설운리, 용천리, 공이리, 문화리, 신당리, 내사리 청·장년들이었다.

"지금부터 보도연맹원들은 충주경찰서로 가서 간단한 교육을 받을 것이다. 교육을 이수한 맹원들은 안전하게 귀가할 것이지만 중도에 이탈하는 자는 목숨을 각오해랏!"
 
충주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싸리재(현재는 건국대학교 충주실습장)
 충주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싸리재(현재는 건국대학교 충주실습장)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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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미지서장의 추상같은 말에 마당에 모인 보도연맹원들이 웅성거렸다. '아니, 무슨 교육 하나 받는데 목숨을 갖고 협박하지?'라는 궁금증이었다. 이후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시각에 두시간을 걸어 25리(10km) 떨어진 충주경찰서로 갔다.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후 다음날 죽음의 싸리재(현 건국대 충주실습장)로 끌려갔다. 뒷결박 당한 흰옷 입은 무리가 '물푸레나무' 사이 골짜기 안쪽으로 꿈틀꿈틀 기어가는 형국이었다.

잠시 후 싸리재에서는 콩 볶는 소리가 들려왔고, 보도연맹원의 비명은 총소리에 가려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싸리재에서 죽은 충주 보도연맹원 수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살미면의 보도연맹원은 73명이었다.

사망자들 모두 흰색 중의적삼 차림이었는데 푸른 색 옷을 입은 이가 딱 한명 있었다. 푸른 색 옷은 다름 아닌 군복으로 한때 군인이었음을 알려준다. 유일하게 군복을 입은 덕분에 시신은 쉽게 수습될 수 있었다. 그는 살미면 설운동의 김봉한으로 한때 국방경비대에 입대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왜 싸리재 죽음의 대열에 합류하게 됐을까? 

남로당원으로 밝혀져 불명예제대

김봉한은 충주농업학교 졸업 후 일본 오사카로 유학을 가 1944년에 귀국했다. 다섯 살 적은 김순분(1928년생)과 결혼한 그는 신혼의 단꿈도 맛보지 못한 채 국방경비대에 입대했다.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4일부터 1948년 9월 5일까지 미군정 아래서 국내 치안을 담당한 육군의 전신이다.

그가 국방경비대를 나와 청주의 7연대에 있을 때 숙청을 당했다. 한때 남로당(남조선로동당의 약칭)원이었음이 밝혀져 불명예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김봉한은 직접 남로당에 가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봉한의 조카 김천기(1932년생)는 김봉한의 아들 김덕기(1946년생)에게 "네 아부지(김봉한)가 (남로당 가입서에) 도장을 찍은 게 아녀. 도장은 우리 시숙(시아주버니)이 몰래 찍은 겨"라고 말했다. 즉, 김천기의 시숙 장만서(가명)가 김봉한의 도장을 몰래 새겨 남로당 가입서에 날인했다는 것이다.

장만서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장만서는 김봉한과 충주농업학교 동창으로 일본 유학을 갔다. 그곳에서 사회주의 세례를 받은 그는 해방 후 자연스레 좌익 활동에 가담했다. 그는 김봉한에게 같이 활동할 것을 제안했지만 김봉한은 '좌익이 태생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그럼에도 총명한 동지를 얻고자 하는 욕심에 장만서는 김봉한의 도장을 위조했다.

김봉한이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음은 충주 출신 6선 국회의원 이종근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육사 8기생 이종근은 5.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고, 이후 치러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고 금의환향한다. 그는 설운동 김봉한 가족과 마을 노인을 만나 "봉한이는 나보다 똑똑했던 친구요. 만약 지금 살아 있다면 국가를 위해 큰일을 할 사람인데..."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봉한은 요즘으로 치면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임관되어 전도가 유망한 청년군인이었다. 하지만 남로당 전력 때문에 불명예제대를 당하고, 이후에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정부 입장에서 김봉한은 '과거 좌익경력자를 전향시켜 대한민국에 충성을 다하는 집단으로 육성시킨다'는 국민보도연맹의 취지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연맹 가입 후 그는 마을 청년을 대상으로 하는 대한청년단의 군사훈련 교관이 되었다. 당시 대한청년단은 마을 단위로 조직돼 군사훈련을 했고, 보도연맹원들도 제식훈련을 받았다. 그가 교육한 이들이 대한청년단원들인지 국민보도연맹원들인지는 불분명하다. 대한민국 건국에 참군인으로 힘을 보태겠다는 그의 원대한 꿈은 깨졌지만, 마을 청년들을 대상으로 한 군사훈련 역시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이웃과 나라를 사랑한 청년 김봉한은 싸리재에서 대한민국 군인의 총격으로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한참 이야기하고 나니 '외삼촌'

김봉한의 비극은 1980년대 후반 북한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이어진다. 

"근데 젊은이는 고향이 어디요? 말씨가 남조선 말툽네다." "야. 제 어머니 고향은 제천입니다." 충북 제천이라는 소리에 막걸리 잔을 들은 노인의 손이 떨렸다. "제천 어디요?" "제천군(현 제천시) 한수면 함암리였는데, 충주 살미면으로 이사 나왔답니다."

중국 만주에서 왔다는 청년 장사꾼의 이야기를 듣던 김철한(가명)은 눈방울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머니 함자가 뭐요?" "〇〇〇입니다."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한참 만에야 노인이 입을 열었다. "자네 엄마가 내 누님일세." "외삼촌!"

만주 출신 장사꾼의 어머니는 충주 싸리재에서 학살된 김봉한의 큰누나였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시집을 갔다. 북한에 살던 김철한은 김봉한의 형으로 한국전쟁 당시에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국군 수복시에 북한행을 택했다. 김철한은 동생 김봉한이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돼 죽은 게 억울해 의용군에 입대했다.

이 일이 있고 몇 년 후 충북 충주에서 다시 한 번 이산가족 만남이 있었다. 중국에 살던 고모와 충주에 살던 김봉한의 아들 김덕기의 상봉이었다. 한참 후에야 동생 봉한의 비극을 알게 된 누나는 조카 김덕기를 보고 남동생의 죽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카의 얼굴에 남동생의 얼굴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살기 위해 만주로 간 누나, 국방경비대를 나와 전도가 유망했지만 죽음을 맞은 동생, 동생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의용군에 입대해 우여곡절 끝에 북한에 정착한 형, 이들은 식민지와 분단, 한국전쟁이 낳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피해자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식민지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김봉한 가족이 헤어지고, 죽임을 당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한 아기(김봉한의 둘째 아들 김도기는 유복자이다)는 없지 않았겠는가'라는 상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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